ISSN 2508-2884 (Online)
8·90년대에 중국문학 작품으로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되고 인기를 끌었던 작품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진융(金庸)으로 대표되는 무협소설이었고, 나머지는 바로 충야오(瓊瑤)로 대표되는 애정소설이었다. 중국 대륙과 수교하기 전까지 중국 문학 작품이라고 부르며 유통되고 소비되었던 것은 홍콩과 대만 작가들의 작품일 수밖에 없었고, 그 가운데에서도 대만 소설가 충야오의 애정소설은 특히 여성 독자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1) 한때 중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소개되어 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던 충야오가 작년 12월 4일 신베이(新北)시 단수이(淡水)구의 자택에서 86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충야오는 필명으로, 『詩經 · 衛風 · 木瓜』의 “나에게 복숭아 던져주니, 붉은 옥으로 갚아주었네(投我以木桃,報之以瓊瑤)”에서 취했는데,2) 이후 그녀가 애정소설 작가로 필명을 날린 것을 보면 절묘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본명은 천저(陳喆)이며, 1938년 4월 20일 중국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시의 런지병원(仁濟醫院)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천즈핑(陳致平)은 푸런대학(輔仁大學)에서 역사를 전공한 뒤 베이핑(北平: 베이징) 량지여자고등학교(兩吉女中)에서 교사로 일하였고, 어머니 위안싱수(袁行恕)는 그곳 학생으로 아버지보다 7세 어렸다. 위안싱수의 어머니는 딸의 국어 선생님이었던 천즈핑이 빈한한 가정 출신이라고 그들의 결혼을 반대하였으나, 그녀의 아버지가 허락함으로써 그들은 결혼에 성공할 수 있었다. 위안싱수는 충야오를 임신하였을 때 겨우 20살이었기에 바로 낙태를 생각하였으나, 의사의 권유로 엑스레이를 찍어본 후 쌍둥이임을 알고는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였다. 그중 첫째가 바로 천저, 즉 충야오였다. 그녀의 이름 ‘喆’은 바로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난 곳인 ‘兩吉’을 의미한다.3)
1949년에 타이베이(臺北)로 이주하여 아버지는 타이완사범대학교(臺灣師範大學) 국문과 교수로, 어머니는 젠궈고등학교(建國中學) 국어교사로 근무하게 되어, 충야오는 비교적 풍요로운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국어를 제외한 다른 과목의 성적이 좋지 않았던 탓에 성적이 좋았던 여동생과 비교당하며 자주 야단을 맞아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이런 충야오의 고충을 잘 들어주던 국어선생님인 장런(蔣仁)과 사랑에 빠져 대학 입학 후 결혼하기로 하였으나 부모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4) 충야오 또한 결국 대학에 합격하지 못하였다.
1959년 4월, 21세의 그녀는 마찬가지로 문학을 사랑하는 타이완대학교(台灣大學) 출신의 마썬칭(馬森慶)과 만난 지 7개월 만에 결혼하였다. 마썬칭은 본래 충야오의 아버지에게 문학 창작의 가르침을 받으러 왔다가 충야오를 만났고, 그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 충야오는 가오슝(高雄)의 타이완알루미늄(臺灣鋁業公司)에 근무하고 있던 그를 따라 가오슝으로 갔다. 1963년 7월에 충야오가 『窗外』에서 자신과 선생님과의 첫사랑을 소재로 작품을 써서 인기를 끌게 되자, 남편 마썬칭은 이로 인해 주변에서 조롱을 당하는 일이 생기고 두 사람 사이에는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마썬칭은 “하루 종일 이런 깊이 없는 것들을 쓰면 평생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거야!(如果你一天到晚寫這些沒深度的東西, 你一輩子都不會進步!)”라고 비판하였고, 이에 충야오는 “당신은 그런 깊은 산속에 숨겨놓고 후세에 전하는 불후의 명작이나 써, 나는 깊이 없고 격조 없는 이야기를 쓸게! 난 이야기 하고 싶어, 단지 이야기만 하고 싶다고. 재주도 없고 학문도 얕아. 쓸 수 있고 발표할 수만 있으면 난 만족해!(你去寫那些藏諸名山, 流傳後世的不朽名著, 讓我去寫沒深度, 沒格調的故事! 我只想說故事, 只愛說故事. 我才氣不高, 學問不深. 寫得出來, 能有地方發表, 我就很滿足了!)”라고 대답하였다.5) 26세 되던 1964년에 그녀는 결국 이혼하였다.
이혼 후 소설 『窗外』의 출판을 계기로 황관출판사(皇冠文學出版有限公司) 사장 핑신타오(平鑫濤)와 사랑에 빠졌다. 핑신타오는 부인 린완전(林婉珍)과의 사이에 세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부인에게 “당신은 굳센데, 그녀는 연약해(你比較堅強, 她(瓊瑤)比較軟弱).”라고 하며 1976년에 이혼하였다.6) 1979년 5월에 충야오와 핑신타오는 결혼하였고, 2019년 5월 핑신타오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 타이베이 다안(大安)구의 커위안(可園)에서 함께 살았다.
사진 1. 핑신타오(平鑫濤)와 충야오(瓊瑤)7)
충야오는 부모님이 모두 국어 선생님으로, 그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문학을 사랑했다. 상하이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그녀의 소설 「可憐的小青」 이 1947년 12월 6일에 『大公報』 제9면 ‘현대 아동’ 칼럼에 게재되었다.8) 14세 때는 ‘뤼구이(呂圭)’라는 필명으로 「幻想」이라는 글을 발표했고, 1954년, 16세 때는 ‘신루(心如)’라는 필명으로 『晨光』 잡지에 「雲影」이라는 문장을 발표했다. 충야오는 모두 65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초기 작품은 자전적 작품이며 대부분 비극적인 결말로 끝났다. 1962년에 『皇冠』 잡지에 「情人谷」 · 「黑繭」 · 「幸运草」 등의 중단편 소설을 잇달아 발표하였으며, 63년에는 『窗外』를 싣고 다시 단행본으로 내어 큰 인기를 끌었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과 연인 간의 사랑 사이의 갈등을 주제로 한 일련의 초기 작품들은 당시 계엄 치하의 대만 사회에서 정치적인 요소를 배제한 애정물로 크게 인기를 끌었다. 강압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애정지상주의적인 주인공의 행위는 일종의 해방감을 선사하였기에 특히 독자들의 반응을 끌어낸 것으로 보인다. 이후 부모와 타협하거나 가정에 안주하는 작품으로 경향이 바뀌기도 하면서 충야오 소설의 여성 주인공들은 결국에는 전통적이고 가부장적인 여성상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흥행에 힘입어 그녀의 소설은 영화화되기 시작한다.
사진 2. 영화 『窗外』의 여주인공 린칭샤(林青霞)9)
충야오 소설을 영화로 만든 첫 번째 감독은 리싱(李行)으로, 그는 충야오의 단편 소설 『六個夢』 가운데 단편 「追尋」 · 「啞妻」를 각각 영화 《婉君表妹》 · 《啞女情深》으로 각색했는데, 특히 《婉君表妹》는 대만에서 흥행과 평판을 동시에 얻어 영화계의 ‘충야오 열풍(瓊瑤熱)’을 일으킨 작품이다. 1965년의 《婉君表妹》를 시작으로, 충야오의 소설은 영화화되기 시작하여 1983년의 《昨夜之燈》까지, 20년도 되지 않은 시간에 충야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50편에 달하여, 당시 영화계의 충야오 열풍을 잘 보여준다. 당시 충야오 작품에 주로 출연한 친한(秦漢) · 친상린(秦祥林) · 린칭샤(林青霞) · 린펑자오(林鳳嬌)는 ‘二秦二林’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녀의 영화작품은 ‘삼청영화(三廳電影)’로도 불렸는데, 거실 · 무도장 · 카페(客廳 · 舞廳 · 咖啡廳)가 중요한 배경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었다. 《彩雲飛》 · 《心有千千結》 · 《我是一片雲》와 같은 작품이 ‘삼청영화’의 대표작이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충야오 영화의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고 흥행에서도 실패하게 된다. 진부한 내용과 단조로운 스타일에 점차 관객들은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1983년에 이르러 충야오 또한 영화를 찍는 것에 염증을 느끼고 자신의 영화사인 쥐싱영화사(巨星電影公司)의 문을 닫는다. 잠시 휴지기를 가진 후에 다시 드라마를 통해 활로를 찾기 시작한다. 1986년, 그녀는 핑신타오와 함께 이런미디어(怡人傳播公司)와 커런미디어(可人传播公司) 등을 설립하고 30부작 드라마 《幾度夕陽紅》을 출시했다. 이는 그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첫 번째 드라마로, 중화 텔레비전 공사(華視, CTS)에서 첫 방영 후 단숨에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충야오 드라마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녀의 소설과 영화에서 보았던 ‘애정지상주의’였다. 주인공이 어떤 신분, 어떤 직업,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든지 간에, 그들은 항상 사랑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사랑에 대한 동경과 추구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사랑이 최우선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종종 고통과 슬픔, 치정과 원망이 가득한 기이하고 곡절 많은 막장극이 펼쳐졌다.
1987년, 대만 당국이 대륙으로의 친지 방문을 허용한 후, 충야오는 즉시 대륙에 들어가 친지를 방문하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고, 다음 해에 방문하게 되었다. 1989년, 대만 당국이 영화 산업의 대륙 촬영을 허용하자, 또 즉시 제작진을 데리고 대륙에 드라마를 촬영하러 갔다. 그녀는 대륙에서 촬영을 한 첫 대만 제작자가 되었고, 양안의 합작 드라마 시대를 열었다. 이후 충야오의 거의 모든 드라마가 대륙에서 촬영되었다. 1990년은 충야오 드라마가 절정에 달했던 해로, 그 해에 총 네 편의 드라마, 《婉君》 · 《啞妻》 · 《三朵花》 · 《雪珂》가 TV에서 방영되었는데, 모두 대륙에서 촬영한 것들이었다.
충야오 드라마의 여성 주인공은 소설에서처럼 전통적 여성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아름답고 총명하고 근면하고 학식과 예의를 갖췄지만, 모두 전통적인 가부장제에 의해 속박을 받는다. 이러한 비극적 여성의 형상화를 통해 충야오는 전통적 가부장제에 의한 여성의 물화 및 남성에의 종속화를 고발하고 있다. 다만 모순적이게도 그녀의 작품에서 대부분의 여주인공은 현모양처로 등장하여 자신의 희생을 통해 난관을 극복하려고 시도한다. 또한 최종적으로 결혼을 완벽한 결말로 삼고 있으며 전통적인 가부장제 가정에 대한 이상적인 상상을 그리고 있다.10)
사실 충야오는 1981년에 처음 대륙에 등장하였다. 그녀의 「人在天涯」가 『海峽』 잡지에 실렸으며, 1983年에 「我是一片雲」도 같은 잡지에 연재되었다. 1985년에 7편의 소설이 출판되었으며, 같은 해 12월에 「水靈」의 일부가 대륙에서 출판된 첫 번째 대만소설선집인 『情人—臺灣中短篇小說選萃』에 실렸다. 이후 4년 동안 약 40권의 충야오 소설이 대륙에서 출판되었다.
1985년 출판된 7권의 소설은 『在水一方』 · 『彩雲飛』 · 『幾度夕陽紅』 · 『翦翦風』 · 『雁兒在林梢』 · 『我是一片雲』 · 『船』이었다. 이것들은 이후 대륙에서 일어난 ‘충야오 열풍(瓊瑤熱)’의 굳건한 기초가 되었다. 충야오가 대륙에 출현한 역사적 배경은 1980년대의 ‘문화 열풍(文化熱)’이었다. 이러한 ‘문화 열풍’은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수십 년간 막혀있던 둑이 터지듯 밀려들어온 것으로, 크게 서방과 중국 전통의 지식으로 나눌 수 있었다. 충야오의 1960-70년대 소설은 서양 음악(고전, 유행), 문학(여러 고전 작가), 유행 문화(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생활방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1980-90년대의 대륙 독자들에게 그녀가 묘사한 것은 새롭고 현대적이며 이국적인 정취의 세계였으며, 그것은 서양화되고 동시에 만질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있는 세계였다. 이러한 ‘현대적’ 생활을 하는 사람이 우리와 같은 글을 쓰는 같은 인종의 대만인이었기 때문이다. 덩리쥔(鄧麗君)과 기타 홍콩과 대만의 스타들처럼 충야오가 대표하는 것은 일종의 친근하고 소화하기 쉬운 ‘현대성’이었다. 홍콩과 대만의 유행문화가 전달하는 것은 대륙의 대중이 바라는 아름다운 생활이었다.11) 특히 충야오의 작품은 대부분 고전 시사의 명구에서 취하여 작품명을 삼았으며, 중간 중간 고전시사를 작품 속에 인용하여 중국문학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있어서 더더욱 독자에게 친근감을 주었다.12)
그녀의 마지막 작품은 소설이 아니라 남편 핑신타오를 간병하며 느낀 ‘존엄사의 권리(善終權)’에 대해 쓴 글이다. 2016년 핑신타오가 치매와 뇌졸중을 앓기 시작하고 간병을 하면서 핑신타오의 치료에 대해 전부인인 린완전의 자녀들과 의견 차이로 인한 갈등이 있었다. 이 경험을 통해 환자가 스스로의 죽음을 결정할 권리가 있어야 함을 『雪花飘落之前: 我生命中最后的一课』에서 밝혔다. 1부에서는 핑신타오가 질병을 앓으면서 삽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서술하고, 2부에서는 충야오 부부가 겪은 희로애락을 쓰고 있다. 2017년 8월에 출판한 이 책의 ‘아들과 며느리에게 보내는 공개서신’에서 그녀는 자신이 어떤 중병을 앓든 수술을 하지 말고, 중환자실에 보내지 말고, 비위관을 삽입하지 말고, 생명유지를 위한 관을 삽입하지 말고, 모든 최후의 응급조치를 하지 말 것을 부탁하였다.13)
사진 3. 손녀, 며느리, 충야오, 아들14)
2024년 12월 4일 그녀는 자신의 페이스 북에 올린 글에서 “친애하는 친구들에게. 울지 말고, 슬퍼하지 말고 나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기를. 나는 이미 나는 듯 떠났습니다!(各位親愛的朋友知音們: 不要哭, 不要傷心, 不要為我難過. 我已經‘翩然’的去了!)”라고 하며 죽음을 암시하였다.15) 그리고 2024년 12월 4일 오후 1시 22분쯤 신베이(新北)시 단수이(淡水)구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되었다. 그녀의 아들 천중웨이(陳中維)가 어머니의 유서를 확인한 뒤 비서를 통해 이를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알려졌다.16) 12월 11일 화이아이관(懷愛館)에서 가족장으로 화장하고 양밍산(陽明山)의 전산위안(臻善園)에 묻혔다.17) 충야오의 별세 소식이 알려지자 린칭사(林青霞) · 린신루(林心如) · 판빙빙(范冰冰) · 쑤유펑(蘇有朋)등 그녀의 작품에 출연한 배우 및 가수 등이 잇달아 추모와 애도를 표하였으며, 대륙 각지의 방송국에서는 그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와 드라마를 특집으로 방송하였다.
정찬학 _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중국학술원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 참고자료
경요, 문희정 옮김, 『눈꽃이 떨어지기 전에』, 지식의 숲, 2018.
엄진주, 「한국현대문학의 중국현대소설 수용사 연구」, 선문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박사학위논문, 2020.
이복영, 「경요소설에 나타난 애정관 연구」, 숙명여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석사학위논문, 2006.
瓊瑤, 『我的故事』, 武漢, 長江文藝出版社, 2008.
史玉根, 『一個真實的瓊瑤』, 東方出版社, 2008.
林芳玫, 『解讀瓊瑤愛情王國』, 臺灣商務印書館, 2006.
林婉珍, 『往事浮光』, 臺北, 皇冠出版社, 2018.
林欣儀, 「台灣戰後通俗言情小說之研究─以瓊瑤60-90年代作品為例」, 國立中興大學 中國文學系 碩士學位論文, 2002.
奚密(Michelle Yeh), 「臺灣流行文化對當代大陸的影響:瓊瑤與席慕蓉」,『臺北大學中文學報』 29期, 2021. 3.
https://db.nmtl.gov.tw/site2/dictionary?id=Dictionary01859
https://kr.rti.org.tw/radio/programMessageView/id/6177
https://money.udn.com/money/amp/story/5648/8406140
https://www.chinatimes.com/realtimenews/20241205001645-260404?chdtv
https://cn.nytimes.com/obits/20241209/chiung-yao-dead/zh-hant/
https://baike.baidu.com/item/%E9%99%88%E8%87%B4%E5%B9%B3/10602505?lemmaFrom=lemma_relation_starMap&fromModule=lemma_relation-starMap&lemmaIdFrom=177
https://baike.baidu.com/item/%E5%BA%86%E7%AD%A0/65177988
https://www.facebook.com/p/%E7%93%8A%E7%91%A4-100001765494957/
https://www.knews.com.tw/news/6126485E01F67C26994926918FEB6D40
https://www.thepaper.cn/newsDetail_forward_29543475
https://www.cna.com.tw/news/acul/202412110108.aspx
https://www.cheers.com.tw/article/article.action?id=5103906&page=2
https://tw.nextapple.com/entertainment/20241211/5D8BD494F89435691EF55145598AD9E6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https://www.chinatimes.com/realtimenews/20241205001645-260404?chdtv
사진 2. https://kr.rti.org.tw/radio/programMessageView/id/6177
사진 3. https://www.chinatimes.com/realtimenews/20241205001645-260404?chd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