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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시사&테마
5월호
‘탈(脫)진실’의 시대, 민주주의의 위기와 동아시아 _ 김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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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동아시아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정치적 불안정성이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불안정성은 미국에서의 트럼프 등장, 유럽에서의 급진적 전체주의자들의 성장, 영국에서의 브렉시트를 둘러싼 갈등 그리고 진행 중인 한/중/일 간의 민족주의 갈등 등으로 표출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불안정성이 결과적으로는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크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그러한 국내외적 갈등의 문제를 경험적 사실의 분석을 통한 대안 모색의 합리적 프로세스를 통해서가 아니라, 즉 진실의 문제를 신념과 정서의 문제로 바꿔놓는 소위 ‘탈진실의 정치’(Post-Truth(혹은 Factual) Politics)의 전략으로 접근하려는 정치가들이 세계정치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는 현실과 관련되어있다. 그런데 이러한 탈진실의 정치가 정당이나 정치가들에 의해 현실적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정치적 무관심 혹은 정치혐오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책임감 없이 그런 정치가를 선택하는 대중의 정서적 정치행위 때문이다. 현실 속에서 정치/권력에서 자유로운 인간이 존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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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독일인의 삶> 포스터. 포스터의 얼굴은 폼젤. 출전 : 네이버 영화


그러한 ‘탈진실의 정치’의 성행과 관련하여, 2016년에 독일에서 발표된, 나치시대 선전상 괴벨스(Goebbels)의 비서실에서 일했던 브룬힐데 폼젤(Brunhilde Pomsel)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필름, “어느 독일인의 삶”은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폼젤은 나치 독일의 심장부에서 일하면서 당시 독일에서 진행되었던 많은 일들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그녀는 자신이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고 이야기 하는 것으로 그러한 추론에 답한다.(이하 폼젤의 인용문들은 『어느 독일인의 삶』, 열린책들, 2018에서 가져온 것이다)


가끔 난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곤 해요, 옛날에 내가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걸 스스로 그렇게 책망할 필요가 있을까? 어쩌면 관심이 없었던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젊은 혈기에 한쪽으로 쉽게 휩쓸려 갔다가는 금방 인생이 파탄 났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그녀에게 정치란 무엇이었을까. 어쨌든, 그래서 그녀는 반나치 운동을 벌였던 뮌헨대학 조피 숄Sophie Scholl 오누이의 “백장미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그 사람들도 어리석었죠. 어떻게 그런 일을 계획할 생각을 할 수 있어요? 그냥 입을 다물고 살았다면 지금도 살아있지 않겠어요? 그 사건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생각이 그랬어요.


괴벨스의 비서로 일한 것은 단순히 직업에 불과한 것으로 그녀는 그러한 직업에 최선을 다했고, 그 지위에서 향유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기도 했다.


아무튼 난 남들보다 지내는 형편이 괜찮았어요. 약간 선택받은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거기서 일하는 것이 만족스러웠어요. 모든 것이 편했고 마음에 들었어요.


약간의 혼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괴벨스의 사무실에서 일했던 것을 즐겼고, 그게 무슨 문제가 될까 반문하면서 말한다.


난 책임이 없어요. 어떤 책임도 없어요. 대체 뭣에 책임을 져야 하죠? 아무리 생각해도 난 잘못한 게 없어요. 그러니 져야 할 책임도 없죠. 혹시 나치가 결국 정권을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독일 민족 전체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그건 어쩔 수 없지만요.--(중략)--세상 모든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다는 건, 그래요, 일단 서민들한테는 그럴 시간이 없었어요. 먹고살기 바빠서요.--(중략)--내가 비난을 받을 수 있다면 그건 내가 누군가에게 개인적으로 부당한 짓을 한 경우에만 그럴 거예요. 하지만 난 누구한테도 그런 짓을 한 기억이 나지 않아요.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에서 발견했던 “악의 평범성”,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말한 “선한 자들의 소름끼치는 침묵”, 무관심과 침묵이 초래한 나치독일의 현실을 슬프게 노래한 마틴 니묄러의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에서 말하는 무관심을 내세우는 현실의 선한 삶이 아마도 폼젤의 삶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관심이 나치즘의 독일 지배를 가능하게 한 핵심비밀이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 한다. 사실 어느 언론인의 지적처럼 우리 안에 존재하는 폼젤을 성찰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폼젤의 고백들이 강하게 가슴에 들어오는 이유는 우리 사이에 만연하기 시작한 “정치혐오” 혹은 정치적 무관심이나 무지 때문이다. 정치혐오나 무관심은 그것으로 정치적 선택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상처받은 감정과 기대, 그리고 부당한 세계에 대한 몰이해”에 뿌리를 두는 “주관적 진실”이라는 “탈사실적 논리”로 사람들을 이끌어간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토레 D. 한젠, 『어느 독일인의 삶』)


본래 비정치적 삶이란 존재할 수 없으므로 어떤 형식으로든 정치적 견해를 가질 수밖에 없는 보통사람들이 폼젤과 같은 자기합리화의 논리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정치학자 후안 린츠(Juan Linz)와 그를 계승한 하버드 대학의 레비츠키(Levitsky)와 지블랫(Ziblatt)이 개발한 “전체주의적 행동을 감별할 수 있는 4가지 경고신호체계”는 흥미롭다. 그들에 따르면 1) 말과 행동에서 민주주의 규범을 거부하고, 2) 경쟁자의 존재를 부인하고, 3) 폭력을 용인하거나 조장하고, 4) 언론의 자유를 포함하여 반대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려는 정치인을 유심히 지켜 봐야한다고 말한다.(『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도서출판 어크로스, 2018)


폼젤의 역사적 경험과 레비츠키 등의 경고에 비추어보면, 21세기 현대세계의 민주주의가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있음을 짐작케 한다. 동아시아의 경우 중국과 북한, 한국, 일본 등지에서 합리적 정치체제는 위기에 놓여있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은 지금까지의 당내민주주의 체제에 일대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 일당 독재국가이기는 하나 나름 활발한 당내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집단지도체제와 정파 간의 경쟁을 통한 임기제 권력구성방식으로, 중국 공산당은 개혁개방이후 중국의 발전을 견인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중국의 정치체제가 당(시스템)의 독재가 아니라 사람의 독재로 변모하고 있음을 의심하게 하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당/군/경 등 국가안보부문을 통할하는 <국가안전위원회>, 사실상 내각의 상위 기관으로서의 <중앙전면심화개혁영도소조>, 정보통제, 외교, IT 등을 담당하는 <중앙영도소조> 등 모든 권력을 시진핑에 집중시키는 일련의 조치들이 취해졌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정치에 무관심하거나(심지어 당원인 경우조차), 현실에는 침묵하고 개인적 삶에 몰입하거나 아니면 ‘주관적 진실’로 치장된 중국의 영광에 열광적 추종자가 되는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삶을 살고 있다. 소수의 경고를 발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들은 열광적 추종자들이나 정부에 의해 그냥 사라져 간다.


동아시아의 선도적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과 일본의 경우도 정치적 상황은 단순하지 않다. 일본의 경우 사실상 자민당으로 대표되는 전통 일본중심주의 정당의 영향력이 여전히 확고한데 비해 이 정당과 경쟁을 통해 일본 정치를 건전하게 변화시켜 나갈 대안 정당은 아직 구체적으로 모습을 나타내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일시적인 머뭇거림은 있을 수 있겠지만 결국 자민당은 일본을 재무장한,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바꾸어 나가게 될 것이다. 그래도 건전한 일본 시민사회가 일부에서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는 감정적, 탈진실의 논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전체주의의 부활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나 이미 일본은 그 문을 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한국의 경우는 촛불의 힘으로 정권을 바꿨으니 사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역동적 민주주의의 실험이 진행되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야당에서의 변화는 한국의 민주주의의 장래에 상당한 걱정거리를 남기고 있다. 사실 건전한 진보와 보수가 거친 들판의 보수와 진보를 제도권 안에서 순화해 내지 못한다면, 대중의 정치혐오는 극단에 이를 것이고, 나치가 그랬듯이 그러한 감성적 주관적 진실에 몰입하는 대중적 정치세력의 성장을 저지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김태승의 六十五非 11


김태승 _ 아주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 이 글에 사용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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