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1. 귀뚜라미는 게으른 아녀자를 놀라게 한다
가을의 전령사 귀뚜라미의 울음이 잦아들 무렵이면 계절은 어느덧 겨울로 접어든다. “귀뚜라미가 울면 게으른 아녀자가 놀란다(趨織鳴, 懶婦驚)”는 중국 유주(幽州)의 속담은 전통 시기 농촌 아낙네들의 고단한 삶의 모습을 묘사한 은유적 표현이다. 귀뚜라미가 우는 계절이 되면 농촌의 아낙네는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겨울옷을 짓기 위해 신속하게 베를 짜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가을밤의 감성을 자극하는 귀뚜라미 소리가 수확기 농사일을 마치고 잠시 쉬려는 아녀자들에게는 월동 준비를 재촉하는 소리이기도 했다.
중국에서 귀뚜라미는 ‘실솔(蟋蟀)’이라 명칭 이외에도 여러 별칭이 있다. 그 중 귀뚜라미의 우는 소리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중국어로 ‘취취’라고 발음되는 ‘곡곡(蛐蛐)’이 있고 이와 비슷한 발음의 이름으로 ‘촉직(促織: 추즈)’, ‘촉기(促機: 추지)’, ‘추직(趨織: 취즈)’ 등이 있다. 이러한 명칭들은 그 발음이 철거덕 거리며 빠른 속도로 베를 짤 때 나는 소리와도 비슷하며, 베 짜기(織), 베틀(機)의 뜻을 가진 한자를 사용하여 ‘베 짜기를 재촉한다’는 의미까지 나타낸다. 즉 문자화된 의성어로서 중국의 귀뚜라미 명칭은 소리를 넘어 계절감과 고대인의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가을의 감성을 자극하는 귀뚜라미
이처럼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귀뚜라미는 중국 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곤충 가운데 하나이며 이미 『시경에도 등장한다.
오월에 여치가 다리를 부벼 울고, 五月斯螽動股
유월에 베짱이가 깃을 떨어 울어댄다. 六月莎雞振羽
칠월에는 들에 있고, 七月在野
팔월에는 처마 아래에 있다가, 八月在宇
구월에는 문간에 있다. 九月在戶
시월에 귀뚜라미는 내 침상 아래로 든다. 十月蟋蟀入我牀下
……
해가 바뀌게 되었으니, 曰爲改歲
이 집에 들어와 지낼지어다. 入此室處 (「빈풍(豳風)·칠월(七月)」)
귀뚜라미 대청에 있으니, 마침내 한해가 저무네. 蟋蟀在堂, 歲聿其莫.
지금 우리 즐기지 않으면, 세월만 간다네. 今我不樂, 日月其除.
(「당풍(唐風)·실솔(蟋蟀)」)
『시경』의 귀뚜라미 관련 시들은 중국인들이 예로부터 미물인 귀뚜라미를 통해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한 해가 저물어 가는 것을 아쉬워했음을 알려준다. 특히 「빈풍‧칠월」에서는 가을이 점점 깊어가는 시간의 흐름을 들에서부터 인간의 생활 터전으로 점점 다가오는 귀뚜라미의 공간적 이동으로 표현하였는데, 그 어떠한 화려한 수식이나 기교 없이 계절의 변화를 실감케 하는 문학적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늦가을 유난히 크게 느껴졌던 귀뚜라미 소리는 귀뚜라미와 인간 사이의 가까워진 거리와 공생을 의미한다.
이후에도 많은 문인들이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독특한 감상에 젖었다. 당나라 숙종(肅宗) 건원(乾元) 2년(759) 관직에서 물러나 객지를 떠돌던 두보(杜甫)도 귀뚜라미 소리에 슬픔을 느꼈다.
작고 가냘픈 귀뚜라미 促織甚微細
그 구슬픈 소리는 어찌 사람을 울리는가 哀音何動人
풀 섶에서 초조하게 울더니 草根吟不穩
침상 아래에선 정답게 속삭이네 狀下意相親
오랜 나그네 신세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고 久客得無淚
홀로 된 아내는 새벽까지 견디기 어려워라 故妻難及晨
애절한 거문고나 격앙된 피리 소리도 悲絲與急管
네 천진한 소리의 울림에 비기지 못하리 感激異天眞
(두보, 「촉직(促織)」)
두보는 귀뚜라미 소리를 슬프게 듣는다(哀音). 귀뚜라미가 정말로 슬퍼서 내는 소리인지, 영역 침범에 대한 경계의 표시인지, 짝을 찾는 소리인지 사실 알 수가 없다. ‘감정 이입의 오류(Empathy fallacy)’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객지를 떠도는 나그네 두보에게는 객수(客愁)를 일으키는 귀뚜라미 소리가 그저 슬프게 들렸던 것이다. 이처럼 귀뚜라미 소리는 시인의 마음을 울려 쓸쓸함과 고독함, 처량함, 연민과 슬픔 등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3. 귀뚜라미 놀이: 귀뚜라미 소리 듣기와 귀뚜라미 싸움
기록에 의하면, 귀뚜라미를 기르고 싸움을 시키는 놀이는 당나라 때 시작되어 송나라 때 발전하였으며 명청대에 매우 성행했다. 당대 필기인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에 궁중에서 비빈들이 가을이면 귀뚜라미를 잡아 작은 금롱(金籠)에 넣고는 그것을 베개 옆에 두고 밤마다 그 소리를 들었는데 일반 여염집에서도 모두 이를 따라했다는1) 기록이 있다. 가을이 되면 궁중의 수많은 비빈들이 귀뚜라미를 잡아 그 소리를 위안 삼아 외롭고 기나긴 밤을 지냈다는 이야기이다. 궁중에서 귀뚜라미를 잡아서 기른 목적은 귀뚜라미 소리를 음악 삼아 무료한 궁중 생활로 인한 울적한 심사를 풀어내려 한 것이지만 이것이 점차 민간에까지 퍼진 후에는 취미삼아 귀뚜라미 소리를 감상하게 되었던 듯하다.
남송의 고문천(顧文薦)은 귀뚜라미 싸움의 풍조가 당나라 천보(天寶) 연간에 시작되었으며 장안의 부자들이 상아로 귀뚜라미를 넣는 장(籠)을 만들고 거금을 들여 귀뚜라미를 길렀다고2) 기록하고 있다. 즉 당나라 때 비싸고 호화로운 귀뚜라미 장을 마련하여 귀뚜라미를 키우는 문화가 등장했으며, 이러한 문화가 처음에는 궁중 비빈들이나 부유한 집의 자제들 사이에서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귀뚜라미를 훈련시켜 싸움을 시키는 것은 남송 시기에 들어서 점차 확대되어 민간 백성들의 오락 활동이 된 것으로 보인다. 송대 항주(杭州) 사람들 사이에서 귀뚜라미 기르는 취미가 유행하여 매일 아침 저잣거리에서 여러 명이 모여 귀뚜라미 싸움 놀이를 하였고3), 경성(京城)의 한량들은 저잣거리에 ‘봉두(棚頭)’ 노릇을 하며 귀뚜라미 등 곤충을 길러 싸움을 붙이고 도박을 벌였다고 한다4). ‘붕두’는 귀뚜라미 싸움 장소를 제공하고 시합을 주관하며 구경꾼들을 불러 모은 뒤 내기 판돈 중 일부를 가져가던 사람으로,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송대 도시민들이 귀뚜라미 놀이로 도박하는 것을 즐겼음을 알 수 있다.
사진 1. 中國古代風俗圖:鬪蟋蟀 사진 2. 鬪蟋蟀
귀뚜라미 놀이문화는 날로 흥성하여 남송 말기에 이르면 최초의 귀뚜라미 관련 전문서 『촉직경(促織經)』이 나오게 된다. 이 책의 저자인 가사도(賈似道: 1213-1275)는 남송 말의 권신으로 ‘귀뚜라미 재상’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귀뚜라미 놀이에 심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귀뚜라미에 관해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귀뚜라미의 종류, 모양, 색, 습성, 귀뚜라미를 기르는 방법, 싸움을 시키는 방법 등에 관해 자세히 기록하여 이후 비슷한 종류의 귀뚜라미 관련 저서 출판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풍전등화의 남송 말기 이민족의 침략에 방어하는 데 힘쓰지 않고 귀뚜라미에만 열중하다가 자신이 지키던 지역을 적에게 내어주고 후퇴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그의 이름은 좋아하는 취미에 푹 빠져 나라 일을 그르친 역적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명청대는 귀뚜라미 유희의 전성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귀뚜라미는 제왕과 후궁들의 오락 거리 중 하나로 자리 잡았는데, 특히 명 선덕(宣德) 연간 황제 선종(宣宗)은 소주(蘇州) 지부(知府)에게 귀뚜라미를 잡아 진상하라는 조서를 내리고 해마다 이를 실시하였다5). 가사도가 ‘귀뚜라미 재상’이었다면 선종은 ‘귀뚜라미 황제’였던 셈이다. 지배계층의 오락거리는 곧 피지배계층 일반 백성들의 부담으로 작용했고 이로 인한 폐단이 생겨났다. 명말 문인 원굉도(袁宏道)의 「축촉직(蓄促織)」은 귀뚜라미의 습성을 소개한 소품문(小品文)으로, 황제가 지방관에게 칙령을 내리자 어른이고 아이고 “무리 지어 풀밭을 헤매며 귀를 기울이고 왔다 갔다 하는데 얼굴들이 멍하니 마치 넋이 나간 듯 했다(群聚草間, 側耳往來, 面貌兀兀, 若有所失)”고 당시 상황을 꼬집었다. 황제의 놀이를 위해 백성들은 본업을 제쳐두고 귀뚜라미를 잡으러 헤매고 다니느라 가산을 탕진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귀뚜라미를 넣고 기르는 기물들도 점점 정교하고 아름다워졌다. 금이나 은, 대나무로 만든 귀뚜라미 장(籠)에서 점점 도자기로 만든 귀뚜라미 통(盆)으로 발전해 나갔다. 귀뚜라미 장은 귀뚜라미의 소리를 잘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지 귀뚜라미의 습성을 고려한 것이 아니었기에 날씨가 추워지고 건조해지면 귀뚜라미가 그 안에서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다. 원래 귀뚜라미는 어둡고 습한 곳을 좋아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어서 공기가 통하는 장(籠)보다는 젖은 흙을 넣고 어둡게 키울 수 있는 통(盆)이 귀뚜라미를 키우기에 더 적합했다. 도자기 생산으로 유명한 경덕진(景德鎮)에서 ‘대명선덕년제(大明宣德年制)’ 귀뚜라미 통이 대량으로 발굴된 것은 당시 귀뚜라미 싸움 놀이의 풍조가 성행함에 따라 귀뚜라미 용기 산업도 발달했음을 알려준다.
사진 3. 蟋蟀盆 사진 4. 大明宣德年制蟋蟀盆
4. 귀뚜라미로 변한 소년 이야기
청나라 문인 포송령(蒲松齡)의 유명한 소설 『요재지이(聊齋志異)』에도 귀뚜라미 싸움을 제재로 한 「촉직(促織)」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선덕 연간에 궁중에서는 귀뚜라미 놀이를 숭상하여 해마다 민간에게 이를 세금으로 진상하게 하였다(宣德間, 宮中尚促織之戲, 歲征民間).” 그러나 임무를 부여받은 성명(成名)은 귀뚜라미를 구하지 못해 관청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간신히 살아 돌아온다. 그 후 성명은 무당의 계시로 비범해 보이는 귀한 귀뚜라미를 얻는다. 하지만 호기심 많은 성명의 아들이 귀뚜라미 상자를 열어보다가 이를 놓쳐버렸고, 자신으로 인해 집안이 망하게 될 거라고 겁을 먹은 아들은 우물에 몸을 던진다. 사랑하는 아들의 시신을 앞에 두고 슬픔에 빠진 것도 잠시, 성명은 다시 귀뚜라미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의 미세한 숨결이 느껴졌고 어디선가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크기는 작지만 매우 용맹스럽고 날쌘 귀뚜라미가 보였고 성명은 이것을 잡아 바쳐 쓰러지던 집안을 다시 일으키고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진상한 귀뚜라미는 모든 시합에서 이기고 승자가 되었으며, 시합이 다 끝난 후 그 동안 의식을 찾지 못하던 성명의 아들이 깨어나 자신의 혼이 귀뚜라미가 되어 활약했노라고 말했다.
이야기 말미의 “이사씨왈(異史氏曰)”에서 포송령은 자신의 생각을 펼친다.
천자가 우연히 어떤 물건을 사용하고는 그 자신은 한 번 보고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그를 받드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규칙이 될 수 있다. 거기에 탐관오리들의 탐욕까지 더해지면 백성들은 마누라나 자식을 팔아도 그것을 다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렇듯 천자가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는 모두 백성의 목숨과 관련이 되니 절대 소홀히 행해서는 안 된다.6)
「촉직」은 표면적으로는 명대 선종 황제 때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포송령이 생활하던 당시의 사회 상황을 빗대어 이야기한 것이다. 즉 당시 지배계층이 백성들의 생명을 초개처럼 여기는 태도와 세금 징수라는 허울에 가려진 추악한 탐욕의 민낯을 귀뚜라미 싸움 놀이 문화를 둘러싼 이야기를 통해 여실히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5. 중국인의 못 말리는 귀뚜라미 사랑
중국의 귀뚜라미 문화는 이처럼 오랜 역사를 지니고 궁중과 민간 모두에게 사랑받아왔다. 민국시기에는 전문적인 ‘귀뚜라미협회’와 ‘귀뚜라미연구소’가 설립되었고 여러 지역에서 귀뚜라미 싸움을 즐겼다. 귀뚜라미 싸움 마니아들은 싸움을 잘하는 귀뚜라미를 고르고 기르는 방법을 연구하고 전수하였다. 보통 머리와 다리가 크고 촉수가 곧은 귀뚜라미가 싸움을 잘 한다고 한다. 여러 지역의 특산 귀뚜라미가 있지만 특히 산동 대평원 지역 영진현(寧津縣)의 귀뚜라미가 사납고 근성이 있어 싸움을 잘하기로 유명하다. 처음에는 그저 귀뚜라미의 먹이 등을 걸고 즐기던 놀이였던 것이 어느새 큰돈이 왔다 갔다 하는 도박이 되면서 전 재산을 잃고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그래서 1950-60년대에는 마작놀이와 함께 ‘낡은 문화’의 표본으로 지목되어 불법으로 금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관대해진 정부 정책 하에 귀뚜라미를 사랑하는 마니아들의 귀뚜라미 문화 활동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위에서 언급한 산동성 덕주시(德州市) 영진현에서는 2022년 가을 제10회 전국 귀뚜라미 싸움 대회를 성황리에 마쳤으며, 중국 귀뚜라미 문화 박람회도 이미 여러 차례 개최하였다. ‘중화실솔제일현(中華蟋蟀第一縣)’으로서 비물질유산인 귀뚜라미 문화를 계승하고 보호하기 위해 35.2억 위안을 투자하여 영진덕백잡기실솔곡(寧津德白雜技蟋蟀谷)을 건설하고 귀뚜라미 교역 거리, 어린이 놀이동산, 옥 박물관 등을 세워 독특한 인문학적 분위기를 지닌 귀뚜라미 문화 복합단지를 조성하였다. 영진현 주민들은 이러한 계획과 활동이 영진현의 지명도를 높여줄 뿐만 아니라 건전한 귀뚜라미 문화의 계승과 발전에 도움을 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박계화 _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참고문헌
1) “宮中秋興, 妃妾輩皆以小金籠捉蟋蟀, 閉於籠中, 置於枕函畔, 夜聽其聲, 庶民之家亦皆效之.” 王仁裕, 『開元天寶遺事』, 中華書局, 2006, 22쪽.
2) 顧文薦, 『負暄雜錄』:“鬥蛩之戲始於天寶間, 長安富人鏤象牙爲籠, 而畜之萬金之資爲之一 喙.”
3) 西湖老人, 『西湖老人繁勝錄』, 中國商業出版社, 1982, 12-13쪽.
4) 吳自牧, 『夢粱錄·閑人』: “又有專爲棚頭, 鬥黃頭, 養百蟲蟻‧促織兒.”
5) 「皇明詔令」, 「宣德八年(1433)八月初二采辦敕」, 「宣德九年(1434)七月初六采辦敕」
6) “異史氏曰: “天子偶用一物, 未必不過此已忘;而以奉行者即爲定例。加以官貪吏虐, 民日貼婦賣兒, 更無休止。故天子一跬步, 皆關民命, 不可忽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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