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일동회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사항락(史恒樂)이 경영하던 복성잔(復成棧)은 객잔(客棧) 겸 ·잡화상점·무역회사인 행잔(行棧)이었다. 행잔은 단순한 중국식 여관인 객잔이 아니라 화상(華商)에게 각종 무역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사진 1. 복성잔(사진 중앙)과 영생덕(복성잔의 왼쪽) 건물 사진 사진 2. 복성잔 건물 1층
행잔은 산동성과 산동성 출신 화상이 활동하던 일본의 오사카와 조선의 인천에 개설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밝혀져 있지만 행잔 건물의 내부 구성이 구체적으로 밝혀진 적은 없었다. 복성잔 건물은 2층의 벽돌 건물로 취사장, 발코니, 객실 등이 갖춰져 있었다. 그리고 피의자들의 범행 장소로 이용된 복성잔 바로 옆 건물의 영생덕(永生德)도 같은 행잔으로 보이는데 1943년 당시는 화교 노동자 합숙소로 활용되고 있었다. 복성잔과 영생덕 2층에서는 인천항을 조망할 수 있었다.
근대 인천화교가 경영하는 숙박시설은 호텔과 객잔이 있었다. 화교 경영 호텔로는 스튜워드호텔(Steward Hotel)이 있었는데 1884년에 영업을 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1883년이나 1884년에 설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호텔은 화상 이태(怡泰)가 설립하여 경영했으며, 중화루 건물 맞은 편에 있었다.
언더우드(H.G. Underwood) 선교사 일행이 인천항에 1885년 4월 5일 도착했을 때 스튜워드호텔에서 여장을 풀 정도로 대불호텔과 함께 당시 가장 고급의 숙박시설이었다. 1892년 스튜어드호텔의 객실은 8개로 대불호텔의 11개보다는 적었다. 스튜워드호텔의 요금은 2원이었고, 대불호텔은 상등 객실 2.5원, 중등 객실 2원, 하등 객실 1.5원으로 대불호텔과 큰 차이는 없었다.
사진 3. 복성잔 건물의 계단 사진 4. 복성잔 2층 발코니
스튜워드호텔 이외의 화교 경영 숙박시설은 상기의 행잔·객잔이 있었다. 중국에서 인천으로 이주한 화교는 꽤 비싼 스튜워드호텔에서 숙식을 할 수는 없었다. 1907년 말 일본인 경영의 여관이 인천에는 12개 있었지만, 다다미방이어서 중국인이 이용하기는 불편한 점이 많아 거의 이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1907년 말 일본인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천에는 화교 경영의 행잔·객잔이 4개 있었고, 종업원은 화교 남자 27명이었다. 그런데 인천중화회관이 1906년경 조사한 바에 따르면, 화교 경영의 행잔·객잔은 천합잔(天合棧, 종업원 15명), 복취잔(福聚棧, 14명), 협흥잔(協興棧, 14명), 춘기잔(春記棧, 10명), 천성잔(天成棧, 12명), 합태잔(合泰棧, 10명) 등 6개가 있었다.
1923년경에는 행잔·객잔이 11개로 증가하는데, 주요한 곳은 인합동잔(仁合東棧), 천합잔(天合棧), 춘기잔(春記棧), 동순잔(同順棧), 흥성잔(興盛棧), 복성잔(復成棧), 원화잔(元和棧), 복인잔(福仁棧)이었다. 복성잔은 1923년 당시 영업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이렇게 놓고 보면, 개항기 및 일제강점기 인천항의 숙박시설을 지금까지 일본인 경영의 대불호텔과 일본식 여관에만 초점을 맞춰온 것에 약간의 수정이 불가피해 보인다. 즉, 화교가 설립한 스튜워드호텔, 상기와 같은 행잔·객잔이 존재한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한반도화교와 베트남화교 마주보기 28】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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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2, 3, 4. 국사편찬위원회 전자도서관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