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중국공산당 20차 당대회 개최 이후 코로나 대응 정책의 완화는 가장 뜨거운 이슈로 자리를 잡았지만, 도시에서 공영(公營) 식당, 농촌에서 공소사를 부활시키려는 정부의 시책이 곧 전개될 것이라는 소식도 많은 시선을 이끌었다. 만약에 전자가 코로나 방역 정책의 정치화와 경직화가 유발한 일시적 집권 합법성 위기를 극복하려는 중공의 대응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중공의 장기적인 위기의식에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20차 당대회의 보고 내용과 인사 변동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에 따라 이러한 중공의 장기적인 위기의식은 두 가지 시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본다. 한편으로, 이러한 장기적인 위기의식은 중공이 더 이상 공산주의 정당으로서의 초심(初心)을 유지하지 못하고, 중국도 더 이상 사회 공평과 정의를 우선시하는 사회주의 현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위기의식은 미·중 간의 전략적 대립, 감염병의 확산, 우크라이나 전쟁, 기후 변화 등의 다양한 세계적인 위기 속에서 비상대응 체제를 하루빨리 구축해야 한다는 긴박감으로 구현하고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정부가 도시에서 공영 식당, 농촌에서 공소사를 부활시킬 것이라는 소식은 과연 정확한 근거가 있을까? 만약 근거가 있다고 하면 우리는 어떠한 시선으로 이를 바라볼 것인가?
1인 미디어 시대에는 근거가 없는 정보가 쉽고 빠르게 확산될 수 있다. 공영 식당과 공소사 재개의 소식도 역시 중국 국내의 여러 유명한 쇼트 클립(短視頻) SNS 플랫폼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들 쇼트 클립을 제작하고 전파하는 1인 매체 중에서 관변 배경이 있는 매체도 있었다. 따라서 이들 소식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이들 소식의 정보원을 확인해 보면, 대다수는 「중화합작시보(中華合作時報)」가 올해 10월 25일에 게재한 한 기사에 기반한 것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中華合作時報 2022.10.25). 「중화합작시보」는 곧 “중화전국공소합작사총사(中華全國供銷合作社總社)”의 기관지이며, 이들 소식에서 말하는 “공소사”라는 생소한 단어는 곧 공소합작사(供銷合作社)의 줄임말이다. 즉 협동조합 운동(co-op)의 기본원리에 기반하여 농민 조합원에게 농자재 공급 및 일용품을 판매하는 조직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 1. 사회주의 시절 쓰촨성(四川省) 산타이현(三台县)에서 촬영된
한 전형적인 농촌 공소사의 모습.
「중화합작시보」에서 게재된 이 기사는 2015년 후베이성(湖北省)에서 시작하던 “기층 공소사 회복 및 재건 사업(基層社恢複重建工程)”이 올해까지 거둔 성과를 과시한다. “지역적 시범―전국적 보급”이라는 중국 정부 정책 시행의 관례를 감안하면 지역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둔 정책의 시행 범위가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물론 1인 매체들이 이러한 가능성을 사실처럼 과장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이러한 과장은 아마도 일부 유통 영역의 이익관련자들이 향후 일반 시장 유통이 아닌 협동조합 유통 분야에 대한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홍보 수단으로 추측될 수 있다. 기사의 원문을 보면 후베이성의 정책 시범 역시 “단계적 성과”라는 한정적인 수식어를 사용함으로써, 전국 범위의 보급은 시기상조라고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후베이성의 공소사의 회복 및 재건 시범 사업이 지니는 중요한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2015년이라는 시점에 공소사를 다시 만들자고 하는 정책 시범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고, 이것은 우리가 앞서 언급한 중공의 위기의식을 엿볼 수 있는 “창(窓)”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중국의 공소사는 도대체 무엇인가? 공소사는 왜 사라졌으며, 왜 또 부활이 시도되고 있을까?
2000년대 이후 태어난 중국 젊은이들에게 공소사라는 단어는 금시초문일 수도 있다. 1990년대 초반에 출생한 필자의 경우, 이미 많이 흐려져 가는 어린 시절의 추억에서만 이 단어가 등장한다. 과거 삼선건설(三線建設) 시기 설립된 국영기업들이 밀집된 도시에 살아왔기 때문에, 어렸을 때 필자는 아직 퇴조하지 않았던 사회주의식의 생활방식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시장화 개혁 이후 개인 소상공인들이 운영하는 가게들이 많이 생겨났지만, 국영상점(國營商店), 국영기업 노동자들이 공동 운영하던 복리사(福利社), 그리고 도시 근교 농민들이 공동 경영하는 공소사도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들 유통 업체 가운데 필자가 공소사를 이용한 경험은 매우 적은 편이었다. 한편으로 아무리 근교라고 해도 도보 30분 정도를 소요하며, 다른 한편으로 공소사에서 판매된 상품, 특히 식료품들은 대다수가 당시 향진기업(鄉鎮企業, TVEs)의 제품이라서, 어른들은 이들 식료품의 안전성에 대해 항상 회의적이었으며 이용을 자제하곤 하였다. 1990년대 말엽 어느 해, 어머니가 일하고 있었던 국영공장으로부터 명절 선물인 월병(月餅)을 배급 받았는데, 모두 유통기한이 임박하고 맛도 별로 없어 결국 버리게 되고 말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명절 선물을 준비한 공장 간부가 농촌 공소사에서 판매된 저가 월병을 구입하였다고 했다. 이 사건 이후 공소사는 점점 필자 가족의 일상에서 사라졌다.
상술한 필자 기억 속의 공소사는 주로 상품 판매 기능에 집중되었다. 판매에 있어서 공소사 운영방식은 국영상점 등 사회주의 시기의 국영 유통업과 사실상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공소사는 상급 부처의 지시 및 계획에 따라 직원을 고용하고, 이미 정한 공급처로부터 물자를 조달하고 판매하는 계획경제식의 관료화된 조직이며, 협동조합 정신과 전혀 맞지 않는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공소사의 직원들도 준(準)공무원 신분을 갖추고 일반 개인업체의 직원보다 친절하지 않았고, 판매하던 상품의 종류와 품질도 민간 유통업체보다 못하는 편이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 농촌 향진기업의 성장과 함께 기층 공소사들은 향진기업 제품의 유통 기능을 담당함으로써 상대적인 안정세를 유지해 왔지만, 1990년 후반 향진기업의 쇠락과 민영화에 따라 공소사도 더 이상 정상적인 경영을 유지하지 못하였다.
사진 2.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한 공소사에서 TV와 녹음기 등의 가전제품을 판매했던 장면.
결국, 1999년 중국 국무원은 시장화·민영화에 지향하는 공소사 개혁 조치를 시행하였다. 이 개혁 조치에 따라 수익성이 떨어진 농촌지역의 대다수 기층 공소사는 철폐·병합되었고, 농민 조합원의 출자금 정산이 이루어졌으며, 공소사의 직원들도 당시 수많은 국영기업의 노동자와 똑같이 실업(“下崗”)하였다(國務院 1999). 그에 따라 2000년대의 농촌지역에서는 유통·판매 기능을 수행하는 공소사가 사라졌고, 현(縣)급 행정단위에서 일부 중요 경제작물 수매와 농업기술지도와 역할만 담당하는 현급공소연합사(縣級供銷聯合社)만 존재하게 되었다.
사실상 시장화·민영화 개혁 이전에는 공소사의 관료화 및 계획경제식의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 공소사를 제대로 된 농민 생산·소비 협동조합으로 개조하려는 정부의 계획이 있었다. 1995년 중공과 중국정부가 공동 발표했던「공소합작사 개혁의 심화에 관한 결정(關於深化供銷合作社改革的決定)」이라는 정책 문건은 곧 공소사를 유통조직이 아닌 농민이 소유하고 농민이 참여하고 이득이 농민에 의해 공유된 농민 협동조합으로 개조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中共中央, 國務院 1995). 하지만 이러한 협동조합 정신이 결국 실현되지 못했고, 전국 범위 기층 공소사의 경영 상황 악화로 인해 시장화·민영화 개혁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소사의 합동조합화 개혁 실패 이후에도 농촌에서 협동조합의 필요성은 계속 거론되어왔다. 당시 도시 자본의 농업·농촌 진출이 이미 시작된 상황에서 협동조합을 통해 농민을 조직화하여 자본과의 협상권을 갖출 수 있는 한편, 농촌 외부자로서의 자본 역시 농민합작조직을 통해 거래비용을 축소할 수 있다는 효과가 있다고 인식되었다. 결국, 2000년대 후반 “전업농 합작사(農民專業合作社)” 설립이 합법화되었고, 일부 지역에서 같은 “합작사” 계열의 조직이라는 이유로 현·시·성급의 공소연합사를 전업농 합작사의 주관 부처로 개편하였다.
사실 사단조직으로서의 공소사는 정부 부처처럼 전업농 합작사를 관리할 자격이 없다. 하지만 전업농 합작사의 발전 과정에서 합작사의 기업화, 심지어 합작서 설립을 통해 촌락의 기업화 등 농업·농촌의 과도한 자본화 문제(졸고 2022, 제5장 참조)가 생겨났는데, 기존의 농업생산을 주관하는 농업 부처나 농식품 유통을 주관하는 상공업 부처는 이를 제대로 대응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2015년 공소사 회복 시범은 곧 농업·농촌 분야의 과도한 자본화 예방 및 전업농 합작사 관리의 규범화라는 취지로부터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2015년 3월 중공과 중국 국무원이 연합 발표한 「공소합작사 종합 개혁의 심화에 관한 결정(關於深化供銷合作社綜合改革的決定)」이라는 정책 문건에서 공소합작사를 “장기적으로 농촌에 뿌리를 두고, 농민과 친근하고, 상대적으로 조직화되고, 경영 네트워크가 상대적으로 건전한 조직으로써, 농업·농촌·농민에 대한 서비스 제공에 있어 당과 국가가 의지할 수 있고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조직이 될 수 있다”라고 평가하였다(中共中央, 國務院 2015).
이 문건에서 공소사 회복에 대한 세부적인 요구를 보면 주로 농업생산 서비스, 유통 서비스, 농촌 금융 서비스 등 구체적인 농업·농촌 분야의 서비스 제공이 강조되었지만, 이들 서비스 제공은 기존 전업농 합작사 발전의 기대효과였다. 다시 말하면, 중국 정부가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전업농 합작사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직접 통제가 가능한 관변 사단조직으로서의 공소사로 기존 전업농 합작사가 맡았던 역할을 대체하고자 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집체소유제(集體所有制) 경제조직으로서의 공소사에게 과도한 자본화의 방화벽 기능과 농업·농촌의 공공성 보장 기능도 추가되었다.
후베이성 공소사 회복 실험이 단계적인 성공이라고 자화자찬할 수 있지만, 과도한 자본화 억제 및 공공성 보장이라는 시진핑 정권이 강조하는 “초심”은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아직 평가하기가 어렵다. 사회주의 시절에 공소사가 굳게 관료화된 고정적인 이미지, 그리고 면화, 녹차 등 특종 경제작물에 대한 강제수매 역할을 담당했던 공소사의 과거사(程宏毅 遲孝先 編 2009: 23-24) 때문에 공소사에 대한 추억도 그리 화려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부활한 공소사가 과연 수많은 농민 합작사를 통제·관리할 수 있는 슈퍼합작사가 될 수 있을까?
다른 한편으로는, 공소사의 역사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공소사의 이면에 잠재한 다른 한 가지 유전자를 확인할 수 있다. 즉 공소사와 경제적 봉쇄 및 물자 결핍 상태와의 연관성이라는 점이다. 중공이 주도한 공소합작사 실천의 기점은 항상 5·4운동 시기 좌익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베이징대학(北京大學)의 소비합작사와 공독호조단(工讀互助團)으로 인식되었지만(遲孝先 1988: 8; 이원준 2021), 사실상 현재 관변 사단조직으로서의 공소사는 제1차 국공내전 시기(1927~1937) 중공이 점령한 근거지(根據地)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중공의 근거지는 적의 경제봉쇄를 당하면서 생필품, 의약용품, 공구류 등은 극히 결핍한 상태에 처하였다. 중공이 직접 주도한 공소사는 농민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수매하여 근거지 외부 상인과의 거래를 통해 필수품을 밀수입하며 근거지의 기초 생활수요를 충족시켰다. 이러한 공소사의 조직과 결성은 중공의 정치 동원이었지만, 중요한 경제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근거지 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 및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1937년 항일 통일전선이 형성된 이후, 공산당 항일 근거지에 대한 경제봉쇄가 완화해졌고 자유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공소사의 중요성도 떨어졌다. 당시 섬감녕변구(陝甘寧邊區) 근거지의 기록을 보면, 항일전쟁 시기의 공소사의 양적인 규모가 여전히 컸지만, 이러한 양적인 측면의 유지는 농민을 강제 입사·출자시킨 결과뿐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陝甘寧邊區政府建設廳工合辦事處 1949: 998-999).
이러한 경제봉쇄와 물자 결핍에 수반한 공소사의 유전자는 1949년 이후에도 일관되었다. 국제적인 경제봉쇄, 그리고 농업과 공업 간의 협상가격차(鋏狀價格差)로 유발한 농촌의 구조적인 물자 결핍 상황에서 공소사는 농촌 경제의 불가결한 일환이 되었다. 최근 일부 1인 매체들은 공소사의 부활과 미국이 중국에 대한 새로운 경제봉쇄, 중국 국내 코로나 대응으로 인한 지역적 봉쇄 정책, 경제 내순환에 대한 강조, 그리고 타이완 해협 군사 충돌의 가능성을 연관시키면서 공소사의 부활을 향후 경제봉쇄 및 결핍 상황에 대한 사전 대응으로 여겼다. 이러한 논조는 사실 근거가 다소 부족하지만, 일반인에게 공소사와 경제봉쇄 간의 공존 관계를 상기시키는 효과가 없지는 않았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20차 당대회 업무보고와 인사 변동에서 반영된 중공의 두 가지 위기의식은 공소사의 부활에도 반영되었다. 사회주의국가의 집권당으로서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위기의식과 우환(憂患)의식을 갖추는 것은 중공의 당연한 책임이지만, 이를 과도하게 정치화하고 정치·경제적 일상에서 부각시키면 큰 혼란의 시작점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리페이 _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 참고문헌
國務院, 1999,「關於解決當前供銷合作社幾個突出問題的通知」, http://www.hangzhou.gov.cn/art/2019/7/11/art_1662715_4932.html.
리페이, 2022, 『생산주의―탈생산주의 전환의 시각으로 본 1950년대 이래 한·중 양국 농업·농촌 변천』, 인천대학교 박사학위논문.
陝甘寧邊區政府建設廳工合辦事處, 1949, 「陝甘寧邊區合作社工作總結」, 中華全國供銷合總社史料叢書編輯室 編著, 1990, 『中國供銷合作社史料選編(第二輯)』, 北京: 中國財政經濟出版社.
이원준, 2021, 「'신촌(新村)'건설의 꿈」, 『관행중국』, 135(12), https://aocs.inu.ac.kr/webzine/app/view.php?wp=854.
程宏毅, 遲孝先 編, 2009, 『當代中國的供銷合作事業』, 北京: 當代中國出版社/香港: 香港祖國出版社.
中共中央, 國務院, 1995, 「關於深化供銷合作社改革的決定」, http://m.law-lib.com/law/law_view.asp?id=59902&page=3.
中共中央, 國務院, 2015, 「關於深化供銷合作社綜合改革的決定」, http://www.gov.cn/zhengce/2015-04/02/content_2842180.htm.
中華合作時報, 2022.11.25., 「湖北省社:“基層社恢複重建工程”取得階段性成果」, http://www.chinacoop.gov.cn/news.html?aid=1762297.
遲孝先, 1988, 『中國供銷合作社史』, 北京: 中國商業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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