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지난 9월 28일 중국 쓰촨성 청두에서는 제35회 은하상(Galaxy Award) 수상식이 열렸다. 중국의 권위 있는 SF(공상과학소설) 잡지 『과환세계(科幻世界)』가 주관하는 은하상은 올해 옌시(嚴曦)의 『신을 만들어낸 시대(造神年代)』, 장포(江波)의 『사이버 도원기(賽博桃源記)』
등 최우수 장편•중편•단편소설과 최우수 신인상을 비롯한 16개 부문의 수상작을 발표했고, 작년에는 한국의 김초엽 작가가 최우수
외국작가상을 수상한 바 있다. 류츠신(劉慈欣)의 장편소설 『삼체(三體)』가 ‘SF계의 노벨상’으로 알려진 휴고상(Hugo Award)을 수상하면서 한국에서는 중국의 과환소설(科幻小說), 즉 SF에 주목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으며, 최근 한국 SF 작가들의 약진에 힘입어 오랫동안 변방의 장르문학에
머물렀던 SF가 차츰 그 저변을 넓히고 있다. 이 글은 한국과
중국 등 동아시아에서 SF 장르의 기원을 간략히 짚어보고, 『철세계(鐵世界)』의 번역과 수용 과정을 통해 근대 시기 번역과 중역(重譯), 번안(飜案) 등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 서구의 초창기 SF가 ‘과학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는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과학’과 ‘소설’이 만나 동아시아에 전해지기까지
한국에서는 ‘공상과학소설’, 중국에서는 ‘과환소설’로 주로 일컫는 ‘Science
Fiction(SF)’은 산업혁명과 근대과학의 발전으로 인류문명이 급속히 변화하던 시기에 태동하였다.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에서 이 장르는 근대 초기 외국 문학의 번역과 수용으로부터 시작된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동아시아 국가들은 근대화로 표상되는
서양의 과학기술을 계몽의 도구로 쓰기 위해 전략적으로 과학문명, 혹은 그것이 가져올 유토피아를 그린 소설들을 도입했다. SF라는
문학 장르가 성립하기 전 창작된 이 작품들은 번역 과정에서 종종 ‘과학소설‘이라는 표제어가 붙여지곤
했는데, 이 명칭은 당시 소설의 분류 기준 중 하나이기도 했다. 중국은 1970년대 말부터 자국 ‘과환소설‘의 기원을 본격적으로 연구했고, 그 과정에서 청(淸) 말기의
초창기 과환문학을 가리키는 ‘만청과환(晩淸科幻)’이라는 개념도 ‘발명‘되었다. 중국어로
번역된 최초의 ‘과환소설‘은 에드워드 벨라미(Edward
Bellamy)의 『뒤돌아보며(Looking Backward, 2000-1887)』로, 1891년 선교사 티모시 리처드(Timothy Richard, 중문명 李提摩太)가 차이얼캉(蔡爾康)과 함께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회두간기략(回頭看記略)』이란 제목으로 1891-1892년에 걸쳐 상하이 『만국공보(萬國公報)』에 연재된 이 작품에 이어,
1900년 여류시인 쉐샤오후이(薛紹徽)는 남편
천서우펑(陳壽彭)의 도움을 받아 쥘 베른(Jules Verne)의 『80일간의 세계일주(Le Tour du monde en
quatre-vingts jours)』를 『팔십일환유기(八十日環遊記)』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였다. 이로부터 쥘 베른의 여러 작품이 잇따라
번역되어 중국 독자들과 만나는데, 청나라 말기의 대표적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는 뤄푸(羅普)와 함께 『십오 소년 표류기(Deux ans de vacances)』를
번역 및 출판한 데 이어(중국어본 제목은 『십오소호걸(十五小豪傑)』) 『해저 2만 리(Vingt Mille Lieues sous les mers)』를 일본 메이지 시대 번역가이자 기자•평론가였던
모리타 시켄(森田思軒)의 일본어 번역본을 바탕으로 중역(重譯)하여 1902년 자신이
창간한 잡지 『신소설(新小說)』에 연재했다. 『해저 2만 리』는 또한 한국에 최초로 소개된 과학소설이며, 1907년
일본 유학생들이 발간한 잡지 『태극학보(太極學報)』에 이
작품을 번안(飜案)한 『해저여행 기담(海底旅行奇譚)』이 연재되었다. ‘계몽의
이기(啓蒙利器)’로서 소설의 사회적 효능을 강조하며 ‘소설계혁명(小說界革命)’을
제창한 량치차오는 서구 초기 ‘과학소설’의 번역과 함께, 당시로부터 60년 후 부강한 국가로 거듭난 중국의 미래상을 그린
『신중국미래기(新中國未來記)』를 직접 쓰기도 했다. 근대 중국의 대문호 루쉰(魯迅)도
일본 유학 중에 쥘 베른의 『지구에서 달까지(De la Terre à la Lune)』와 『지구 속
여행(Voyage au centre de la Terre)』을 각각 번역하면서, 『지구에서 달까지』의 번역본 『월계여행(月界旅行)』의 머리말에서 ‘과학소설’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전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언급한 바 있다. 이 시기 과학과 소설의 만남은 한 시대를
풍미하는 큰 흐름이었고, 지식인들은 소설이라는 문학의 형식을 통해 근대과학의 지식을 전달하여 민중을
계몽하고자 했다. 과학과 모험을 다룬 여러 편의 소설을 집필하면서 그 안에 백과사전적인 정보와 지식을
담고, 대담한 상상력으로 시대에 앞선 여러 발명품을 묘사했던 19세기
‘SF의 선구자’ 쥘 베른의 작품은 동아시아의 역사적 상황과
독자들의 요구에 부합했다고 볼 수 있으며, 당시 일본과 중국 및 한국에서는 그의 여러 작품이 번역되어
독자들에게 과학에 대한 호기심과 희망,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2. 번역과 중역(重譯)을
거쳐 탄생한 과학소설 『철세계(鐵世界)』
한편 상술한 번역과 중역의 과정에서 서구 과학소설이 처음 동아시아에 유입되었을 때의 복잡하고도 다채로운 번역의 경로와 양상을 관찰할 수
있는데, 예컨대 량치차오가 참조한 모리타 시켄의 『해저 2만
리』 일본어 번역본은 프랑스어 원전의 영역본(英譯本)을 바탕으로
번역된 것이었다.
광서(光緖) 29년인 1903년, 중국 근대시기 저명한 언론인 겸 소설가, 번역가였던 바오톈샤오(包天笑)가
상하이 문명서국(文明書局)에서 발행한 ‘과학소설’ 『철세계』는 ‘프랑스어
원작→영역본→일역본→중문 번역본→한글 번역본’이라는 겹겹의 중역을 거쳐 독자들과 만난 흥미로운 작품이다.
모리타 시켄은 쥘 베른이 쓴 『인도 왕비의 유산(Les Cinq Cents millions de la
Bégum, 1879)』의 영역본인 『The Begum’s Fortune(1880)』을 일본어로 의역하여 『鐵世界(1887)』라는 제목을 붙였다. 일역본을 바탕으로 한 중국어 번역본이 바오톈샤오의 『科學小說 鐵世界(1903)』이고, 한국의 대표적인 ‘신소설’ 작가 중 한 명인 이해조(李海朝)는 이를 바탕으로 ‘역술(譯述)’한 『과학소설科學小說 철세계鐵世界』를 1908년 회동서관(滙東書館)에서
출간한다. 중문과 한글 번역본에 둘 다 ‘과학소설’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는 점이 눈에 띄는데, 이는 이해조가 바오톈샤오의 중국어 판본을 번역의 저본으로 삼았다고
유추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원작의 줄거리는 인도 왕비의 막대한 유산이 인격자인 프랑스 의사 사라쟁(Sarrasin) 박사와 공격적인 독일인 화학 교수 슐츠(Schultze)에게
나누어 상속된 뒤 두 사람이 미국에 각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며 대립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사라쟁이
세운 프랑스빌(France-Ville)은 평화롭고 행복한 이상적 공동체로 묘사되는데, 슐츠는 자신이 건설한 강철 도시 슈탈슈타트(Stahlstadt)에서
강력한 무기를 생산하여 사라쟁의 유토피아를 파괴하려 하다 자멸한다. 보불전쟁(1870-1871)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후 발표된 이 소설은 당시 고양되던 프랑스의 내셔널리즘과 연관되어 있다. 모리타
시켄은 영역본을 일본어로 ‘역술’하는 과정에서 총 20장의 원작을 15장으로 축소하고,
등장인물들 간의 가족관계나 애정고사를 제거하거나 단순화하여 프랑스와 독일의 민족적 대립에 초점을 맞춘다. 바오톈샤오가 중국어 번역
과정에서 표제에 ‘과학소설’을 덧붙인 것 외에는 일역본 원문을 비교적 충실하게 옮긴 것으로
보인다. 중국어 번역본의 첫머리 「역여췌언(譯餘贅言)」에서 그는 일역본 원문을 충실히 번역했다고(“然竊謂於原意不走一絲”) 언급한다. 하지만 각 장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일역본의 내용을 따랐지만 장절(章節)의 제목이나 세부적인 묘사에서 약간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다. 이해조는
바오톈샤오의 중문 번역본을 한글로 번역하면서 ‘과학소설’이라는
표제와 15장의 구성을 동일하게 옮겼고, 각 장의 제목도
의미를 그대로 살려 번역하였다. 전반적인 내용 또한 바오톈샤오의 번역본과 동일하지만, 세부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군데군데 축약과 생략된 부분들이 눈에 띈다. 이 시기 번역의 또 한 가지 특징은 과감한 내용의
축약이나 개작 등 번역자의 의역이 비교적 자유롭게 이루어졌다는 점인데, 이는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과
한국에서도 동일한 현상이었음을 관찰할 수 있다. 당시의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원작을 충실히 옮기는 것보다
소설 번역을 통해 과학계몽과 부국강병의 목표를 실현하고자 하는 목표에 더 주력했다. 모리타 시켄, 바오톈샤오와 이해조(李海朝)를
통해 동아시아 독자들에게 읽힌 ‘과학소설’ 『철세계』 번역의 목적의식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사진 1-3. 왼쪽부터 紅芍園主人(모리타 시켄)의
일역본(1887)•바오톈샤오의 중국어 번역본(1903)•이해조의
한글 번역본(1908) 『철세계』 표지
사진 4-6. 왼쪽부터 메이지 20년(1887년) 모리타 시켄(본명인 모리타 분조 森田文藏로 표기)의 일역본•광서 29년(1903년) 바오톈샤오(번역자 吳門天笑生으로 표기)의 중국어 번역본•융희 2년(1908년)
이해조의 한글 번역본 『철세계』 서지사항을 표기한 페이지
3. ‘장수촌(長壽村) 대
연철촌(鍊鐵村)’의 대립과 근대과학에 대한 양가적인 시선
상술한 대로 원작을 ‘역술’한 『과학소설 철세계』의 내용은 비록 번역자의 축약과 생략, 인명과 지명의 변경을
거쳤지만 큰 줄거리의 흐름은 동일하다. 위생학을 연구한 의학사(醫學士) 좌선(佐善)과 대학교수인
화학사(化學士) 인비(忍毗)는 막대한 유산을 똑같이 나누어 상속받고, 각각 ‘장수촌(長壽村)’과 ‘연철촌(鍊鐵村)’을 건설한다. 좌선이 건설한 장수촌은 인류가 축적한 그간의 과학지식을 모든 인류의 건강과 수명 연장을 위해 최대한 활용하여
지은 도시이다. 특히 장수촌은 설계와 건설 단계에서부터 ‘위생’을 대단히 중시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인비는 “세계 제일의 강철제조가(世界第一之鋼鐵大製造家)”로, 그는 철광석 탄광이 있는 자리에 연철촌을 건설하여 강철과 무기를
제조한다. 이 거대한 공장과도 같은 도시에서, 인비는 고순도의
강철을 제련하고 이것으로 강력한 파괴력과 살상력을 지닌 첨단무기를 대량생산하는 데 자신의 과학지식을 집중한다. 장수촌과
연철촌은 인류가 발전시킨 과학기술과 발명이 어느 곳에 쓰이는가에 따라 나타날 수 있는 양극단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공간이다. 이 두 도시는 각각 당시의 가장 수준 높은 과학발명과 기술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만들어진 공간으로 묘사되고 있다. 바오톈샤오와 이해조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과 문명의 이기들을 전시하며, 과학계몽이 성취할 수 있는 인류의 진보와, 과학기술을 통해 손에
넣을 수 있는 강력한 힘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이는 자국의 독자대중에게 과학계몽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한편, 이러한 과학계몽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룩하고자 하는 구국의 열망과도 연관되어 있었다. 장수촌과 연철촌에 대한 서술 속에서 ‘과학발명’의 가능성과 역량은
장수촌이 근대적인 위생관념과 의학기술을 통해 인류의 불로장생과 무병장수를 추구하는 장면, 통신기술의
발전을 통해 공동체의 소통과 의사결정을 원활하고 신속하며 민주적으로 추진하는 장면, 연철촌이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과학기술을 동원하여 강철과 신무기를 제조하는 장면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좌선의 의학과
인비의 화학 모두 근대과학의 발전 과정에서 비약적인 성취를 이룬 분야로, ‘위생’과 ‘강철’은 각각 인간의
생명과 그 생명의 파괴와 직결되는 과학문명의 역량을 표상한다고 볼 수 있다.
근대 초 동아시아에서 과학소설은 신문물의 신기한 모습을 전시하여 독자의 호기심과 과학에 대한 관심을 자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국의 부국강병과 민족의 주체성 확립을 도모하려는 목적에서 번역되었다. 『과학소설
철세계』 속 ‘과학’은 이상사회의 건설을 가능하게 하는 마법
같은 수단이면서도 가공할 신무기로 전쟁과 무차별적 살상을 초래할 수 있는 공포스러운 도구라는 양극단의 이미지를 모두 지니고 있다. 번역된 『철세계』 텍스트에서 우리는 과학계몽에 대한 동경과 부국강병을 성취하여 패권국가로 거듭나고자 하는 욕망, 이상향에 대한 추구, 인종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경계와 비판 등
‘과학’을 바라보는 양가적인 시각과 감정을 읽어낼 수 있다. 중국과 한국에서 『철세계』가 번역된 20세기 초, ‘과학’의 관념은 아직 확실하게 정립되지 않은, 여러 개념들의 스펙트럼과도 같았다. 원작에 이미 내재되어 있던, 서로 모순되거나 대립하는 가치와 욕망은 번역과 번안, 역술을 거치며
더욱 선명해지고, 더욱 어지럽게 교차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김빛나리 _ 중국 쓰촨대학교 문학박사
*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중국학술원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 이 글은 필자의
박사학위논문 『中韓早期“科學小說”譯介與“科學”觀念的引入-以『鐵世界』•『新飛艇』等爲中心』의 내용 중 일부를 간추린 것이며, 위 글에서는 주로 아래의 문헌을 참고하였음을 밝혀둔다.
** 참고자료
1) 森田思軒(森田文藏) 譯述(1887), 『鐵世界』, 東京: 集成社.
2)包天笑(吳門天笑生) 譯(1903), 『科學小說 鐵世界』, 上海: 文明書局.
3) 이해조 譯述(1908), 『과학소셜 텰셰계』, 皇城: 滙東書館.
4)賈立元(2021), 『現代與未知: 晩淸科幻小說硏究』,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5) 董仁威 編(2017), 『中國百年科幻史話』, 北京: 淸華大學出版社.
6) 郭延禮(1998), 『中國近代飜譯文學槪論』, 武漢: 湖北敎育出版社.
7) 쩌우전환 著, 한성구 譯(2021), 『번역과 중국의
근대』, 파주: 궁리.
8) 대중문학연구회 編(2015), 『과학소설이란 무엇인가』, 서울: 국학자료원.
9) 최애순(2023), 『한국 과학소설사』, 서울: 소명출판.
10) 김교봉(2000), 「『철세계』의 과학소설적 성격」, 『대중서사연구』제5집.
11) 서유진(2018), 「근대의 야만」, 『한중인문학포럼 발표논문집』.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4. 森田思軒(森田文藏) 譯述(1887), 『鐵世界』, 東京: 集成社.
사진 2, 5. 包天笑(吳門天笑生) 譯(1903), 『科學小說 鐵世界』, 上海: 文明書局.
사진 3, 6. 이해조 譯述(1908), 『과학소셜 텰셰계』, 皇城: 滙東書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