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ISSN 2508-2884 (Online)

관행 톡톡
7월호
조지 쿠퍼 파디 라우(George Cooper Pardee Lowe)와 1930년대 중국계 미국인 2세대 _ 정은주
프린트 복사 페이스북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이름을 따라 이름지워진 조지 쿠퍼 파디 라우는 1904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출생한 중국계 미국인 2세이다. 중국계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장편 저작을 출판한 이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자서전, 아버지와 영광스러운 후손(Father and the Glorious Descendants(1937)에서 저자는 아버지와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당시 중국계 미국인의 삶을 소개했다. 저작은 유머러스한 톤으로 서술하여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는데, 미국의 인종차별을 비판하며 반중 차별의 시기를 대중에게 고발하는 글이기도 했다. 라우는 스탠포드와 하바드에서 수학했는데, 하바드에서 MBA를 취득한 것도 중국계로서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달은 후,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서 국가긴급구호청(State Emergency Relief Administration)과 함께 개별 면담과 생활조건에 대한 1차조사를 진행하며 중국인 커뮤니티의 인구학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특성에 대한 대규모 사회학적 연구를 수행했다.1) 그 내용이 출판되지는 않았으나, 리서치의 일부 케이스 히스토리에 대한 메모가 남아있다(Yung, Chang, and Lai 2006: 165-176). 다음에 정리한 그의 글 속에는 다양한 중국인 2세의 모습 뿐 아니라, 인종적 제약이 많았던 20세기 초 미국 사회에서 잘 교육받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가진 중국계 미국인으로서 저자 자신이 느꼈을 좌절과 내적 혼란도 드러난다. 우리는 그의 리서치에서 드러난 당대 중국계 2세의 상황에서 미국에서 출생한 중국계의 첫 세대로서 연구자 자신과 주변에서 흔히 마주할 수 있는 당대 중국계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1946년 파디 라우의 초상.jpg  라우의 자서전.jpg

          사진 1. 1946년 파디 라우의 초상      사진 2. 라우의 자서전

    

[엘리베이터 보이](1937년 기록)
이것은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중국 이민자 부모밑에서 1904년 출생한 남성에 대한 기록이다. 차이나타운 학교에 다니고 중국어 학교도 다니다 미국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중국어 학교는 포기했다. 캘리포니아의 대학에 입학허가는 받았지만 차이나타운에서 지내면서 운동, 댄스 등 방해 요소가 많아 공부할 시간을 찾기 힘들어결국 대학은 중퇴하고 차이나타운의 중국 정육점에서 트럭 모는 일을 시작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공손하지 못해서”, “중국 전통 예의범절에 따라 수많은 윗사람들에게 아침마다 인사를 하지 않아서잘렸다. 28세에 중국인 갱들과 함께 부둣가에서 감자 분류하는 일을 하며 용돈으로 쓰기 딱 적당한 월 30불을 받았다고 한다. 전의 일자리에서는 숙소와 식사가 포함되었는데 이 때는 식구들 신세를 졌다. 1932년 토목공사과가 생겼을 때 다른 중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바로 합류했는데 토목공사과가 문을 닫자 국가긴급구호청의 실직구호 보조를 받고자 했으나 가족의 수입이 있어 실패했다. 이후에도 옷을 사고 좋은 시간을 보내는 데 쓸 용돈벌이를 위해 도박장 차 운전, 중식당 웨이터, 남자 가정부, 엘리베이터 보이 등 어떤 일이든 뛰어들었으나 미국 사회에서 안정적인 일을 찾을 수 없었고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직업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안정적인 직업 전망이 없어서 결혼을 하지 못했는데, 원하면 가족이 돈을 빌려주겠다고도 했으나 노인네들한테 구애되지 않고 독립적으로살고 싶어 거절했다고 한다.
    
중국으로 돌아가는 2세들이 있었는데, 취업을 위해서 혹은 애국적인 목적으로 간 2세들은 교육수준이 높았다. 중국은 엘리베이터 보이와 같은 젊은이들을 위한 자리가 아니었고 그도 그걸 알고 있었고 원하지도 않았다. 그의 옷차림, , 은어, 생각, 스포츠, 오락, 읽을거리 등에서 미국식 삶의 방식을 전적으로 좋아하고 중국문화를 부끄러워하며 어떻게든 미국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 드러났다. 그의 유일한 삶의 터전은 좋으나 싫으나 차이나타운이었다.
    
[특별객차 여승무원](1936년 기록)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출생했으며 1936년 나이 28세의 고졸 여성이다. 중국 학교교육은 받지 않았지만 중국어는 유창하다. 남태평양 육로한정철도열차(Overland Limited railroad train of the South Pacific)의 여승무원으로 일하는데, 중국적 분위기를 우려내려고 회사가 요구하는 중국식 자켓과 바지 복장을 하고 근무해야 하는 걸 싫어했다. 월 총수입은 달마다 약간 차이가 있지만 150불 정도로 주 고객이 교양있는 전문직 미국인 집단이고 업무가 많지 않아서 일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종종 미국 책이나 잡지를 읽고 있으면 영어도 읽을 줄 아냐 하고 영어가 유창하다고 놀라워하는 세일즈맨 가족들은 불편하다고 했다.
   
물리학을 전공하는 미국 출생 중국인 학생과 약혼 중인데, 그가 학위를 받으면 광둥으로 돌아가 살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녀를 포함한 많은 2세들은 미국에서 나서 대학을 졸업한 중국인들이 살만한 유일한 장소는 중국이라 생각한다. 적응이 괴로울 거라는 걸 각오하지만, 돌아가서 성공한 이들이 많기에 그녀와 약혼자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중국에서는 우리가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길거리 거닐면서 뚫어지게 보는 걸 느끼지 않아도 되고 여기서는 느끼지 못한 소속감 같은 게 있을 거라 생각해요.”
    

월 약 150불의 수입에도 불구하고, 매달 돈이 쪼들린다고 한다. 쉽게 번 거라 쉽게 나간다고. 미국 내 도시들을 여행할 때마다 모든 상점을 돌며 자신과 친구들 선물을 사곤 한다. 그녀는 자신의 중국인 배경을 강조하지만, 체질적인 인종적 특질 외의 외양은 그저 다른 미국 여성과 다를 바 없다. 부유한 계층의 여성들만 상대하다 보니 그들이 사는 걸 사고 그 스타일을 따라 해서 미국 옷은 너무 스타일리쉬하다는 점에서 좀 이상해 보였다. 돈과 여행의 잇점을 가졌다는 것으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자기 민족의 젊은이들을 깔보는 듯한 태도를 보였고, 흑인들이 당하는 인종적 곤경에는 안되었다고 느끼면서도 그들에 대해 백인 여성의 것과 같은 혐오를 드러냈다. 대화의 톤으로 봐서는 가능하다면 기꺼이 미국에 남아서 미국인으로 살 거 같다. 전형적인 미국 출생 중국계 여성의 모습이다.


다음 [총영사의 만찬] 리포트는 샌프란시스코 중국 총영사가 영사관과 중국인 공동체 간의 관계 개선을 위해, 그리고 차이나타운의 구세대, 신세대 간의 협력을 도모하기 위해 2세대 중국계 미국인 중 전문가 집단의 가족을 초대한 정찬에 대한 보고로 시작한다. 라우는 정찬에 대한 간략한 묘사 후 그 곳에 초대된 2세대의 삶에 대해 서술했다.


[총영사의 만찬](연도 미상)

만찬에 참석한 집단의 일반적인 특성은 다음과 같다: 4분의 1은 차이나타운 밖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사실 직업이나 사회봉사 측면에서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은 차이나타운 출신이 아니지만, 생업을 위해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으로 찾아온 이들이다. 남자나 여자나 모두 중산층 자본계급이고, 거의 예외없이 일찍부터 기독교 선교사회 및 선교사회 학교와 접촉이 있었던 가난한 가정에서 성공한 이들이다. 부모들은 영어와 미국의 관습을 익혀서 사업에서 앞서갈 수 있었고 아이들은 미국인의 교육과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이들의 생계는 차이나타운이나 중국인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들은 하이픈으로 이어진 중국계 미국인 삶의 기준에 맞춰 살아서, 수입이 충분한 경우에는, 집을 사고 형제자매를 대학에 보내고 결혼시키는 등 부모와 형제를 부양할 것이 기대되었다. 경기가 좋을 때는 자가를 소유하거나 화려하게 가구가 갖춰진 아파트에서 살았고 값비싼 자동차를 몰았으며, 취미삼아 주식을 하고 비싼 휴가를 즐기고 미국 친구와 중국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하곤 했다. 대공황에도 불구하고 이 집단은 빚을 질지언정 옛 삶의 기준을 여전히 유지했다.

 

중국의 방식대로 딸들에게 고등학교 이상의 교육이 필요없다고 믿었던 것이 이어져서 대부분 남성은 자신과 동등한 교육 수준을 지니지 않은 여성과 결혼했다. 교육받지 못한 중국인 남성 중 대학 나온 여성에게 감히 결혼하자고 할 사람이 거의 없고 대졸 중국인은 극히 제한되었기 때문에 대학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결혼이 어려웠다. 백명 남짓의 이 작은 젊은이 집단에서 국제결혼을 한 이는 4명 뿐이었고 모두 캘리포니아 출신이 아니었다. 모두가 결혼한 지는 좀 되었지만 전체 50쌍 중 15쌍만이 아이가 있었다. 아이를 6~7명씩 키우던 부모 세대보다 양육이 힘들진 않았지만, 아이에게 최고만을 주려 해서 돈이 많이 들었다. 식사는 주로 미국식이다. 아침과 점심은 항상 미국식으로 대부분 차이나타운 내 식당에서 주문하고, 저녁은 주로 중국식으로 역시 종종 차이나타운의 중국식당에서 주문한다. 주문이 쉽고 가격이 경제적이라 주부들이 계속 이런 관행을 유지한다. 낮이든 밤이든 언제든 배가 고플 때 전화 한 통이면 15분 이내에 중국 음식이든 미국 음식이든 모두 따뜻한 요리가 배달된다. 의복은 부부가 감당할 수 있는 가장 비싼 것으로 입는다. 여성의 경우 부유함을 표시하는 외적 상징인 미국식 의복을 구매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스타일을 갖추는 것이 지역 내 개인의 지위 표시에 중요하다. 남성들 사이에서는 옷에 대한 경쟁이 그만큼 강조되지는 않지만 아무렇게나 하고 다니지는 않는다. 외양을 깔끔하게 하고 패셔너블한 옷을 입어야 한다는 생각은 다른 비중국계 미국인과 다르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갈망에서 비롯된다. 어떤 이의 말처럼, 허름하거나 부적절하게 입어서 주의를 끌지 않아도 이미 미국에서 중국계로 산다는 거 자체가 충분히 나쁜 상황이다. 게다가 아무도 중국에서 갓 도착한 촌뜨기로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집단의 여성들에게 집안일은 그리 중요치 않다. 진공청소기, 카펫 클리너 등 현대적인 청소 장비들이 집안일을 상대적으로 쉽게 만들어준다. 대부분의 식사를 차이나타운 식당에서 주문하니 설거지가 별로 필요치 않고, 빨래는 여성 속옷을 제외하곤 거의 집에서 하지 않는다. 차이나타운의 세탁소가 잘하고 빠르고 싸다.

 

중산층 중국계 미국인 가족의 소비 규모를 감당할 만큼 남편의 수입이 많지 않은 경우, 아내들은 보통 의류 봉제 공장에서 일하거나 상점 계산원 등의 일을 한다. 남편의 수입이 충분한 경우, 바깥일을 하지 않고, 다양한 사교모임을 가진다. 셀 수 없이 많은 마작과 브리지 게임이 있어서 매일 오후나 저녁에 잘사는 차이나타운의 집에 모여 게임을 한다. 특히 마작의 경우 세대 간 구분이 없어서 같은 테이블에서 할머니, 젊은 부인, 심지어 고등학교 졸업도 하지 않은 여학생도 함께 하기도 하며, 차이나타운의 여러 세대 여성들이 함께 모여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마작 테이블은 나이 든 세대가 전통의 지혜를 미국화된 젊은 여성들에게 전하는 학교의 역할도 한다. 브리지는 젊은 세대의 게임으로 주로 젊고 현대적인 여성 그룹들이 정기적으로 차 마시며 기념하는 날에 즐긴다.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 여성들은 중국인들이 후원하는 종교, 교육 조직 활동을 한다. 컨셉이나 활동은 미국의 주니어 리그(여자 청년 연맹: 상류 여성들로 조직된 사회봉사단체)와 비슷하여, 매월 가장 좋은 미국 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정기적으로 집에서 파티를 열어 자선 모임을 가진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직은 성공한 전문직 남성들의 대학 나오지 않은 아내들로 구성되어 속물근성을 드러내고 배타적인 경향이 있다. 남성의 경우, 낚시, 사냥, 골프, 경주와 포커 마작 등이 주요 여가 거리이고 여기에는 항상 좋은 음식이 곁들여진다.

 

종교는 이들의 삶에 크게 자리하지 않는다. 모두 초기 기독교 가족의 성원이고 프로테스탄트 교육을 받았지만 실제로 교회에 다니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러나 아이들은 바르게 행동하는 것, 도덕을 깨우치게 하려는 목적으로 일요 교회학교에 보낸다. 옛 중국의 종교적 미신은 믿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 장례나 결혼 등에서는 따른다. 지배적인 종교적 사고는 개신교와 그 도덕에 기반한다. 2세대 전문직 중국계와 그 아내들은 미국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믿고, 이는 외부인(즉 미국인)들에게 자신들이 누리는 것이 정당함을 보이기 위해 행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자신의 이득을 위해 투표한다. 지난 두 번의 대통령 선거 때 이 집단은 공화당과 민주당으로 고르게 나뉘었다. 부유한 중국인들은 공화주의가 자신들의 지위를 더 잘 유지하게 할 거라 믿은 반면, 잘살지 못하는 이들은 민주당이 이겨서 더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길 바랬다. 이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대립이었다. 공화당이 중국에 우호적이고 민주당은 반중적이라 여겨졌지만 이런 요인은 차이나타운 투표에 그리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투표는 했지만, 이들은 모든 권리를 미 정부로부터 부여받을 거란 큰 희망은 가지지 않았다. 그것은 중국인 이민 규제가 지속되고 현재 거주하는 중국인들이 완전히 미국화되어서 미국인들이 중국계라는 배경을 완전히 이해하고 관용하게 되면 결국 달성될 거라 믿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이들은 차이나타운과 그 거주자의 환경을 개선하려는 차이나타운 조직에 언제나 기꺼이 참여한다. 이들이 듣는 뉴스는 중국어로 된 차이나타운 신문에서 나오지 않는다. 바깥 뉴스는 주로 미국 일간신문을 통해, 중국계 2세에 대해서는 차이니스 다이제스트를 통해 취하고 차이나타운 사람들에 대해서는 가십이나 건너 듣는 말을 통한다. 


【미국의 중국인 10

정은주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1) 1950년대에는 버클리에서 러시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 국무부에 근무하며 1960년대에는 수년간 타이완에 주둔했으며, 국무부와 유네스코 소속으로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가르쳤다.


** 참고자료   

Yung, Judy, Gordon H. Chang, and Him Mark Lai eds. 2006. Chinese American Voices: From the Golden Rush to the Presen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Anita Lowe 제공, Yung, Chang, and Lai 2006: 166

사진 2. ‘Chinese American Eyes: Famous, forgotten, well-known, and obscure visual artists of Chinese descent in the United States’ https://chimericaneyes.blogspot.com/2015/01/pardee-lowes-father-and-glorious.html (검색일: 2023. 6. 20)

프린트 복사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