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지난 12월 3일, 한국에서 갑작스럽게 계엄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이 전 세계를 흔들었다. 대만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대만 언론은 한국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도했고 필자의 휴대폰은 지인들의 궁금증과 염려가 담긴 연락으로 쉴 틈 없이 울렸다. 다행히 계엄은 선포된 지 6시간 만에 국회에 의해 해제되었고 긴박했던 밤은 일단락되었다. 필자 또한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 대만에서는 또 다른 논란이 불거졌다. 대만 집권 여당인 민진당의 교섭단체가 운영하는 공식 소셜미디어 계정에 올라온 한 게시물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해당 게시물은 한국에서 선포된 계엄을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고, 이로 인해 대만 내부는 물론 한국 네티즌들까지 크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같은 민진당원들조차 이를 비판했다. 문제의 게시물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국 국회는 친북한 세력에 의해 조종되고 있으며, 한국의 윤석열 대통령은 자유 헌정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긴급계엄을 선포했다.
대만 입법원에서는 국민당과 민중당이 국방 예산을 삭감하고, 헌법에 어긋난 권한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대법관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악의적으로 재정법 개정을 시도하며 연금 개혁을 백지화하고 국민들의 공작자 파면권을 무력화하려 한다. 여러 차례 국가안보와 관련된 법안의 통과를 방해했으며 왕의촨(王義川 - 민진당 입법위원)의 취임을 온갖 수단을 동원해 방해하고 있다.
Team Taiwan(대만이라는 정체성과 가치를 공유하는 우리들)은 매 순간 전 세계적으로 위협을 가하는 어둡고 악한 세력이 이 나라를 잠식하지 못하도록 저항하고 있다.”
사진 1. 문제가 된 게시물. 게시물은 게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삭제되었다.
해당 게시물은 올라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둘러 삭제되었지만, 이미 논란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 뒤였다. 대만 내부에서는 민진당 측의 ‘부적절한 발언’에 대한 질타가 쏟아졌고, 한국에서도 “계엄의 아픔을 38년간 겪은 대만이 어떻게 이런 발언을 할 수 있느냐”는 격앙된 반응이 이어졌다.
논란의 여파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라이칭더(賴清德) 총통은 야당으로부터 공식적인 사과 요구를 받고 있으며, 민진당은 입장을 정리하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특히, 위헌의 소지가 있는 계엄을 ‘정권 수호를 위한 정당한 결정’으로 포장하려 한 점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하기엔 그 파장이 상당했다.
- 계엄을 지지하는 듯한 발언, 그 이유는?
해당 게시물은 한국의 계엄을 명시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유 헌정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한국의 윤석열 대통령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는 표현은 한국 계엄에 대한 암묵적 지지를 내포한 것으로 해석되기에 충분했다. 21세기 민주주의 사회에서, 특히 정당성이 결여된 계엄을 옹호하는 태도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단순히 이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대만은 3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계엄의 고통을 겪으며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투쟁해온 경험이 있다. 특히, 그 어두운 역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민진당은 계엄이라는 단어가 대만 사회에서 지니는 민감한 정치적 함의를 결코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민진당은 이번 사태에서 한국의 계엄을 지지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을까?
단순히 한국 상황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우발적 실수였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계엄의 상처가 아직도 깊게 남아 있는 대만에서 야당인 국민당과 민중당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계엄을 암묵적으로 정당화하는 표현이 쓰였다는 점은 이 사건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는 어쩌면, 유사한 정치적 환경을 공유하는 두 국가의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구조적 문제를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민주주의가 직면한 도전과 정치적 격변 속에서 각국의 체제가 가진 균열을 선명히 드러낸 사례로도 해석될 수 있다.
민진당이 한국의 계엄을 옹호하는 실수를 한 배경에는 대만 내부의 정치 지형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여소야대(與小野大) 국면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잃은 민진당이 자신의 정당성과 집권 기반을 지키기 위해 극단적인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실제로, 2024년 총선 이후 대만 입법원에서는 국민당과 민중당의 연합이 법안 통과를 주도하고 있다. 민진당이 입법 과정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현실은 이번 ‘계엄 지지’ 논란과도 무관하지 않다. 현재 대만의 입법원에서 민진당이 처한 정치적 상황과 민중들이 입법원 앞에서 벌이고 있는 시위는 이 발언의 배경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 반복되는 충돌: 여소야대 속에서 무력한 민진당
대만 입법원에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전체 입법위원 113명 중 과반수인 57명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현재 민진당은 51석, 국민당은 52석, 민중당은 8석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국민당과 민중당이 연합하면 사실상 대부분의 법안을 주도적으로 통과시킬 수 있는 구도가 형성된 셈이다. 2024년 새로 선출된 입법위원들이 활동을 시작한 이후, 야당 연합은 입법원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입법원 직권행사법(立法院職權行使法)’ 개정을 추진했다. 이에 민진당이 강력히 반발하며 큰 충돌이 빚어졌다. 법안 통과를 저지하려는 민진당과 이를 강행하려는 야당 간의 충돌로 입법원은 연일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갈등은 2024년 5월, 대만 청년들이 법안 개정에 반대하며 입법원으로 몰려든 ‘파랑새 운동(青鳥運動)’으로 이어졌다.
한편, 파랑새 운동의 여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입법원은 또다시 새로운 법안 개정 문제를 둘러싼 격렬한 대치와 시위에 휘말렸다. 이번에 국민당·민중당 연합이 통과시킨 핵심 법안 개정안은 크게 세 가지이다.
1. 공직자 선출 및 파면법(公職人員選舉罷免法) 개정
첫 번째는 ‘공직자 선출 및 파면법’(이하 ‘파면법’) 개정이다. 이 법안은 공직자에 대한 선거 및 파면 절차를 규정하고 있는데, 현재 대만의 파면법에 따르면 다음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 파면이 성립된다.
① 찬성표가 반대표보다 많아야 한다.
② 찬성표 수가 해당 선거구 유권자 총수의 4분의 1 이상이어야 한다.
현행 규정에 따르면, 선거인 수가 10만 명인 선거구에서는 2만 5천 명의 찬성만 모여도 시장이나 입법위원을 파면할 수 있다. 실제로 2020년 가오슝(高雄)시 시장이었던 한궈위(韓國瑜 - 현 입법원장)가 이 규정에 의해 파면된 사례가 있다.
국민당과 민중당은 이 기준이 지나치게 낮아 파면이 남용되고 있다고 주장하며, 개정을 통해 파면 절차를 더욱 까다롭게 만들려 한다. 국민당은 파면안이 통과되려면 찬성표가 해당 공직자가 선거에서 얻은 득표수를 초과해야 한다는 기준을 추가하자고 제안했다. 민중당은 파면에 동의하는 유권자가 주민등록증 사본을 첨부해 행동 의사를 명확히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민진당은 이러한 개정안이 사실상 국민의 파면권을 박탈하려는 시도라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특히, 국민당과 민중당의 개정 시도가 과거 파면된 인물들과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자리를 보호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다고 주장한다.
2. 재정법(財劃法) 개정
두 번째 이슈는 재정법 개정이다. 현재 대만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세입을 75:25로 나눠 갖고 있다. 그러나 국민당과 민중당은 이 비율이 지나치게 중앙집권적이며 지방정부의 만성적인 재정난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에 따라 이들은 다음과 같은 개정을 제안했다.
① 세입 분배 비율을 75:25에서 60:40으로 조정(공통)
② 직할시와 일반 시·현(縣)의 배분 기준을 통일(국민당)
③ 새로운 재정 분배위원회 설립(민중당)
이에 대해 민진당은 이러한 개정이 중앙정부의 재정 능력을 약화시키고 국방, 사회복지, 공공임대주택 건설 등 핵심 정책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민진당은 이와 같은 개정이 중앙정부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결과적으로 민진당 정부의 정책 수행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주장한다.
3. 헌법소송법(憲法訴訟法) 개정
세 번째는 헌법소원심판 절차를 다루는 ‘헌법소송법’ 개정안이다. 현재 대만의 헌법소원은 국민이 헌법상의 기본권 침해를 주장하며 헌법재판기관에 청구할 수 있는 제도로, 대법관의 결원이 있어도 심판이 진행될 수 있다. 국민당은 이를 개정해, 헌법소원이 개시되려면 총 15명의 대법관 중 최소 10명(민중당은 9명)의 대법관 참여를 의무화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문제는 현재 대만의 대법관 총원 15명 중, 야당이 대법관 임명에 동의하지 않아 무려 7명이 공석 상태라는 점이다. 만약 새 기준(10명 또는 9명 이상 참여)이 도입되면, 이미 결원이 많은 대만 대법관 체제에서는 헌법소원 자체가 사실상 마비될 가능성이 높다. 민진당은 이를 야당이 대법관 임명을 지속적으로 방해하면서 헌법소원 심판까지 무력화하려는 정치적 공세라고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표 1. 국민당과 민중당이 개정하려는 법안의 주요 내용
하지만 민진당은 이러한 법안들을 저지하기 위해 입법원 회의장의 개시를 물리적으로 막는 것 외에는 뚜렷한 대응책이 없는 상황이다. 현재 대만 입법원에서는 협치나 대화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지난 파랑새 운동 당시 울려 퍼졌던 “토론이 없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沒有討論,不是民主)”라는 구호는 여전히 유효하며, 대만 민주주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사진 2, 3. 올해 들어 대만 입법원에서는 여당과 야당 간의 충돌이 반복되고 있다.
왼쪽은 2024년 5월 ‘입법원 직권행사법’ 개정안 통과를 앞두고 벌어진 충돌 장면
오른쪽은 12월 파면권과 재정법 개정을 두고 벌어진 충돌장면이다.
시위의 현장에서
지난 12월 20일, 가늘게 비가 내리는 가운데 대만의 입법원 앞은 수많은 시민들로 붐볐다. 시위 현장 특유의 긴장감 속에서, 마련된 무대 위로 사람들이 차례로 올라가 격정 어린 목소리로 군중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경찰은 혹시 모를 충돌에 대비해 주변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날은 국민당과 민중당이 여러 법안을 통과시키기로 예정된 날로, 이를 저지하려는 시민들이 입법원 앞에 모여든 것이다.
사진 4. 12월 20일, 입법원 주변 도로는 한 곳을 제외하고 모두 경찰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궂은 날씨 속에서도 시위대는 젊은 청년에서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까지 세대를 아우르는 모습이었다. 무대에서 연설이 시작될 때마다 군중은 열띤 구호로 화답했다. 한 청년은 도로 옆 나무에 "민주의 성지인 대만을 지키자"는 문구가 적힌 팸플릿을 걸어두었고, 자신의 목 뒤에도 구호가 적힌 팸플릿을 걸어 지나다니는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사진 5, 6. 시위 현장의 한 젊은이. “민진당 입법위원들은 우리가 뽑은 이들이다.
그들을 공격하는 것은 우리를 공격하는 것과 같다”라고 쓰인 팻말을 목에 걸고 있다.(좌)
나무에 “민주의 성지를 지키자.”라고 적인 팻말이 걸려있다.(우)
필자가 지인과 시위와 관련한 대화를 나누던 중, 옆에서 이를 듣고 있던 한 시민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국민당은 대만 민주주의를 파괴하려 하고 있어요. 민진당이 장기 집권할 가능성이 보이니, 국민당은 국회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방식으로 행정부의 국정 운영을 방해하며 대만을 중국에 팔아넘기려 하고 있습니다.”
정치에 관심이 있는 한국 독자라면 이 발언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국민당을 한국의 보수정당, 민진당을 진보정당으로 바꾸고, 중국을 북한으로 대체하기만 하면 한국 정치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논리로 변환되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가 질문을 던졌다. “그렇지만 국민당 위원들도 선거를 통해 선출된 입법위원들 아닌가요? 이들이 입법원 내에서 절차를 따라 진행하는 것을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그러자 시민은 단호히 답했다. “그렇지만 지금 국민당의 행태는 너무 지나칩니다. 애초에 그런 정당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문제이고,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점은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짧은 대화와 해당 그의 단호한 반응은 대만 민진당의 정치적 입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더불어, 특정 정치적 담론이 다른 국가의 맥락에서 어떻게 차용되고 재구성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필자는 대만 민진당이 어떤 심정을 느끼고 있을지, 그리고 한국에서 계엄이 선포되었을 때 순간적으로 이를 지지하는 게시물을 작성했던 이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계엄 지지의 맥락
앞선 문제의 게시물을 다시 살펴보자.
“한국 국회가 친북한 세력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문구는 사실상 대만 입법원이 친중국 세력에 의해 조종된다는 말을 돌려 말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또한 “한국의 윤석열 대통령이 자유 헌정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긴급계엄을 선포했다”는 표현은 현재 대만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애쓴다고 생각하는 민진당의 상황을 반영한 투영적 발언으로 볼 여지가 있다. 즉, 한국의 사례를 통해 대만 야당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대만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민진당의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담긴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는 여소야대 상황에서 민진당이 처한 어려움에 대한 푸념이자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정치적 계산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해당 게시물은 자신들을 ‘Team Taiwan’으로 규정하며 입법원을 장악한 세력, 즉 ‘악한 집단’과 구분 지었다. ‘Team Taiwan’은 대만의 정체성과 가치를 공유하는 집단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대만을 하나의 팀으로 상징화한 표현이다. 이는 스포츠나 문화 행사에서 자주 사용되지만, 정치적 맥락에서는 대만을 독립된 국가로 보는 뉘앙스를 담고 있어 국민당과 같은 친중국 성향의 세력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다. 이 맥락에서 “Team Taiwan은 전 세계적으로 위협을 가하는 어둡고 악한 세력이 이 나라를 잠식하지 못하도록 저항하고 있다”는 문구는, 대만 정체성을 지지하는 ‘범록연맹’이 국민당과 같은 친중국 세력에 저항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암시하며 국민당의 행동을 비판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민진당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 한국 집권세력의 정치적 현실에서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1. 여소야대 정국에서 야당의 법안 통과를 저지할 수 없기에 무력한 상황이다.
2. 야당이 정부나 법원의 인사 임명을 거부하거나 지연시켜 정상적인 국정 운영을 방해하고 있다.
3. 국가를 위협하는 적대 세력(북한과 중국)이 명백히 존재하나 야당은 이에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보인다.
4. 야당은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위협하는 세력이다. 반면, 우리는 외부 위협에 맞서 국가를 지키는 민주주의의 수호자이다.
결론: 민주주의의 도전과 양국의 과제
민주주의는 특정 정당이나 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며, 다양한 의견과 경쟁, 타협과 협력을 통해 발전한다. 하지만 자신들만을 ‘민주주의 수호자’로 규정하고 상대를 ‘악한 세력’으로 단정하는 태도는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민진당이 한국의 계엄 사례를 끌어들여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화하려 한 시도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독점하려는 위험한 접근이다.
대만과 한국의 사례는 불안정한 국제 정세와 여소야대라는 정치적 구조, 그리고 지도자의 오판이 결합할 때 민주주의 체제가 얼마나 쉽게 위협받을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정치적 갈등이 지도자의 오판으로 비상계엄이라는 극단적 형태로 나타났고, 대만에서는 이에 대한 순간적인 지지로 표출되었다. 두 국가 모두 민주주의의 가치를 강조하지만, 정치적 대립 속에서 그 본질을 훼손할 위험에 늘 직면해 있는 것이다.
두 국가의 정치적 긴장은 단순히 여당과 야당 간의 갈등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 이는 대화와 협력의 부재, 그리고 정치적 책임 의식의 결여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반영한다. 대만과 한국이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민주주의 체제의 건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대립을 넘어서 타협과 협력의 문화를 되살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추가자료) 입법위원 보좌관 인터뷰
필자는 아는 지인의 도움으로 대만 입법위원의 사무실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필자가 방문한 곳은 민진당 소속 비례대표 입법위원의 사무실로, 요청에 따라 구체적인 이름은 밝히지 않기로 한다. 사무실에서 필자는 입법위원 보좌관들과 대화를 나눴고, 일부는 SNS를 통해 추가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 7. 입법위원 사무실. 보좌관들이 입법원 회의실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다.
[질문 1] 올해 5월부터 12월까지 국민당과 민중당은 행정부의 권한을 약화하고 입법원의 권한을 강화하는 법안들을 추진해 왔다. 이는 야당에 유리한 구도를 만드는 셈인데, 국민당이 차후 집권 여당이 된다면 이 법안은 결국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법안을 강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혹시 국민당은 향후 집권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한 것인가?
[답변 1]
보좌관 1:
일리가 있는 추측이다. 국민당의 주된 지지층은 노년층이다. 젊은 세대, 특히 대만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이 대만의 정체성을 버리고 중국의 정체성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결국 국민당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으며, 집권 여당이 될 가능성도 희박해지고 있다. 국민당 스스로도 이러한 상황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행정부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입법원의 힘을 강화해, 여당이 아니더라도 정치적 주도권을 유지하려는 전략을 취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는 행태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러한 과정에서 국민당의 행태는 과도한 측면이 있다.
보좌관 2:
정치란 본질적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행동을 바꾸는 것이다. 과거 마잉주(馬英九) 정권 시절 민진당 역시 입법원의 권한 강화를 시도한 적이 있다. 어찌 보면 이는 국민당과 민진당이라는 특정 정당의 문제가 아니라 대만 정치의 근본적인 문제일 수 있다. 어떤 정당이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최대한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행태가 좋은 정치라고 평가되기는 어렵다. 국민당이 지금 행하는 전략은 그들 입장에서 논리적일 수 있지만, 대만 정치 전반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질문 2] 방금 국민당의 행태가 너무 과하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이기에 그렇게 평가하는지 궁금하다. 야당의 여당 견제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아닌가? 또한, 과거 차이잉원(蔡英文) 정부 시절 민진당이 과반을 차지했을 때 국민당도 “민진당은 대화 없이 자기 마음대로 한다”고 비판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답변 2]
보좌관 1:
맞다, 야당의 견제는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국민당은 행태는 정말 도를 넘었다. 예를 들어, 우리 사무실의 A 위원님은 ‘원주민위원회’(가칭)에 속해 있다. 원주민 관련 법안 개정이 추진될 경우, 해당 위원회 소속 위원들끼리 논의와 협의를 거쳐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국민당은 이런 기본적인 절차를 완전히 무시한다. 그들끼리 회의장에서 법안을 통과시키고는 “원주민 관련 법안이 통과되었다”고 통보한다. 원주민위원회 소속 위원조차 해당 법안의 개정안 내용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차이잉원 정부 시절 민진당도 과반을 이용해 법안을 통과시켰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당시에는 대화라는 게 존재했다. 지금 국민당은 그런 기본적인 대화조차 완전히 배제한 상태다. 그리고 당시 민중들이 지금처럼 거리로 나와 시위를 했던가? 그렇지 않았다. 현재 국민들이 “토론이 없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국민당의 법안 개정에 반대하고 있는 상황에 답이 있다고 본다.
보좌관 2:
이 역시 대만 정치의 본질적인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어떤 정당이 잘했는지, 못했는지를 따지는 건 부차적이다. 대만 정치 환경 자체에 구조적 문제가 있다. 2020년에는 민진당이 국민당과 협의 없이 미국산 돼지고기 수입 법안을 강행했고, 이로 인해 입법원에서 난투극이 벌어졌다. 당시 국민당 의원들은 돼지 내장을 던지면서까지 격렬히 항의했다. 그런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마잉주 정부 시절에는 국민당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추진했고, 그때는 민진당이 강하게 반대했다.
생각해보라. 양당이 언제 공식적으로 대화를 진행한 적이 있었던가? 지금의 문제는 단순히 국민당과 민진당 중 누구의 잘못이 크냐를 따질 사안이 아니다.(아, 물론 국민당의 잘못이 더 큰 것 같기는 하다.) 대만 정치는 기본적으로 정치적 대화와 타협의 전통이 부재하다. 결국 양측 모두 국가의 미래를 고려하기보다는 눈앞의 이익과 정권 획득에만 집중하며, 반대를 위한 반대가 반복되는 구조적 문제가 핵심이라고 본다.
사진 8. 입법위원 사무실에서 내려다본 입법원 앞 시위현장.
[질문 3] 한국 대통령은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현재 한국도 여소야대 상황이지만, 야당이 법안을 마음대로 통과시켜 국정을 좌지우지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통령이 지속적으로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만 총통에게는 이러한 권한이 없는가? 국민당의 법안 통과를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변 3]
보좌관2:
대만 총통도 입법원에서 통과된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하지만 대만 총통의 거부권은 법안에 중대한 문제나 명백한 오류가 있을 때만 가능하며, 단순히 정치적 이유로는 행사되지 않는다. 만약 총통이 계속해서 법안을 거부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행정원장(한국의 총리 격)이 정치적 책임을 지고 사임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대만에서는 거부권 행사가 매우 신중하게 이루어진다. 이는 정치적 혼란을 최소화하려는 경향 때문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총통이 국민당의 법안 통과를 완전히 막아내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질문 4] 며칠 전 한국에서는 대만 시민들이 K-pop 응원봉을 들고 시위에 참여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일부 사람들은 한국의 계엄 및 시위와 현재 대만에서 벌어지는 시위를 연관짓기도 하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변 4]
보좌관1:
응원봉 사용이 K-pop 팬덤 문화와 이번 한국 시위 방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대만에는 K-pop을 좋아하는 청년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시위가 이번 대만의 시위 발생 자체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번 시위는 올해 5월에 일어난 ‘파랑새 운동’의 연장선에 있다. 파랑새 운동은 국민당과 민중당의 법안 강행에 반발하며 시작된 움직임으로, 대만 내부의 정치적 맥락과 시민들의 반발이 축적된 결과다.
사진 9. K-pop 응원봉을 들고 대만 시위에 참가한 대만 시민들
김명준 _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동아연구소 박사과정
*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중국학술원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 이 글에서 사용한 표는 필자가 작성하여 제공함.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https://www.ftnn.com.tw/news/356724
사진 2. https://ynews.page.link/4UzhB(좌)
사진 3. https://www.cna.com.tw/news/aipl/202412210203.aspx(우)
사진 4. 필자 촬영
사진 5. 필자 촬영
사진 6. 필자 촬영
사진 7. 필자 촬영
사진 8. 필자 촬영
사진 9. https://www.yna.co.kr/view/AKR2024122102965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