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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시사&테마
7월호
'예술의 전당'으로 복원된 베트남 수도의 화교 역사: 항 부옴 거리의 광동회관 _ 심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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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구시가 지역에 새로 문을 연 예술의 전당

 

202110월 이후 베트남은 코로나19 팬데믹 사태 이후 실시해 오던 강력한 방역 정책에서 코로나19와 함께 살기(sống chung với Covid-19)”로 급선회했다. 군대까지 동원했던 사회적 거리두기와 확진자 발생지역 봉쇄 조치가 해제되고 조심스레 일상으로 되돌아가던 2021년 말, 베트남 민족혼(tâm hồn dân tộc)”이 숨 쉬는 곳으로까지 일컬어지는 하노이 구시가 지역(Khu phố cổ Hà Nội)에서는 젊은 예술인과 건축가가 참여하는 “2021 창조 발상 주간(Tuần lễ Khơi nguồn Sáng tạo 2021)” 행사가 개최되었다. 베트남 언론은 구시가 지역의 가장 번화한 거리 중 하나인 항 부옴(Hàng Buồm)에 새로 문을 연 예술의 전당(Trung tâm Văn hóa Nghệ thuật)’에서 행사가 개최되고 복원과 보수·증축을 통해 새 단장한 행사장 건물이 다름 아닌 수도 하노이의 잊혀진 화교의 역사를 대변하는 광동회관(廣東會館)’이며, ‘항 부옴 22번지의 기억이라는 기획전시가 그 역사를 담고 있다는 사실에 특별히 주목하였다. 화교들에 의해 하노이 중심가에 200여 년 전 건설됐던 회관과 베트남 근·현대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북부지역 화교의 역사·문화가 마침내 한세대를 훌쩍 넘는 시간 동안 드리워졌던 망각의 그늘 밖으로 다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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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보수와 증축을 거쳐 예술의 전당으로 복원된 광동회관 전경



항 부옴 거리와 화교의 하노이 이주·정착의 역사


하노이 구시가 지역의 대표적 번화가 중 하나인 항 부옴 거리는 전설에 따르면 9세기경에 세워졌다고 알려진 바잌 마 사원(Đền Bạch Mã, “백마 사원”, 현재의 항 부옴 76번지 소재)’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 지역은 탕 롱(Thăng Long; 하노이의 옛 이름)”를 감싸고 흐르던 또 릭(Tô Lịch) 강이 홍(Hồng)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옛 하구로, 물길을 이용한 교역이 활발하던 곳이었다. 중국 운남성에서 발원한 거대한 강(홍 강)과 그 지류(또 릭)가 만나는 강기슭에 위치한 항 부옴 거리는, 베트남어로 항(Hàng)이 상품을 부옴(Buồm)은 돛을 의미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항해 및 교역과 관련된 물품이 생산되고 거래되는 상업지역이었다. 이 지역에는 바잌 마 사원 옆에 형성된 시장과 하구 지역의 다른 시장인 꺼우 동(Cầu Đông; 東橋) 시장이 있었는데, 19세기 프랑스 식민자들은 또 릭 강과 타이 끅(Thái Cực) 호수를 매립하고 두 시장을 동 쑤언 시장(Chợ Đồng Xuân)으로 통합했다. 오늘날 하노이의 대표적 전통시장으로 여전히 기능하고 있는 동 쑤언 시장의 역사 한 축에는 항 부옴 거리의 역사와 구시가의 변화된 식민지 경관의 역사가 스며있는 것이다.


탕 롱에는 중국 광동, 복건, 조주, 해남 등지에서 이주한 4개의 화교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알려진다. 그중 광동성 출신 화교는 다른 화교 공동체보다 이주 시기가 빠르고, 가장 강력한 공동체를 형성했으며, 전체 화교인구 중 절반을 넘었다고 한다. 이들은 하노이 구시가 지역을 가로지르는 오늘날의 항 응앙(Hàng Ngáng)과 항 부옴, 마 머이(Mã Mây) 등의 거리를 중심으로 거주했다. 한편 복건성 출신 화교는 항 응앙 거리의 남쪽으로 이어지는 구시가 지역인 오늘날의 란 옹(Lãn Ông), 투옥 박(Thuộc Bắc), 항 보(Hàng Bồ) 등의 거리에 모여 살았다.

 

중국인들의 베트남 하노이 이주와 정착은 17세기경에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밍 흐엉(Minh Hương; 明鄉)’으로 불리던 이들은 청나라의 지배를 피해 이주해 대표적 상업지구인 항 부옴 거리에 정착했다. 점차 화교인구가 증가하며 거주지가 확장되었고 그 세력도 커지게 되었는데, 1801년에 광동회관 그리고 1817년에 복건회관(현재의 란 옹 40번지)이 건설되었으며, 1819년에는 관운장을 모시는 사당인 꾸안 데 사원(đền Quan Đế)”이 광동회관 근처(현재의 항 부옴 28번지)에 들어섰다. ‘하노이 화교들 중 일부는 19세기 프랑스가 베트남에 진주했을 때 프랑스 상인들과 무역에 나서며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남부지역을 식민화한 프랑스는 북부 베트남지역을 차지하려고 시도하였고, 저항하는 베트남과 1873년과 1882년 두 차례의 하노이 전투가 벌어졌다. 이 두 번의 전투에서 화교들은 프랑스 상인들과의 특별한 관계덕분에 큰 피해를 당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노이 화교 거주지의 안전성을 확인하였다.


항 부옴 거리에 화교들이 몰려들고, 하노이가 프랑스 식민지 인도차이나의 지배를 위한 수도로 자리를 잡자 거리 경관도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강을 통한 항해와 교역 관련 물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던 항 부옴 거리는 화교 상인들을 통해 유입되는 다양한 상품들이 넘쳐나는 상점가로 변모하였다. 또한 화교 상인들로 북적거리는 고급 식당들과 주점들이 문을 열었다. 항 부옴 거리는 점차 화교 집단거주지로서 위상을 더욱 분명히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거리 경관의 변화와 화교인구 증가와 더불어 화교 문화가 베트남인들 사이에도 급속히 확산하였는데, 특히 추석 의례와 월병(月餅; bánh Trung Thu) 등의 음식은 큰 관심과 인기를 끌었다.

 

항 부옴 거리에 위치한 광동회관의 위상은 호찌밍(Hồ Chí Minh)을 비롯한 베트남의 민족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혁명가 손중산(孫中山)이 직접 방문하고 체류한 역사를 통해 가늠해 볼 수 있다. 손중산은 1900년에서 1908년 사이 베트남에 모두 다섯 차례 방문해 머물며 혁명을 도모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다. 그는 특히 하노이에 머무는 동안 광동회관에 기숙하며 항 부옴 거리에 찻집을 열고 화교 및 베트남 민족주의자들과 교우했고 동시에 중국동맹회본부(현재의 쩐 흥 다오 Trần Hưng Đạo 거리 62번지)를 설립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광동회관은 남부 메콩 델타 지역의 화교들뿐만이 아니라 북부 하노이의 화교 공동체도 중국의 신해혁명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증언하는 대표적 장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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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중산 선생께서는 중국의 위대한 민주혁명을 거행하기 전 1904년에 이곳에 방문하셨다.”

사진 2. 광동회관 정문 옆 베트남어와 중국어로 병기된 1904년 손중산 방문기념 석판



광동회관은 1920년대에 들어 대대적인 증축을 통해 현재의 복원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최초 건립될 때는 베트남식 건축양식을 대체로 따랐다면, 증축과정을 통해 기와와 처마 부조 장식 등 전형적인 광동식 건축양식과 프랑스에서 들여온 자재들이 사용된 유럽풍 양식이 한데 어우러지게 되었다. 그 결과 베트남, 중국, 프랑스 문화의 혼종성(hybridity)’이 회관 건물의 대표적인 미학적 특징이 되었다.

 

회관 증축과정에서 한가지 특별히 주목할만한 점은, 프랑스 식민지 시기 화교에 대한 우대정책 등(심주형 2021 참조)으로 새로운 화교들의 대규모 이주가 발생하고 베트남인들과의 지위의 차이가 두드러졌음에도, 한문이 아닌 베트남의 전통 문자인 쯔놈(Chữ Nôm)으로 쓰인 현판을 내걸었다는 것이다. 당시는 이미 프랑스 식민자들이 광동인들을 깐또네(Cantonnais)”로 부르고 베트남 사람들이 이름 붙였던 비엣 동(Việt Đông)”이라는 광동인들의 거리명(현재의 항 응앙)“rue des Cantonnais (광동인의 거리)”로 바꾼 뒤였다. 또한 프랑스는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한 꾸옥 응으(Quốc Ngữ)’ 전용 정책과 의무 교육정책을 실시하고 있었기에, 쯔놈은 사실상 공중(公衆)의 언어로서 이미 폐기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회관 증축과정에서 새로운 현판에 쯔놈 문자가 사용된 것은 베트남인들의 전통에 대한 화교 공동체의 이해와 존중 그리고 민족주의적 저항에 대한 연대의 표명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당대 유명한 중국인 서예가에게 의뢰해 제작된 작품으로 알려진 광동회관의 현판은 한자가 아닌, 베트남 사람들이 광동인을 부르고 기록하던 방식 그대로 즉 베트남의 동쪽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지닌 비엣 동이라는 쯔놈 문자로 쓰여 내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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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 광동의 베트남어 옛 명칭 비엣 동(Việt Đông)’의 쯔놈 표기.

                  () 베트남 쯔놈(Chữ Nôm)으로 쓰인 광동회관의 현판 (1920년대 

유명 중국인 서예가 작품)



전쟁과 망각의 그늘: 광동회관에서 어린이 유치원으로

 

1945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과 뒤이은 전쟁은 북부지역 화교들의 삶에 큰 충격을 주었다(심주형 2021 참조).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른바 항불항쟁기간 동안 화교들은 한편에서는 난교(難僑)’의 위치로 내몰리며 인명과 재산에 막대한 피해를 경험하기도 했지만(이정희 2020 참조), 일부 화교들과 하노이 구시가 지역의 화교 집단주거지는 비엣 밍(Việt Minh)’의 조력자이자 안전구역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비엣 밍 세력은 항 부옴을 중심으로 한 화교 거주지를 1 연구(liên khu; 連區)’로 설정해 화교 상인들과의 자유로운 교역을 허용하고 식량 등 군수물자를 조달하였다. 또한 항 부옴 26번지에는 군 병원을 설치해 운영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엣밍과 화교의 특별한 관계는 프랑스가 화교와 화교 집단거주지에 대해 상대적으로 느슨한 통제 정책을 펼치고, 베트남 화교들 사이에 반서구·제국주의 정서가 널리 퍼져있던 상황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러나 1954년 디엔 비엔 푸(Điện Biên Phủ) 전투에서 비엣 밍이 대승을 거두고, 제네바 협정을 통해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되는 상황이 펼쳐지자 하노이를 포함한 베트남 북부지역의 화교들은 크게 동요하였다. 화교들 중 중화민국(대만)을 선택하거나, 천주교도 혹은 지주나 자본가였던 이들은, 대규모 이주 행렬을 따라 북위 17도선 이남 지역으로 월남하거나 제3국으로 떠났다. 항 부옴 거리의 대표적인 고급 중식당이자 월병맛집으로 명성을 얻었던 동 흥 비엔 (Đông Hưng Viên)’의 주인과 가족도 남부 사이곤으로 떠나 남부의 대표적 화교 집단거주지인 쩌런(Chợ Lớn)에서 사업을 이어갔다. 화교들이 탈출하면서 북적거리던 화교들의 거리에는 빈집과 건물들이 늘어갔다. 그리고 북부 산악지역에서 전투를 치르던 수많은 이들이 하노이로 들어와 화교들이 떠난 빈공간을 채우게 되었다.

 

베트남 분단체제가 구축되면서 하노이의 화교인구가 급감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다른 한편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의 특별한 관계가 병역의무면제등 특권과 정치적 지위를 화교들에게 보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의 문화혁명과 베트남 전쟁 과정에서 급격히 악화된 북베트남과 중국의 관계는 북부 베트남 지역의 화교들의 삶을 억압하며 위축시키기 시작했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북베트남의 승전으로 끝나고,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아 끝내 북부 국경 지역에서 전쟁을 치르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하노이의 화교 공동체는 사실상 흔적도 없이해체되고 말았다. 베트남과 중국의 전쟁이 발발했던 1979, 베트남 당-국가는 이미 화교 공동체의 회관으로서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된 채 방치되고 있던 항 부옴 거리의 광동회관어린이 유치원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렇게 하노이 화교의 이주·정착의 역사에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망각의 그늘이 드리워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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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1979년 이후 항 부옴 22번지 광동회관을 사용한 

호안 끼엠(Hoàn Kiếm)구 어린이 유치원 정문 앞 원아들 단체 사진.

예술의 전당으로 광동회관이 복원된 이후 유치원은 항 부옴 88번지(옛 동 흥 비엔 식당 터)로 이전했음.



역사·문화유산 복원의 정치 그리고 기억과 역사의 복원

 

전쟁과 사회주의 그리고 탈냉전으로 이어진 격랑의 시대를 거치고도 남부 사이곤의 쩌런지역은 베트남 화교의 집단거주지로서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을 이어갈 수 있었다. 반면, 북부 하노이의 화교 집단거주지는 그 흔적을 찾기도 어려울 정도로 해체되었고, 화교의 이주와 정착 그리고 교류에 관한 역사는 최근까지도 망각 되어왔다. 2004년 베트남이 문화 유산법 제정을 통해 수도 하노이 구시가 지역을 국가급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후에서야 화교의 역사와 유산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와 연구가 시작되었다. 2010년 하노이 정도 1000년을 기념하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고양되면서 상대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화교 집단거주지의 건물들에 대한 보존과 복원사업이 본격 추진되었다. 그리고 항 부옴 거리의 광동회관 복원사업은 2018년 하노이 시정부가 하노이 정도 1010을 맞이하여 추진한 사업의 하나였다.

 

도이 머이정책의 채택과 탈냉전 질서의 영향으로 개발 담론이 공론장을 지배하게 된 베트남 사회에서, 역사·문화유산에 대한 대중적 관심의 고양과 복원과 보존 등 정부 사업의 구체적 추진은 그 자체로서 높이 평가하고 주목할만한 변화임에 틀림이 없다. 또한 수도 하노이의 구시가에 위치한 대표적 화교 역사·문화유산인 회관을 복원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은 베트남과 중국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의 유산을 털어내고 베트남의 역사·문화적 다양성과 수용의 폭을 확장하려는 시도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항 부옴의 광동회관보다 먼저 복원되었던 란 옹 거리의 복건회관의 경우 사람들과 정부 기관의 무관심과 방치로 인해 다시 빈집이 되고, 주차난에 허덕이는 구시가의 오토바이 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단순한 복원과 보존만으로는 역사·문화 유산의 의미를 새롭게 해나갈 수 없으며, 오히려 역사·문화적 방치의 기억을 재생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게 하는 사례가 돼버린 것이다.

 

그나마 광동회관이 위치한 항 부옴 거리는 관광객들로 항상 붐비는 거리이며, 복원과 증축을 통해 예술의 전당의 형태로 지난 역사와 현재가 함께 숨 쉬는 공간으로 재탄생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복원 방식에 대한 기대감을 키운다. 또한 베트남 사회의 역사·문화유산 복원의 정치가 새로운 정치환경에서 과거사의 껄끄러움민감성을 유연하게 극복해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1945년 독립, 1954년 분단, 1979년 전쟁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지각변동의 진앙지였던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서의 화교의 삶과 그 역사·문화를 복원하고 재인식하는 작업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새롭게 복원된 항 부옴 거리의 광동회관이 베트남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베트남 화교들과 삶과 교류의 공간이었던 비엣 동 호이 꾸안(Việt Đông Hội Quán)’으로서 기억과 역사를 새롭게 하는 현장(lieux)’이 되고, 베트남 하노이와 북부지역 화교뿐 아니라 베트남-중국의 교류사에 관한 연구를 새롭게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심주형 _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 참고문헌

심주형, 경합과 통합의 정치: 베트남 분단체제의 형성과 화교·화인경관, 중앙사론54, 2021, 513-574 .

이정희, 1차 인도차이나전쟁 시기 베트남 난교(難僑)’ 문제, 중앙사론52, 1, 2020, 361-405 .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와 표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https://vnexpress.net/hoi-quan-quang-dong-giua-pho-co-ha-noi-4413107.html  

사진 2. https://tamviet.tienphong.vn/ngam-kien-truc-hoi-quan-cua-nguoi-hoa-xua-o-ha-noi-sau-khi-duoc-phuc-dung-post1405270.tpo

사진 3. 사진 하노이 텔레비전 방영 “Khám phá Hà Nội: Số 22 Hàng Buồm - Nét độc đáo trong kiến trúc văn hóa của Hội Quán Quảng Đông (P1)” (2022. 1. 10.) 프로그램 캡처 화면.

사진 4. http://mntuoitho.hoankiem.edu.vn/gioi-thieu/gioi-thieu-ve-nha-truong/mau-giao-tuoi-tho-noi-uoc-mo-chap-canh.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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