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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시사&테마
11월호
마오시기 상속재판을 통해 본 중국의 '혁명적 근대성' (1) _ 안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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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대한민국 정부의 국무회의는 양육이나 부양의 의무를 저버린 부모나 자녀가 사망자의 유산을 상속하는 것을 제한할 수 있는 민법 일부 개정안, 일명 구하라법을 의결하여 국회에 제출했다. 이 민법 개정안은 구하라씨가 어릴 때 가출한 부모 중 한 명이 구하라씨 사망 후 상속 자격을 주장하면서, 이에 반대한 오빠가 제출한 청원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개정안은 원래 지난 20대 국회에 제출되 법사위에서 계류되어있다국회 임기만료로 자동 폐기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음에도 여론의 강력한 지지에 힘입어 재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상속인이 사망자에 대한 부양의 여부로 상속 자격의 정당성을 논의하는 일은 비단 2019년 사망한 구하라씨의 유산을 둘러싼 이번 사건 이전에도 빈번히 일어났다. 천안함 피격사건 때 사망한 군인이나 세월호 참사 때 사망한 학생에 주어진 보상금을 두고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부모가 갑자기 나타나 유족으로서 보상금을 수령하기도 했다최근에는 화재를 진화하다 사망한 소방관 가족에 지급된 보상금을 놓고도 유족끼리 비슷한 갈등이 일어난 적이 있다. , 부모나 자식과 같이 상속법상의 상속인 신분을 가진 사람이 사망자에게 부양이나 양육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음에도, 법으로 정해진 자기 몫의 상속재산을 주장하고, 실제로 지급을 받아 가족 간 갈등이나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 사례는 일상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결국, 이 구하라 유산 분쟁 사건을 계기로 개정이 예정된 한국의 민법 조항은 일반 국민의 법 감정과 실제 법 조문 사이의 간극을 좁힐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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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2006128일 중국 산시성 한 마을 촌장집의 

투안위엔판(团圆饭)에 초대받은 필자의 모습

 

한편, 올해부터 실효 발효된 중화인민공화국의 민법은 이미 이런 문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민법 1130조는 상속인들끼리 동일한 유산 분배를 원칙으로 하면서도, 사망자의 부양에 절대적인 몫을 했던 자에게는 더 많은 액수를, 부양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홀히 한 상속자에게는 적은 양이나 아무런 몫을 주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나아가 1129조는 남편이 사망한 뒤에도 시부모를 모셨거나, 아내 사망 후에도 장인/장모를 모신 사위에게도 그들의 재혼 여부와 관계없이 친자식과 동일한 상속권을 행사하도록 정해놓고 있다. 이와 같은 중화인민공화국 민법의 상속 조항이 실은 1985년에 처음으로 발효된 중화인민공화국의 상속법을 거의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보다 훨씬 실용적이고 유연한 상속법을 일찍부터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워싱턴대학교 법학대학원(Washington University School of Law)에서 중국과 미국의 민법을 비교 강의하는 포스터 (Frances H. Foster)교수는 1985년 중화인민공화국 상속법이 제정·발효되었을 때, 사망인에 대한 부양과 이에 대한 보상으로서 유산 상속을 연계한 이 상속법이야말로 베이비붐 세대의 노령화를 맞이하는 미국이 생각해볼 대안이라고 극찬을 하였다.1) 그러나 동시에 그는 당시 이미 10억의 인구를 상회하던 중화인민공화국이 이제야 상속법을 제정한 것을 지적하면서 이전 중국의 상속재판은 이데올로기, 기존 관행, 민법의 원칙들이 두리뭉실하게 뭉쳐진”, “일관성도 없고 공백으로 가득 찬 복잡한 시스템”이라며, 오직 통일된 전국 단위의 상속법 (uniform national inheritance law)의 제정만이 이러한 것을 고칠 수 있다고 평가했다.2) 이와 같은 상속법 제정에 대한 평가는 다른 학자들 사이에서도 공유되어서, 공산권 민법에 대한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인 슈와츠(Lousi B. Schwartz) 교수도 1985년 상속법의 제정이야말로 중화인민공화국이 맑스주의 정설(Marxist orthodoxy)에서 벗어난 중요한 사건이라고 의미부여했다.3)

 

이처럼 기존 학자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1985년 상속법을 서구의 상속법보다 어떤 부분에선 더 실용적이고 합리적이라고 평가하면서, 동시에 마오시대의 상속 재판은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맑스주의, 마오주의의 과격한 면을 반영해서, 상속법 자체가 없는 혼란 그자체였다고 폄하했다. 실제 이들 학자들은 1956년경에 중화인민공화국의 기술관료(technocrat)들이 중국의 상속법을 초안했음을 강조하며, 이런 실용적인 노선이 곧 불어닥친 반우파 투쟁운동의 광풍과 문화대혁명의 혼란 속에 좌절되어 결국 초안이 폐기되었고, 곧이어 마오시기 중국 상속재판은 법도 없이 판결이 내려지는 모순된 상황이 벌어졌다고 평가했다.

 

필자가 실시한 마오시대 상속재판에 대한 연구는 바로 이러한 평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부터 1985년까지 중국의 인민들은 정말로 자신들의 유산을 이처럼 중구난방격인 판결에 맡기고 살아야 했을까, 아무리 공산혁명과 문화대혁명을 거쳐온 시기라고는 해도, 그 많은 중국인들이 부모님이 조상에게 물려받았거나 평생의 노력으로 일구어낸 재산이 걸린 상속재판을 마냥 운에 모든 걸 맡기며 법정으로 나갔을까? 아니면, 서슬 퍼런 공산당의 압제에 그 재산들을 순순히 포기했을까? 중국공산당은 과연 자손에게 재산을 남기려는 너무나 원초적인 인민들의 소망을 원리주의적인 태도로 억누르기만 했을까? 1985년의 상속법이 그처럼 창의적이고 실용적이라면 이 법의 제정은 단순히 마오시대에 대한 반성의 산물일까, 정말 중화인민공화국은 왜 1985년까지 상속법을 제정하지 못했을까 하는 질문들이었다.

 

물론 마오시대 상속재판에 대한 실증적인 자료가 거의 없다시피 하고, 현재로서도 외국인인 필자가 이전 재판기록에 접근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다행히, 필자는 베이징과 상하이 소재의 대학과 국립시립 도서관에서 마오시대 직후인 1980년과 1983년 베이징과 상하이의 정파대학(政法大學, 한국의 法學大學에 해당)에서 미래의 판사와 법원 간부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비공개용 내부문건(內部參考)으로 펴낸 상속재판 판례집 3권과 그 안에 수록된 132건의 판결 요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4) 물론 그 판결 요지가 어느 정도 편집인들에게 모범판례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감안해야 하겠지만, 최소 마오시대 모범 판결의 방향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또 그 사례집에는 그러한 판결에 기반이 되었던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한국의 대법원에 해당)의 의견이나 각 성정부 법무과 등에서 결정한 상속 원칙들이 실려있었다.

 

나아가 필자는 허베이지역의 성/현 당안관(정부기록보관소)에서 당시 현 정부가 집계한 상속재판 통계와 기존 연구에서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1956년 상속법 초안 원문, 그리고 이를 회람하고 올린 허베이성 사법청(司法廳)의 의견 문건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 이 초안을 작성할 때 이용하였던 허베이성과 베이징지역 상속재판 현황보고서와 그 초안이 민법으로 통과되지 못하고 실패한 후 1957년 작성된 보고서 등도 이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필자는 1956년 상속법 초안의 작성과정과 이에 대한 성/현급 사법청과 일선 법원 판사들의 비판, 나아가 실제 재판의 판결에 그러한 초안이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과 이에 반발했던 일선 판사들의 의견이 어떻게 반영되는지 종합적으로 가름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왜 마오시대 판사들은 상속법 제정을 거부하면서도, 서구 학자의 눈에는 일관성이 결여되고, 중구난방격인 판결을 내리는 걸 고집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결과 필자는 인민들의 전 재산이 걸려있는 이 상속재판과정에서, 남녀평등과 같은 혁명의 원칙과 아들 상속이라는 인민들의 관습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재혼 과부나 데릴사위와 같이 사회의 정형적인 가족 관계에는 벗어나면서도 엄연히 존재했던 가족들이 유산을 두고 갈등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마오시대 판사들이 서구와 전혀 다른 법원리를 추구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 혁명기 마오시대의 판사들은 서구의(특히 한국이 속해있는 대륙법적 전통이 강조하는) 어디서나 획일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진리(universally applicable truth)가 아니라, 해당 사안마다 가지고 있는 특수한 상황 내에서 공평함을 추구했던, 필립 황(Philip Huang)교수가 중국의 법적 전통으로 지적했던, 실용적 도덕주의(practical moralism)를 재판에 적용하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은 혁명적 원칙을 견지하면서도 인민들의 일상생활 상 관습과 법 감정에도 부합하는 균형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마오시대 판결문들이 내린 결론들이 결국 1985년 제정된 중화인민공화국의 상속법, 나아가 2021년 실행된 중화인민공화국 민법의 근간이 되었다는 점도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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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고인민법원이 상속문제에 대해 내린 일련의 지침을 담은 문서의 일부

 

이후 두 번의 연재를 통해 필자는 과연 마오시기 판사들이 시집가 다른 마을로 떠나버린 딸들과 마을에 남아 부모를 봉양한 아들들이 어떻게 유산을 나눠야 하는지, 또 떠나버린 딸들을 대신해 늙은 삼촌과 숙모를 부양했던 조카들은 과연 상속인에 포함되어야 하는지, 재가한 며느리는 죽은 남편 몫이었을 시아버지의 유산을 받을 권리가 있는지, 아내가 죽은 후 데릴사위가 주장하는 장모 유산의 몫 등과 같은 난제들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또 사망자 본인의 명의로 빌린 채무를 그 빚으로 생활했던 나머지 가족이 갚아야 하는지 등과 같은 서구 상속법상의 한정승인과 같은 원칙에 배치되는 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판결했는지 살펴보겠다. 그리고 그 판결들을 통해 마오시기 판사들이, 서구가 나름의 합리성과 근대성에 기초해 쌓아올린 법 원칙과 사뭇 다른, 남녀평등과 봉건제 해체와 같은 그들 나름의 혁명적 원칙을 실제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시키는 과정에 발견한 '혁명적 근대성(revolutionary modernity)'의 실질적 모습을 밝혀보려 한다.


안병일 _ 미국 새기노밸리주립대 역사학부 교수


                                      

해당 글은 중국학술원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1) Frances H. Foster. 1998, “Towards a Behavior-Based Model of Inheritance?: The Chinese Experiment.” University of California at Davis Law Review 77, pp. 77-126.

2) Frances H. Foster. 1985, “The Development of Iheritance Law in the Soviet Union and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American J. of Comparative Law 33(1). pp. 3362.

3) Louis B. Schwartz. 1987, “Inheritance law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Harvard International Law J. 28 (2), pp. 43364.

4) 北京政法学院民法敎硏室(1980), 继承案例汇编北京政法学院华东政法学院继承法资料选辑组(1980), 继承法资料选辑, 上海华东政法学院华东政法学院法学编辑部(1983), 法律顾问上海华东政法学院.


* 이 글은 필자가 Modern China 47 no.1 (2021)에 발표한 “Searching for Fairness in Revolutionary China: Inheritance Disputes in Maoist Courts and Their Legacy in the PRC Law of Succession”을 요약 정리한 글이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필자 제공

사진 2. 中国人民大学民法敎研室(1957), 中华人民共和国民法参考资料 vol.2北京中国人民大学, pp. 58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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