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장시간 외국을 여행하다보면 먹는 문제로 어려움을 겪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 길거리에서 발견되는 중국음식점은 작은 위로가 된다. 청년시절의 추억을 찾아 헤르만 헤세의 고향인 인구 24,000명의 독일의 작은 도시 칼브Calw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헤세의 흔적을 찾아 도시를 답사하고, 오직 독일어 설명서만 붙어있는 헤세박물관에서 극심한 피로감을 느낀 뒤, 점심 먹을 식당을 탐색하기 시작했을 때, 문득 작은 길옆에서 모습을 드러낸 중국음식점은 여행의 피로를 씻어주는 휴식공간이 되었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고는 하지만(그러나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관광지는 아니다) 이처럼 작은 도시에 조차 중국음식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중국음식이 어느 수준에까지 전 세계로 확장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독일에서 동아시아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다는 메칭겐Metzingen이라는 도시의 아울렛에는 독일어 안내문과 함께 중국어 안내문이 있었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한국어 안내문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중국어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런 방식으로 중국의 힘은 세계 어디에서나 그 모습을 드러낸다. 경제력을 기반으로 하는 구매력이 외부로 표현된, 보통사람들이 인식하는 중국의 힘이었다. 중국인들의 강력한 소비력은 콧대 높은 파리 상점들의 영업시간에 영향을 주고 외교적 분쟁이 발생했을 때, 상대방에 대한 압력을 가하는 ‘평화적 무기’로 전화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러한 중국의 승승장구하던 힘의 발산이 커다란 장애에 직면해 있다.
9월 24일 중국 국무원 신문판공실은 약 36,000자에 달하는 <중•미 경제무역 마찰관련 사실과 중국입장 백서>(이하 <백서>)를 발간하였다. 서문과 1.중•미경제합작의 상호이익과 공동번영, 2.중•미무역관계의 사실, 3.미국정부의 무역보호주의행위, 4.미국정부의 무역패권주의 행위, 5.미국정부의 부당한 방법이 세계경제 발전에 끼친 위해, 6.중국의 입장 등 6장으로 구성된 이 문서는 영문과 중문으로 작성되어 인터넷에 공개되었다. 중국과 미국 사이의 경제마찰은 외교정책에서 적극정책으로 전환하면서 일대일로 정책, 상하이협력기구(SCO), 동지나해의 내해(內海)화 추구 등으로 표출되었던 중국의 자신감에 커다란 상처를 주었다.
일부 관찰자들은 개혁개방시기 덩샤오핑이 제기한 28자 방침1)에 기원을 두는 도광양회(韜光養晦)에서 유소작위(有所作爲)로의 외교적 전환이 진행되면서 발생한 문제라고 지적했으나, 그 양자의 관계는 실제로는 단계적인 것이 아니었다. 덩샤오핑의 생각은 국제정세에 대한 냉정한 관찰을 통해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낮은 곳에서 인내하면서 중국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중국 내부의 권력투쟁과 성과 우선주의, 과잉 자신감은 화평굴기(和平崛起:시진핑 시대에 ‘굴기’를 ‘발전’으로 바꿈)라는 표현에 반영되어 있듯이 그 자신을 외부로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주변국과의 관계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공격적 모습을 보여 왔다. 화해세계(和諧世界) 건설이라는 상투적인 대외용 선전문구가 있기는 하나 실제로는 중국이 평화세계를 꿈꾼다는 사실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 “중국위협론”은 과거에는 구미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의 엄살 또는 편견으로 비판되었으나 이번에는 관광객, 무역 등을 무기로 활용하는 경험을 겪은 같은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도 현실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미국과 중국 사이의 무역전쟁은 미국에 트럼프라는 비상식적이며 미국 정치의 비주류에 속한 인물이 대통령이 되면서 본격화된 것이었다. 국가 간의 외교를 사업가의 관점에서 보고 자신의 눈앞의 이익에 전력투구하여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트럼프의 외교전략은 생존이 문제였던 기업가로서의 자신의 삶의 반영물이기도 하다. 기업의 세계에서야 말로 ‘갑’과 ‘을’의 관계가 명료하게 드러나며 트럼프는 ‘갑’의 지위를 만끽할 뿐 그것의 중장기적 영향에 대해서는 심사숙고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보면 트럼프에게 그가 원하는 선물을 주기 전에 중미 무역전쟁이 가라앉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시점에서 <백서>를 중국이 발간했는가하는 점이 문제가 될 것이다. 그것은 우선 국내의 불안과 비판을 잠재우기 위한 내부용일 가능성이 크다. 중국 경제가 하강국면에 있으며, 무역전쟁의 실질적 피해를 느끼는 사람들이 확산되기 시작했고, 그에 따른 정부외교정책에 대한 내부비판세력의 성장 등 무역전쟁의 결과 중국공산당은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외교상황의 비판자들에 대한 ‘투항주의’라는 비판이 더 지배적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사실상 무오류의 존재로 인민을 지배해 왔던 공산당이 자신의 전략을 수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입장은 미묘한 부분이 있기는 하나 <백서>의 6장 중국의 입장이라는 항목에서 압축하여 설명되고 있다. 그것은 6개 부문으로 나뉘어 첫째, 중국은 굳건하게 국가의 존엄과 핵심이익을 지킬 것이며 둘째, 흔들림 없이 중미 경제/무역관계의 건강한 발전을 추진해 나갈 것이며 셋째, 다자간 국제무역체제의 개혁과 발전을 보호하고 추동할 것이며 넷째, 재산권과 지적 재산권을 보호할 것이고 다섯째, 중국에 투자한 외국기업의 합법 권익을 보호할 것이며 여섯째, 개혁을 심화하고 개방을 확대해 갈 것임을 천명하는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백서>의 발간과 때를 같이하여 롄웨이량(連維良) 중국국가발전 개혁위원회 부주임은 미국의 중국 상품에 대한 관세부과에서 파생되는 위험은 중국에서는 통제 가능한 범위 안에 있음을 강조하는 내용의 발언을 언론을 통해 밝히고 있다. 특히 그는 14억 인구의 중국 국내 시장은 ‘내수확대를 통한 고품질 발전’을 가능케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중국은 옳고 미국은 틀리다’라는 논리와 ‘확고함’, ‘침착함’, ‘이성’ 그리고 ‘세계 최대의 개발도상국가’ 등의 표현에서 나타난 <백서>의 주장은 중국이 강대국으로 우뚝 서서(崛起) 세계를 향해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내비치는 얼마 전의 자신감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사실 포스트 냉전시대에 유지되어오던 미국의 국제정치 상의 권력 독점이 최근 서아시아의 정세변동 과정에서 도전을 받고, 유럽과의 관계변화, 러시아의 재등장 등 서서히 균열을 보이는 세계 질서의 요동 속에서 중국은 완성된 핵무장을 가진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국제무대에서 과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한 중국의 부상은 이해관계에서 대립되는 반중국 국가들의 연대를 강화시키고, 중국을 국제정치무대에서 어려움에 처하게 만들었다. 과거 국제정치적 상황에 비추어 보면 중국의 행태가 낯선 것은 아니었다. 빠르게 성장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해외원조를 하고 해외원조를 틈타 자국의 이익을 확장해 나가는 것은 이미 구미국가들이 해온 관행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중국으로서는 억울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대규모 차관을 활용하는 공격적 외교공세는 관행적으로 존재해 온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익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중국외교부가 지난 8월 정례기자회견에서 태평양지역 도서국가에 대한 대규모 차관공여가 다른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중국의 지원이 관련국 정부와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영국 등 기존 태평양 도서국가 지역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려왔던 국가들의 이익을 중국이 침해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지금 세계는 대발전, 대변혁, 대조정의 시기로 우리는 전략적 안목과 글로벌적 시각을 겸비하고--(중략)--백년 만에 찾아 온 대격변 속에서 방향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진핑의 공격적 외교 전략은 좌절의 위기에 처해있다. 그의 말처럼 지금 세계는 새로운 세계질서를 만들어가는 대전환기에 있다. 중국이 진정으로 ‘세계 각국과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기를 원한다면 우선 아시아에서부터 친구를 만들어가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애국주의적 사고방식으로는 그러한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참된 힘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중국 중심의 편협한 애국주의야 말로 중국이 그렇게 강조하는 국제적 연대와 개혁/개방의 최대 장애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태승의 六十五非 5】
김태승 _ 아주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1) 冷静观察(냉정관찰), 稳住阵脚(온주진각), 沉着应付(침착응부), 韬光养晦(도광양회), 善于藏拙(선우장졸), 决不当头(결부당두), 有所作为(유소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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