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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현장&공간
12월호
농촌의료와 시장경제, 그리고 중국 국가 _ 안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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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미시간의 중소도시인 사기너(Saginaw)에 위치한 사기너 주립대에서 중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가르치는 입장에서 필자에게 가장 힘든 부분 중 하나는, 중국인들이 많이 사는 캘리포니아나 뉴욕지역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상당수는 여권도 가져 본 적도 없는 학생들에게 왜 그들이 태평양 건너 중국의 현대사를 배워야 하는지를 설득하는 일이다. 심지어는 중국경제가 얼마나 부상하고 있는지, 21세기에는 중국이 미국과 세계의 패권을 다툴 거라는 이야기에도 별 반응이 없을 때가 많다. 그런 필자의 학생들도 자동차 산업의 쇠퇴로 힘들어하는 지역경제에 때문인지,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 실시로 새로운 환경에 내던져진 중국 농민들의 삶을 소개할 때면 귀를 쫑긋 세우곤 한다.

 

그 중 학생들이 제일 관심을 보이는 주제가 농민공들의 도시 이주와 함께 농촌의 의료 문제이다. 이미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미국의 “시장 친화적” 의료보험의 문제점은 미국에 사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첨예한 관심거리이기 때문인 듯하다. 심지어 대학교수인 필자마저도 직장을 구할 때 해당 대학이 가지고 있는 의료보험 프로그램이 얼마나 보장성을 가지는지, 그리고 직장은 그 비용 중 얼마나 지원해주는지를 중요하게 고려해야 했다. 필자의 학교는 한 달에 1700달러를 지불해야 하는 의료보험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고 그 중 80%를 학교가 부담해주고 있다. (심지어 다른 직장의 보험에 비해 아주 우수하다는 이 프로그램도 치과와 안과는 포함되지도 않아 별도의 보험에 가입하고 있다.)

 

필자가 처음 필드 리서치를 시작했던 2005년 중국에서도 이 의료보험 문제를 놓고 몸살을 앓고 있었다. 집단농장의 일부로 존재하던 농촌 의료시설이 사라진 이후 농민들은 아플 때마다 그냥 참거나 현금을 벌기 위해 농민공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들은 고단한 외지생활에서 강도 높은 노동으로 오히려 병을 얻어 시골 마을로 돌아오곤 했다. 전편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교육, 노후보장과 함께 중국 농민들은 의료서비스의 시장화에 대응하기 위해 그 힘든 농민공의 삶을 강요당하고 있지만, 문제는 종종 부지런한 개인이 감당하기 벅차다는 것이다. 실제 1990년부터 1999년까지의 통계를 보면, 농민의 소득이 2.2배 증가할 동안 환자들의 평균 의료비 지출은 6.13배 폭증했다고 한다. 2005년 전후 중국정부가 내놓은 합작의료(合作医疗)의 주 목적이 의료비 부담으로 인한 농민 가정의 파산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의료서비스의 시장화로 인한 의료비 지출의 수직 상승과 이로 인해 농촌 가계가 감당해야 할 부담은 심각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중국은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농촌의료의 모범사례로 꼽을 수 있었다. UN이 과연 이를 중국의 특수상황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일반화해서 다른 개발도상국들에 전파해야 하는지를 고려해야 할 정도였다. 실제 1977년 문화대혁명이 막 끝났을 때 중국 농민의 80% 이상이 집단농장을 통해 기본적인 의료서비스를 받고 있었다. 필자의 연구 분야인 출산 부분을 보면 6개월에서 2년의 기본 의료교육을 받은 접생원(接生员)들이 약 47만에 달했고, 예방주사 접종과 혈압재기 등의 기초적인 의료교육을 받은 농민의사(赤脚医生, Barefoot doctors)를 더하면 200만 정도의 인력이 8억의 농민들에게 기초적인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중국정부의 당시 통계를 단순히 문화대혁명 시기 특유의 부풀리기만으로 볼 수도 없는 것이 필자의 필드리서치 과정에서 실제 이를 담당했던 많은 농민의사, 수의사, 접생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를 확인 할 수 있었다.

 

당시 중국의 농촌 의료서비스는 바로 중국 특유의 집단농장의 기초위에서 가능했다. 즉, 농민의사나 접생원들은 모두 평시에는 농민으로서 집단농장에서 노동을 하여 노동점수를 받고, 환자가 있을 때 치료를 해주며 추가로 노동점수를 받는 식이었다. 그리고 농한기에 2주정도 보다 전문적인 현의 병원에 가서 교육을 받아 지식과 기술을 향상시키곤 했다. 물론 그 교육기간에도 집단농장에서 이를 노동으로 계산해서 따로 노동점수를 주었다. 환자의 경우 진료비는 따로 내지 않았지만 약값 등은 그들의 노동 점수에서 제했다. 이와 같이 저유지 비용의 구조와 현금이 아닌 누구나 일해서 벌 수 있는 노동점수를 매개로 한 의료 서비스가 바로 성공의 비밀이었던 것이다.

 

필자가 만난 산서 C촌의 접생원을 예로 들면, 보통 때는 농장에서 일해 8점을 받지만, 애를 받은 경우는 14점을 촌에서 주었다. 아이를 낳은 집에서는 난산이나 산후조리가 필요한 경우 10~30점 정도를 촌에 납부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점수는 연말 결산을 통해 집단농장에서 생산한 식량으로 환치되었다. 또 환자가 보다 심각한 병에 걸린 경우 향진의 인민공사 소속 위생원에 보내 치료를 받게 하고 치료비를 식량으로 계산하여 나중에 연말 결산 때 그 환자 가정의 몫에서 제하는 것이었다. 비록 개복수술과 같은 전문적인 치료는 할 수 없었지만, 대부분의 농민들은 이와 같은 집단농장의 의료체계를 통해 출산이나 예방접종, 고혈압, 당뇨치료 등과 같은 기본적인 의료서비스에 접근이 가능했던 것이다. 전에 기술한 바와 같이 25~40%에 달하던 1940년대의 영아사망율이 50년대에 10%, 70년대 후반에는 4.8% 이하로 떨어진 것은 바로 이러한 농촌의료체계 덕분이었다.

 

이와 같이 집단 농장체계와 긴밀히 연계되어 있던 농촌의료 서비스는 80년대 집단농장의 해체와 더불어 사라지고 만다. 농민의사나 촌의 접생원이 집단농장에 속해 근무할 이유도, 이를 보조할 시스템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앞서 지적한 산서 C촌과 C촌이 속해있던 인민공사를 예로 들면, C촌의 위씨 아저씨는 다행히 촌에 남아 개인 위생소를 열었지만, 보다 명성이 높았던 농민의사는 읍내에 해당하는 향에서 개인 약국을 열었다. 그리고 C촌이 속했던 인민공사 소속의 보다 전문적인 의사들은 예외 없이 현청 소재지와 향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진료소와 약국들을 열었다. 바로 사진 A-1, A-2, A-3가 그에 해당하는 사례들이다. 해당 인민공사의 병원이 향 위생원의 이름으로 여전히 존재했지만, 실력 좋은 의사들이 모두 나가버리는 바람에 촌민들에게 외면을 받고 있었다. 촌민들은 믿을만한 개인 진료소의 의사를 찾거나 심각한 병이 생기면 현 병원으로 갔다.

 

 사진 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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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A-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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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A-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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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들 향 위생원, 현 병원, 나아가 개인 진료소들이 모두 의료서비스를 위해 양식이나 노동점수가 아닌 현금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국가단위의 지원이 줄어든 이들 공공병원 마저도 수익과 경영을 위해선 환자가 알지 못하는 검사를 받게 하고, 환자의 입장에서는 터무니없는 진료비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필자가 인터뷰과정에서 머물렀던 C촌의 촌장 왕 아저씨가 밤에 갑자기 심장 이상 발작을 일으켰을 때, 비교적 넉넉한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병원에 가기를 꺼려하며 일단 위씨 아저씨를 불러 검진을 받았다. 빨리 병원에 가라는 필자의 재촉에도 그는 의사들은 다 도둑놈들이라며 일단 자기가 어디가 아픈지를 알고 병원에 가야만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는 결국 제대로 된 치료시기를 놓쳐 일 년 뒤 몸의 반쪽이 마비가 되고 말았다. 위에서 밝힌 1999년 통계에 의하면, 병원에 입원할 경우 농민 개인이 지출하는 평균비용이 2,891위안에 달한 것도 상당부분 바로 이러한 의료서비스의 시장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당시 농민 가정의 평균 연간 소득이 10,000위안 안팎인 점을 고려하면 2005년 중국 정부의 의료개혁 목표가 농촌 가계의 파산 방지였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즉 농민들은 시장 경제의 등장과 함께 사라져 버린 의료서비스를 받기 위한 현금의 필요로 농민공이 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과정에서 얻은 병으로 파산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11월호에서 잠시 소개했던 하북 A촌의 수의사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그는 촌 수의사 직을 버리고 아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도시로 나갔다가 병을 얻어 이도저도 못하고 우울해하며 지내고 있다.

 

 

2005년을 전후해 문제의 심각함을 인식한 중국 정부가 추진하던 합작의료는 결국 정부가 출연해서 한국과 같은 국가의료보험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사진 B는 당시 정부의 요란한 구호를 잘 보여준다. 당시에는 중앙정부가 농민 1인당 연간 20위안, 지방 정부가 20위안, 농민 개인이 10위안을 부담해서 만든다는 계획이었다고 한다. 실제 촌 위생소를 경영하던 위씨 아저씨의 셋째 아들은 그 효과에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말로만 정부가 출연한다는 것이지 그런 금액은 실제로 향 위생원의 기계구입 등으로 정부가 당연히 지원해야 할 돈까지 포함하는 것이어서 실제 농민 개인의 외래진료/입원비에는 거의 도움이 안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실제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촌 위생소를 닫아버리고 농민공으로 나갈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농민들도 어차피 구호뿐일 것이라며 정부의 정책을 믿지 않고, 몸이 아플 때면 사진 C의 경우처럼 주로 촌에 머물러 있는 전직 농민의사들에게 음성적으로 치료를 받곤 했다.

 



사진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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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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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14년 가장 최근에 만났을 때까지, 위씨네 셋째 아들은 여전히 촌 위생소를 운영하고 있었고 솔직히 사정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촌민들에게 약을 팔고 비용을 청구하면 길게는 6개월까지 걸리기는 하지만 결국 비용이 전액 보전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필자가 보기에도 위생소는 분명 전보다 붐볐다. 실제 몸의 반이 마비가 된 왕 아저씨의 경우도 현병원에서 3개월 이상 입원했고, 지금은 아예 산서성의 수도인 타이위안의 병원에서 외래 재활치료를 받고 있지만, 그래서 상당한 비용을 지불했다고는 하지만 (10,000위안 정도 썼을 거라고 주변에서는 추정했다), 모두가 우려했던 대로 파산을 하지는 않았다. 아마 2009년 중국 정부가 야심차게 공개한 공공 의료 보험계획이 빈말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당시 중국 정부는 8,500억 위안, 당시 한국 환율로 130조원 상당의 비용을 들여 공공의료보험을 건설하겠다고 공언했었다. 이 비용이면 13억에 달한다는 중국인 개개인에게 650위안 이상이 돌아가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이러한 중국 정부의 의지는 결국 시장 경제로부터 걷어 들인 재정을 사회 안정화를 위해 지출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필자가 보기에는, 농민 의료보험 건설과정은 시장화 개혁이 낳은 부작용에 대해 중국 정부가 어떻게 대처해 나가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아닌가 한다. 그리고 또 국가의 의지가 얼마나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엿보게 하는 예인 듯싶다. 소위 오바마 케어의 설계와 집행과정에서 미국이 겪어야 했던 혼란과 여전한 일부의 반발을 보면, 중국국가(state)의 사회(society)에 대한 통제의 정도를 가늠케 하는 듯도 하다. 그래서 농촌의 의료보험은 필자의 중국 현대사 수업에서 두고두고 그 진행과정을 소개할 “인기” 소재가 될 것이다.


【華北 농촌 관행 조사 11】

 

안병일 _ Saginaw Valley State University

                                       

참고문헌

 

余少祥 “新农合:是大餐?还是鸡肋?” 新农村合作医疗 发展研究报告, 2010.

Hao Yu, “Universal Health Insurance Coverage for 1.3 billion People: What Accounts for China's Success?” Health Care Policy 119, no 9 (Sept. 2015): 1145-1152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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