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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현장&공간
2월호
중국의 서쪽 국경도시 후얼구어스에서 _ 유장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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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변경여행은 중국 역사에서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 왔던 화이의 세계를 직접 확인해 보려는 시도이자 이른바 현대판 중화제국의 실체를 일부나마 관찰할 수 있는 기회였다. 특히 두 차례에 걸친 신장 여행은 과연 중국이란 국가가 어떤 성격의 국가인가를 되새겨 보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물론 거의가 단일 민족으로 구성된 한국인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지만, 여하튼 중원세계와는 너무나 다른 민족과 문화, 자연생태계를 보유하고 있는 신장의 경우에는 중국이란 국가의 실체에 대해 더 많은 의구심을 갖게 된다.


두 번째 신장 여행은 중국인들 틈에 끼어 진행되었다. 우리 가족 3명이 참가하였다. 코스는 우루무치를 기점으로 삼아 천지, 석하자, 사이림 호수, 청수하, 후얼구어스, 이닝, 나라티 초원을 보고난 뒤 다시 우루무치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투르판을 구경하는 일정이었다. 2008년 여름이었으니 벌써 10년이 지났음에도 당시의 느낌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사실 한국에는 국경이 없다. 반면 중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이다. 대륙 쪽으로만 한정해도 무려 14개 국가와 접하고 있으며 그 길이는 2만여 킬로가 넘는다.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특히 중국은 유라시아 국가의 일부인 만큼 이 나라의 주요 통로도 대부분 유라시아쪽으로 향해 있다.


각설하고, 청조 혹은 20세기 전반기까지 중국의 유라시아 통로는 중앙아시아 쪽의 카자흐스탄이나 키르키즈스탄, 그리고 러시아 등이었다. 현재 앞의 삼국 중에서 카자흐스탄과의 국경이 가장 길다. 중앙아시아 남부의 키르키즈스탄과는 파미르 고원에서 만나고 있고, 러시아는 신강 북쪽 끝에 있는 알타이 지역에서 살짝 걸치고 있는 정도다.


그 중에서 최근 들어 활기를 띠는 곳이 신강 서북부의 국경 도시 후얼구어스(霍爾果斯)다.  그보다 위쪽에 아라산구(阿拉山口)와 타청(塔城,타얼바하타이), 그리고 지무나이(吉木乃) 등이 있는데 이 중 후얼구어스는 카자흐스탄 남부인 알마티 쪽으로, 타청이나 지무나이는 카자흐스탄 북부나 러시아 쪽으로 나아가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반면 아라산구에는 중국에서 유럽으로 연결하는 철도가 지나고 있어서 또 다른 중요성을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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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중국의 서부 관문에서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 후얼구워스 세관. 2018년도 이곳을 통해 수출한 무역량이 3천만톤을 넘을 정도로, 최근 중국의 대중앙아시아 무역은 급격하게 발전하였다.


담위파(譚褘波)가 쓴 <중국변경유(中國邊境遊)>를 보니, 후얼구어스는 중국의 서대문이라고 부른단다. 타청은 그 반면에 준가르의 문으로 불렸다고 한다. 일부 연구에 따르면 타청은 청대에 러시아와의 무역에서 주요 통로 역할을 하였다고 분석하였다. 특히 러시아의 모피를 비롯한 물품이 이곳을 통해 중국에 유입되었다. 청대의 대외무역을 광저우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는 까닭에 서북부 국경지대에서 전개된 무역에 대해서는 국내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지만, 그러한 교류의 전통들이 최근 들어 더욱 흥기하고 있는 셈이다.


이 중 후얼구어스는 내가 중국여행에서 가 본 곳 중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소도시이다. 이곳은 예전에 실크로드가 번성하였을 때, 실크 로드 중 천산북로 중의 하나에 속하였고, 그런 탓에 중앙아시아로 나아가는 요지였던 곳이다. 특히 이곳이 러시아와 이리 지방의 교통상 요지로 발전하게 된 것은 1881년에 청과 러시아가 육로 협정을 맺으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인민공화국 성립 이후부터 1962년에 두 나라의 관계가 우호적일 때 가장 번성한 무역 도시 중의 하나였으나, 그 이후 양국관계가 악화되면서 사실상 폐쇄된 상태였다. 


양국관계가 해빙되고 물자 교류가 많아지면서 1983년에야 다시 개방되었고, 1992년에 이르러 제3국인이 출입할 수 있었다고 하니, 우리가 갈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행운인 셈이었다. 사실, 외국인인 우리가 중국인 여행팀에 끼어 갔기에 그나마 그곳까지 가서 현장을 볼 수 있었다. 당시 베이징올림픽을 앞둔 탓인지 경계가 심하였고, 일부 한국인 관광객은 여행허가증이 없어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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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후얼구어스 국경 초소 부근에 만든 외국의 공예품 전시장. 오랜 전통의 러시아 모피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우리 역시 숙박지였던 청수하(淸水河)를 떠나 후얼구어스 국경 관문에 갈 때, 가이드로부터 말을 하지 말 것,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광동에서 왔다고 할 것 등 몇 가지 ‘교육’을 받았다. 웬일인지 중국 사람들 중 일부는 나를 보면 광동 혹은 홍콩에서 왔느냐고 물었는데, 이 말이 가이드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막상 초소에서 검문을 하려고 젊은 공안 청년이 차에 올라왔을 때 한번쯤 모험할 생각도 해보았다. ‘여권을 꺼내들고 나 한국인이요’라고 말이다. 그러나 순조로운 여행과 식구들을 생각해서 그럴 수는 없었다. 내가 손을 더듬거리며 신분증을 찾는 시늉을 하자, 옆에 앉아있던 중국인들이 우리 일행이라고 말해주어서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청수하로부터 28킬로미터 떨어진 후얼구어스는 개방될 무렵만 해도 변경의 소도시에 불과하였으나, 인적 물적 교류가 많아지고, 중국과 카자흐스탄에 의해 자유무역지구가 설치되면서 변경무역도시로 성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최근 들어 양국의 무역액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고 한다. 2015년 기준의 인구는 약 8만 7천여 명인데, 이는 10여 년 전에 비해 10배 이상 증가한 숫자이다. 행정단위 체제로 보면 2010년에 후얼구어스 경제특구로 지정되었으며, 4년 뒤에는 시로 승격하면서 이리 서부의 중요 도시로 성장하였다. 앞으로는 육로 뿐만 아니라 철로와 항공에도 투자하여 중국의 대 중앙아시아 진출의 교두보로 삼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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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후얼구어스 세관에서 통관을 기다리는 카자흐인들. 개인이 가져갈 수 있는 짐은 최대한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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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우루무치에서 카자흐스탄의 징자까지 왕래하는 국제버스. 


신장 서부의 이리 지방이나 카자흐스탄은 민족구성상 대부분 카자흐인들이 주인공이다. 그러나 그들은 러시아가 동부로 진출하고, 청나라가 서부로 진출하여 이곳을 나누어 가지면서 자신들의 생활터전은 반토막이 나버렸다. 가축들을 방목하던 풀밭도 두 개의 국가에 나누어 편입되었고, 이곳의 특산인 천마(天馬) 역시 더 이상 자유롭게 초원을 내달릴 수 없게 되었다. 카자흐라는 말뜻이 위구르어로 '떠돌아다니는' 혹은 '자유로운'이라고 하는데, 이제 그들은 두 국가의 국경 내에 갇혀버린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는 종종 한국만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민족이 분단되어 있는 국가라고 하지만, 분단된 민족들은 세계 도처에 있다. 특히 과거의 소련과 중국의 국경에는 한 민족이 양쪽 국경에 걸쳐서 사는 이른바 ‘과계민족(跨界民族)’이 많아서 이들의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는데, 이러한 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국경 관문에 가니, 보따리 무역을 하는 카자흐인들로 인해 왁지지껄 했다.  조금 뒤에 떠나는 버스를 타기 위해 대기 중인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역사교과서에서 배웠던 변경 무역의 현장을 직접 보고 있는 셈이었다. 무역상들이 자기 몸보다 몇 배 더 나가는 가방들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자동차 타이어를 사가는 사람도 있고, 머리에 두건을 두른 무슬림들도 보인다. 바로 옆에는 카자흐스탄으로 가는 여행버스도 서 있었다. 카자흐스탄의 징자(瓊扎)가 어느 곳에 있는 줄 몰라서 옆에 있는 한 분에게 물어 보았더니, 친절하게 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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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후얼구어스에서 만난 중국의 카자흐인. 스스럼없이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어깨동무를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 분과 국경을 넘는 버스뿐만 아니라 후얼구어스의 이런 저런 사정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내가 카자흐족에게 느낀 감정을 이야기 해 주었더니, 자신도 카자흐족이라면서 친근하게 다가온다. 나이도 나보다 어려 보였으나 갑자기 어깨동무를 하고, 또 자기 친구를 불러 같이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몸짓과 말투에서 중국 한족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수많은 중국인들을 만났지만, 초면에 반갑다고 어깨동무를 했던 경험은 없었기 때문이다. 여행 중에 만난 중국내 카자흐족들은 씩씩한 편이었고, 시원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내가 사진을 보낼 주소와 이름을 써 달랬더니 카자흐어와 한자로 그것을 써 주었다. 자신은 신장성 공류현(鞏留縣)의 공무원이란다. 이름은 쥐누스한. 귀국 뒤 그의 사진을 뽑아 인사말과 함께 보냈으나 답은 오지 않았다.


후얼구어스 여행에서 느낀 것은 중국의 영토가 상상 이상으로 무척 넓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에서 역사상 경험한 중원의 세계와는 매우 다른 민족과 문화와 생태계가 저 서쪽 끝에 전개되어 있었다. 정말로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동아시아적 시각과 더불어 유라시아적 관점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이곳의 주인공이던 카자흐인들을 기준으로 본다면, 이들 민족은 카자흐스탄과 중국으로 분단되어 있지만 그 원형은 러시아와 청조 시대에 주조되었다. 어찌 보면 팽창하던 제국의 희생양이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분단은 후얼구어스라는 교류와 접촉의 거점을 만들어낸 것으로 생각되었다. 대자연을 자유롭게 뛰어 다녔던 카자흐의 오랜 관행은 이러한 대국에 의해 제약을 받았으니, 후얼구어스는 그 점에서도 중요한 상징일 것이다.


【현장에서 마주친 관행 19】

   

유장근 _ 경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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