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박물관은 문화향유를 위한 기반시설이면서도 지극히 정치적일 수 있는 공간이다. 어떤 기억을 어떠한 방식으로 재현할 것인지에 대한 협상의 결과물인 박물관은 그 사회가 추구하는 핵심가치의 표현이기도 하다. 박물관은 건립, 전시물의 배치, 내러티브 등을 결정하는 권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이 되기도 한다. 홍콩의 박물관도 그렇다.
지난 8월 홍콩역사박물관에서 국가보안전시갤러리(이하 갤러리)가 개관했다. 홍콩역사박물관의 상설전시와도 같이 자리 잡은 갤러리는 연중 무료입장으로 운영된다. 명칭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듯이 이 전시가 지시하는 바는 상당히 명확하다. 국가보안법을 홍보하고 홍콩의 ‘조국’인 중국에의 소속감을 강화하는 것이다.
갤러리는 직접적으로 국가안보 교육의 장이라는 목적을 보여준다.1) 약 330평 규모의 공간을 6개의 구역으로 구분한 전시는 1) 홍콩, 우리 가족과 사람들을 안전하게 하는 국가보안, 2) 조국과 홍콩, 3) 당신과 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국가보안, 4) 장기적인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국가보안법, 5) 번영과 안정의 기초인 국가보안, 6) 국가보안 수호를 위한 협력을 소제목으로 전개된다. 국가보안법 시행 4주년을 맞이한 2024년에 공개한 전시라는 점에서 그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내용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시행 이후 여러 체포와 징역형 선고가 이어진 가운데 갤러리가 보여주는 홍콩은 반쪽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이 칼럼을 쓰고 있던 11월에는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된 활동가 45명에 대한 징역 선고가 한 번에 이루어진 초유의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들이 뒤흔들고자 했던 안보가 대체 무엇이었는지, 이를 수호함으로써 홍콩인이 얻을 수 있는 안정이 어떤 형태인지를 논의할 장은 이제 홍콩에서 찾기 어렵다. 2014년과 2019년의 거대한 사회운동과 이후의 물결이 국가보안법 시행과 함께 잦아들면서 현 체제에 대한 비판적 의사표현은 삶을 걸어야 하는 중대한 일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갤러리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국가안보를 둘러싼 사회적 합의가 얼마나 일방적인지를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다.
이런 상황을 보면, 중국의 영향력이 강해진 홍콩의 2025년을 디스토피아적으로 상상한 영화 십년(十年)(2015)의 내용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영화의 상상이 과격하고 성급한 측면도 있지만 특정한 이념이 비판적인 논의 없이 관철되는 현실이라는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특정 체제 중심적인 이념을 수호하는 집단과 이에 반대하는 활동가 사이에서 힘의 저울은 한쪽을 향해 기울어진 지 오래다.
홍콩 당국이 2023년부터 애국교육 강화를 목표로 박물관을 개편하기 시작하면서 그 힘의 불균형은 보다 가시화되었다.2) 애국교육 강화의 플랫폼으로서 박물관을 활용해 홍콩인의 애국심을 키우고자 하는 계획은 인프라 건설과 정책 결정에서 권력을 전유하고 다른 의견을 청취할 필요가 없어진 정부에 의해 주도된다. 이와 같은 시도가 가져올 효과가 염려되지만, 더욱 우려되는 것은 정부가 특정 서사를 재현하는 유일한 주체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홍콩의 애국교육 시도는 이미 2012년에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학생과 시민들이 이를 세뇌교육이라고 반대하며 거세게 항의한 결과 철회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2022년 서구룡문화지구에 문을 연 홍콩고궁박물관이 처음 논의되던 2017년에도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었다.3) 충분한 협의 없는 박물관 건립이 중국 정부의 호감을 사려는 정치인의 야망에서 비롯되었다는 비판이었다. 그렇지만 논란에도 불구하고 홍콩고궁박물관은 2022년 서구룡문화지구의 대표적인 문화시설 중 하나로 개관했다.
사진 1. 홍콩고궁박물관 전경
2023년 방문한 서구룡문화지구에서도 눈에 띄는 외관으로 시선을 사로잡은 홍콩고궁박물관은 개인적으로 꽤나 압도적이었다. 심미적으로 아름다운 건물, 깨끗한 산책로, 화려한 유물로 가득 찬 내부는 이곳이 가진 정치적인 함의보다는 문화적인 측면에 주목하게 하는 힘을 만들어낸다. 강력한 인프라는 박물관이 드러내고자 하는 정치가 무엇인지 희미하게 한다. 이러한 시간이 겹겹이 쌓이다보면 언젠가는 일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홍콩고궁박물관 인근의 미술관 M+의 전시를 보면 박물관 정치가 언제나 일방적으로만 관철되는 것만은 아니다. 특정한 의도에 따라 재현된 전시물로 박물관을 채울 수 있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관람하는 사람의 몫으로 남는다.
방문 당시 M+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 현대미술 작가의 작품들이 다수 전시되어 있었다. 장샤오강(张晓刚), 웨민쥔(岳敏君), 왕광이(王广义), 팡리쥔(方力钧)과 같은 중국 현대미술의 세계적인 거장의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예술이 가진 다의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사회주의를 선전하는 낡은 포스터 이미지에 명품 브랜드 샤넬의 로고가 함께 그려져 있거나, 맥락 없이 그저 크게 웃기만 하는 인물들이 연속으로 배열되어 있거나, 마오쩌둥의 입에서 꽃이 나온 것 같이 묘사된 작품을 보면서 중국인이 경험하는 혼란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작품은 중국의 성취와 발전만을 강조하는 전시와 비교되는 다른 차원의 사유를 경험할 수 있게 한다.4) 다의적으로 해석 가능한 방식으로 비판이 들어설 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는 박물관에서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를 결정하는 권력과는 구별되는 예술의 힘으로 인해 가능해진다.
사진 2. M+ 내부의 전시 모습. 왼쪽은 웨민쥔의
오른쪽은 팡리쥔의 작품으로 제목을 찾을 수 없어 병기하지 못함
홍콩 정부가 박물관을 통해 표출하는 애국교육의 의지는 인프라에 대한 결정권을 가졌다는 점에서 강력하다. 하지만 그 결과 만들어진 박물관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응시할 지는 개개인에 달려있다. 홍콩에서는 이에 대한 비판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문제라고 생각하는 지점들을 사유할 수는 있다. 행동으로 표출되지 않은 사유는 온전히 개인의 것이다.
중국 SF소설 <삼체>에서 지구 밖의 존재인 삼체에 대항하기 위해 사람들은 ‘면벽자’를 선발한다. 삼체가 지구에 보낸 ‘지자’를 통해 인간 세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모든 일을 거의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자 사람들은 의사소통과 행동에 제약을 받게 된다. 선발된 면벽자는 자신의 사유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즉 지자를 속이면서 지구를 지킬 수 있는 계획을 세우고 조력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면벽자의 사유는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기에 이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들이 된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혼자 사유하는 면벽자의 힘은 절대 약하지 않다. 어떤 사유는 표현되지 않더라도 세상에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홍콩의 박물관 정치가 애국자를 만들고자 할지라도, 결국 홍콩인의 생각은 홍콩인의 것이다.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지라도 계속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유는 힘이 세다. 홍콩에서 박물관은 일방적인 정치의 장인 동시에 치열한 사유를 촉발하고 자극하는 계기일 수 있다고, 이렇게 낙관하고 싶다.
【지금 여기, 홍콩 16】
김주영 _ 전북대 동남아연구소 전임연구원
*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중국학술원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1) 국가안보전시갤러리에 대한 세부 내용은 전시 리플렛을 참고함 (https://www.nsed.gov.hk/assets/pdf/nseg_visitor_guide_v2_en.pdf)
2) “Hong Kong Policy Address: New school initiatives, revamped museum and a festival to promote patriotic education.” Hong Kong Free Press. 25 October 2023.
3) “Hong Kong divided over Forbidden City museum plan.” BBC NEWS. 11 January 2017.
4) https://hk.history.museum/en/web/mh/exhibition/75A-Exhibition.html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2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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