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이번 호부터는 【우룸치 통신】이라는 제목으로 중문학자 김영구 교수의 원고를 연재합니다. 김영구 교수는 오랜 시간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시다가 작년 8월에 퇴직하시고 명예교수가 되셨습니다. 주로 중국현대문학, 중국문학사, 중국공연예술 분야에서 독보적인 연구 성과를 남기셨고, 소수민족의 현대문학, 위구르 현대문학, 중국공산당의 소수민족정책 등도 연구하고 계십니다. 특히 최근에는 국가폭력으로 인해 해체 위기에 직면한 위구르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현재 외부와 차단되어 있는 위구르 지역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이나마 열심히 전해보자는 뜻에서 칼럼 제목도 【우룸치 통신】으로 정했습니다. 우룸치라는 도시, 위구르 사회와 위구르 지식인들의 생각, 이슬람이 위구르 사람들에게 갖는 의미 등등 어디서도 쉽게 들어볼 수 없는 위구르 사회의 생생한 모습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
우룸치를 향해 베이징에서 이륙한 비행기는 서너 시간 뒤 한동안 메마른 사막 위를 날다가 황량한 톈산산맥과 보그다산맥 사이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 중가리아 분지로 들어선다. 그 때 마술처럼 신기하게 초록빛 산록이 눈앞에 펼쳐지고 거기에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수도 우룸치가 있다. 왜 유목민들이 ‘아름다운 목장’을 뜻하는 ‘우룸치’란 이름을 붙였는지 절로 이해가 간다.
비행기에서 내려 시가지로 들어서면 실크로드를 향해 힘차게 뻗어가는 중국의 근육질이 불끈불끈 느껴진다. 메마른 불볕과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이 합세해서 우룸치의 여름 기온은 툭하면 섭씨 40도를 향해 올라간다. 겨울에는 영하 30도 아래로 떨어지기 일쑤고 매서운 추위를 견디느라 마구 피워대는 석탄의 매캐한 냄새 덕분에 방문객들은 온종일 두통에 시달린다. 그러나 이런 악조건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대일로의 깃발 아래 도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맹렬하게 팽창 중이다.
사진 1. 버스를 기다리는 우룸치 사람들
1949년 인민해방군이 들어오던 무렵 위구르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던 우룸치 인구는 10만 정도였다. 바이두에 따르면 2017년 350만을 넘어섰는데, 70년 동안 위구르 인구는 30만이 늘어서 40만이고 그 동안 물밀 듯이 이주해 온 한족 인구는 250만에 육박한다. 도시 이름만 유목민의 말일 뿐 우룸치는 한족 도시가 된지 오래다. 도시의 일취월장 발전은 북쪽 한족 지역 이야기고 남쪽 위구르 지역은 슬럼에 가깝다.
우룸치라는 도시 이름이 한국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일은 2009년 여름에 일어난 폭동 때문이다. 위구르 시위대가 한족을 공격하고 약탈하자 한족도 보복 공격에 나서면서 폭동은 민족 간 충돌로 발전했다. 위구르의 입장에서 보자면 폭동은 서부대개발이 상징하는 중국공산당의 신장 통치와 개발 전략에 대한 저항이었다.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나부낀 서부대개발의 깃발을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위구르 사람들은 내심 중국공산당의 장밋빛 약속에 은근히 들뜨기도 했다. 제조업과 서비스업 부문의 고용 확대, 소득 증대와 소비 생활 향상, 실크로드 진출에 편승한 터키계 국가들과의 교류 확대, 위구르 민족사회의 활력 등등이 그런 은근한 기대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서부대개발을 위구르 사람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몰고 갔다. 대규모 투자가 만들어 낸 고용 수요는 모조리 한족을 이주시켜 해결했고 위구르 사람들은 철저히 배제했다. 대신 중국공산당은 우룸치를 비롯한 신장의 도시에서 취업하기를 원하던 위구르 청년들을 광저우 일대의 공장 지대로 강제 이주시켜 열악한 저임금 노동에 투입했다. 위구르는 중앙아시아 터키계 국가들과 훨씬 더 철저하게 차단되었다. 서부대개발의 행운을 누린 소수의 사람들과 희망 없는 다수 대중으로 분리된 위구르 사회는 내부 갈등과 분열에 시달렸다.
불볕이 내려쬐던 2009년 여름 한족들이 광저우 인근 샤오관의 한 장난감 공장 기숙사에 수용되어 있던 위구르 청년들을 공격하고 학살했다는 소식은 우룸치의 위구르 청년들을 격분시켰다. 시위는 폭동으로 발전했고 우룸치 시가지는 폭력과 공포의 도가니로 변했다. 폭동의 여진은 신장 전역으로 번졌고 테러가 꼬리를 물었다. 폭동이 몰고 온 불안과 공포는 이전까지 제법 섞여 살던 한족과 위구르 사람들의 거주지역은 물론 활동 공간도 분리했고 민족 간 오해와 갈등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위구르 지역의 경제적 활력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부동산 가격은 폭락했다.
우룸치 폭동은 다들 들추고 싶지 않던 폭력의 역사를 일깨웠다. 투항한 고구려 병사들과 고선지를 총알받이로 이용했던 당의 서역 진출은 한족과 유목민 사이의 치열한 전투와 학살을 예고한 이정표가 되었다. 당의 세력이 약해지자 안서도호부가 휘둘렀던 폭력과 공포를 유목민들은 그보다 더한 폭력과 공포로 되갚았다. 위구르인의 조상이 건설한 유목민 연합국가였던 위구르 카네이트와 신장 동남부를 빼앗겼던 티벳은 번갈아 가면서 안서도호부에 대한 피의 보복을 주도했다. 이합집산의 과정에서 이해가 엇갈린 유목민들은 외부의 폭력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익숙해진 살육의 칼을 서로를 향해 쉽게 들이밀었다. 지옥으로 함께 빠져들어가던 신장 사람들을 구한 것은 이슬람이었다. 이슬람의 깃발 아래 형제가 된 신장 사람들은 서로를 향한 칼을 거둬들였다.
당나라 군대와 함께 신장 일대에서 퇴각한 중국이 다시 신장으로 진출한 때는 18세기 중엽이었다. 강성한 국력을 바탕으로 신장에 팔기군을 투입한 청 제국은 저항하는 유목민을 제압하기 위해 가혹한 인종청소의 칼을 휘둘렀다. 청 제국의 편에 섰던 민족들과 반대편에 섰던 유목민들 사이의 원한은 한층 더 복잡하게 얽혔다. 이후 20세기 중반까지 점점 지독해졌던 반란과 독립운동, 피의 진압과 살육, 테러와 보복이 난무하던 지옥과 같은 상황을 가라앉힌 건 사회주의의 깃발이었다. 국민당 군벌 군대와 목숨을 건 살육전을 벌였던 동투르키스탄의 수상 부르한 샤히디가 인민해방군에게 순순히 항복하고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보기는 했지만 위구르 사람들이 초승달 깃발을 내리고 오성홍기를 올린 큰 이유는 만국 인민의 단결과 형제애를 외친 사회주의에 대한 기대와 믿음 때문이었다. 서부대개발은 껍데기만 남은 사회주의가 그림자조차 사라지고 중화주의와 한족 우월주의가 그 자리를 차지했음을 위구르 인민들에게 선포한 일이었다. 우룸치 폭동은 인민의 단합과 형제애라는 20세기의 유산을 걷어차고 다시 해묵은 민족 간 대립과 살육의 판으로 돌아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우룸치폭동을 진압한 후진타오는 위구르 사람들을 위협하고 감시하면서 동시에 달래려고 했다. 위구르 지역 곳곳에 실탄을 장전한 무장경찰 부대를 배치하고 시도 때도 없이 중무장한 장갑차가 굉음을 내뿜으며 시가지를 달리게 했지만 동시에 위구르 지역에 수도와 전기를 보급하고 교통망도 정비해주고 구멍가게들과 바자르와 좌판도 용인해 주었다. 그런데 시진핑은 그런 어정쩡한 방식을 내던지고 상상을 초월한 현대적이고 잔인한 방식을 채용했다. 바자르와 좌판을 몰아내고 대신 골목골목마다 무장경찰 초소를 지어 검문검색을 일상화했다. 모든 가게와 골목마다 감시카메라가 빼곡하게 달렸다. 고성능 카메라를 단 순찰차는 24시간 거리를 누비고 보디캠으로 무장한 경찰들은 수시로 사람들을 검문했다. 관리들이 손에 들고 있는 재교육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있는 사람들은 모조리 어디론가 끌려갔다. 위구르사람들은 의무적으로 DNA샘플을 제출해야 하고 이상한 시스템소프트웨어가 깔린 유심을 끼워야만 핸드폰을 쓸 수 있다. 자동차는 물론 오토바이와 자전거들도 반드시 GPS를 달아야하고 수시로 검문을 받아야 한다. 외국인들도 신장에 들어가려면 열 손가락의 지문과 안면인식용 영상을 내주어야 한다. 개인정보 노출 없이 위구르 지역을 지나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무수한 영상과 정보들은 어딘가로 보내지고 거기서는 각종 첨단기술로 위구르 사람들과 외국인들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감시할 것이다. 우룸치는 중국 디지털기술의 비약적 발전상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으시시한 학습장이 되었다.
시진핑의 조치 가운데 압권은 재교육센터라고 주장하는 강제수용소의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위성 사진을 통해 추산한 수용 예상 인구는 백만을 훨씬 넘는다. 2021년 현재도 높은 담장과 철조망, 감시탑, 군대식 막사, 대형 공장이 들어찬 엄청난 규모의 새로운 수용 시설들이 신장 곳곳에 지어지고 있다. 골목을 왁자지껄 몰려다니던 위구르 사람들은 종적을 감추었고 위구르 지역의 호텔들은 하나같이 외국인의 투숙을 거절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반의 반으로 줄었고 모스크 앞은 공터로 변했다. 귀청이 떠나가게 시끄럽던 점심 시간 링관샹의 위구르 식당은 말없이 음식을 입에 밀어넣는 이상한 장소로 변했다. 코로나19가 퍼지기 직전 2019년 여름 방문한 우룸치에서는 유령이 더 이상 한밤중에만 출몰하지 않았다. 이빨을 드러낸 폭력과 공포의 유령은 대낮에도 우룸치 거리를 제멋대로 휘젓고 다녔다.
【우룸치 통신 1】
김영구 _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명예교수
해당 글은 중국학술원의 공식입장과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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