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ISSN 2508-2884 (Online)

시사&테마
1월호
마오시기 상속재판을 통해 본 중국의 '혁명적 근대성' (2) _ 안병일
프린트 복사 페이스북

지난 호에서 개괄하였듯이 중국의 인민들은 혁명기에도 부모나 형제, 자녀들이 사망했을 때 그들이 남긴 재산을 놓고 갈등하고 누구에게 얼마가 돌아가는 것이 공평한지를 놓고 법원에 판단해 줄 것을 호소했다. 필자가 처음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였을 때, 동료 연구자들은 중국의 농가들이 농장 집단화가 이루어진 1956년 이후에 유산으로 남길 재산이 거의 없었을 텐데 과연 유산 분쟁이 가능했겠냐고 회의를 표했다. 그러나 농촌의 각 농가는 자류지(自留地)로 남겨진 텃밭이나 가옥, 집에 심어진 과실수 등을 소유할 수 있었다. 실제 재판기록을 보면, 유족들은 심지어 기와장이나 목재, 벽돌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라는 문제를 가지고도 소송을 벌이곤 하였다. 도시에서는 본인이 거주하는 가옥뿐만 아니라 세를 놓을 수 있는 가게, 주택과 함께 은행예금 등이 종종 유산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


202112291649457193.jpg

사진 1. 중화인민공화국 상속법 초고


실제 필자가 조사한 허베이성(河北省) 딩현(定县)의 법원 기록을 보면, 1947년경에 이미 공산당이 지배하기 시작한 이 지역에서도 상속문제는 지속적으로 인민들 사이에서 분쟁의 원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52년에만 726건의 상속 관련 소송이 제기되어 전체 민사소송 건수의 11.9%를 차지했으며, 1953년에도 259건으로 13.7%의 비중을 차지했다. 비록 집산화(集産化) 이후 급격히 줄었다고는 해도 1962년 상반기에만도 14건의 소송이 제기되어 같은 기간 동안 딩현 현인민법원(县人民法院)이 처리한 민사소송 253건 중 5.6%를 차지했다. 그리고 5.6%라고는 해도 결혼 관련 소송이 75%를 차지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전체 민사소송 중에서는 상속분야가 두 번째로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나아가, 필자가 수집한 사례를 보면 많은 경우 재판 당사자들이 법원 판결에 불복하여 상급법원에 항소했다. 심지어는 엄혹했다는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기간 동안 무려 4번이나 항소를 하는 바람에 산시성(山西省) 고급인민법원(高级人民法院)에서 더 이상의 항소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판결을 내려준 경우도 있다.2 이처럼 마오시기에도 상속 재산은 많은 중국인들의 관심사였다. 이를 둘러싸고 갈등이 발생했을 때 그들은 법원에 판결을 요구했으며, 또 더 많은 몫을 차지하기 위해 상급법원에 항소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중국의 판사들은 상속법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판결을 내렸을까? 정말 기존 서구 학자들이 생각했던 대로 원칙도 없이 그냥 관습법과 공산당의 기율을 적당히 버무려서 판결을 내리고, 인민들은 이에 불복해 자꾸 항소했던 것일까? 나아가, 중화인민공화국이 상속법 초고를 폐지한 것은 1957년 반우파투쟁(反右派斗争)의 광풍에 휩쓸려서였을까? 마오시기 상속재판의 원칙들을 살펴보는 이 두 번째 글은 과연 1956년 초안된 상속법은 어떤 원칙을 가지고 있었고, 또 왜 정식 법령으로 제정되지 못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나아가 그러한 1956년 초고 폐기가 중국 혁명과정에 가지는 의미도 찾고자 한다.


사실, 거시적으로 중국혁명의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1956년 상속법 초고가 폐기된 것을 중국혁명의 좌경화와 관련 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 당시 집산화가 진행되어 가던 시기, 중국의 소유권과 재산권을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한다는 주장이 법조계에서 심심치 않게 나왔고, 또 국민당 시기 활동하던 법조계 원로들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도 제기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상속법 초고 폐기에 대한 현재까지 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실제 법안 초고의 내용에 대해 실증적인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3

 

필자는 다행히도 허베이성 당안관에서 당시 민법 제정을 담당하던 전국인민대표대회 (全国人民代表大会)의 상무위원회(常務委員會)과 허베이성 사법청(司法厅) 사이에 이 초고를 놓고 협의했던 문서를 발견하였다. 초고의 내용뿐만 아니라 이를 둘러싸고 당시 재판의 현장 실무자들인 현급 법원의 판사와 성 사법청 관리들이 벌인 논의까지 살펴볼 수 있었다. 이에 더하여 전인대 상무위 산하 연구팀의 실무자로서, 상속법 부분 초고를 담당했던 시화이비(史怀壁)가 상속법 초고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해 1957년에 출판한 보고서4도 같이 대조해 분석해 볼 수 있었다.

 

그 결과, 필자는 이 1956년 초고를 국민당이 제정한 1930년 중화민국 민법과 소련이 2차 세계대전 종결 후 수정한 1945년 민법의 상속부분과 비교하여 아래와 같은 상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공산당의 1956년 초고는 국민당이 당시 가장 진보적이라 평가받던 독일과 스위스 민법을 바탕으로 1930년 제정한 중화민국 민법과는 물론,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이 모범으로 삼던 1945년 소련 민법과도 다른 그만의 독특함을 보였다. 이 셋 사이의 주요한 차이점을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1930년 중화민국 민법

1945년 소련 민법

1956 중화인민공화국

상속법 초고

상속인의 범위와 순위

배우자외의 상속 순위는 아래와 같다.

1. 혈연관계가 있는 직계비속

2. 부모

3. 형제·자매

4. 조부모

*사망자로부터 생계를 지원받던 사람은 어느 정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상속인의 순위는 아래와 같다.

1. 배우자, 자녀, 양자녀, 손자녀, 노동력을 상실한 부모, 사망자로부터 생계를 지원받던 사람

2. 노동능력이 있는 부모

3. 형제·자매

 

 

 

상속인의 순위는 아래와 같다.

1. 배우자, 자녀, 양자녀, 노동력을 상실한 부모

2. 노동능력이 있는 부모

*사망자로부터 생계를 지원받던 사람은 어느 정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양자녀의 경우는 같이 거주하고 부양의 행위를 하였을 경우에 한해 상속권을 인정한다.

상속비율

동일 순위에 있는 자는 아래 법적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두 동일한 비율로 나눈다.

1. 배우자가 1순위자와 분할할 경우 머릿수에 따라 동일하게 나눈다.

2. 배우자가 2·3순위자와 분할할 경우, 배우자는 1/2을 받는다.

3. 배우자가 4순위자와 분할할 경우, 배우자는 2/3을 받는다.

*양자녀/부모는 혈연관계가 있는 직계존비속의 1/2이상을 받을 수 없다.

동일순위에 있는 자는 모두 동일한 비율로 나눈다.

 

 

 

 

 

 

 

 

 

 

동일 순위에 있는 자는 모두 동일한 비율로 나누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상속인의 상호간에 단결과 호조의 정신에 따라 각 피상속인의 재정상황과 사망자에 대한 부양의 정도에 따라 상속액을 증감할 수 있다.

 

 

 

 

한정승인 및 부채

상속인은 상속재산을 초과한 피상속인의 부채를 갚지 않을 수 있다.

상속인이나 유산을 접수한 국가기관은 실제 상속액 내에서만 피상속인의 부채를 책임진다.

상속인은 실제 상속액 한도 내에서만 피상속인의 개인 부채를 책임진다.

 

위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56년 초고는 그전에 존재하던 중화민국의 민법이나 1945년 소련 민법과도 미묘하게 상이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차이점들은 각각의 사회가 목표로 하는 체제의 모습이나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원칙을 드러내고 있다. 일단 상속인의 범위와 순위를 보면, 중화민국의 민법은 서구의 핵가족 모델을 이상으로 했기에 피상속인(사망자)의 배우자를 특수한 신분으로 대우한 반면, 그 부모는 2순위로 떨어뜨려 두었다. 그리고 대를 잇기 위한 양자제도(養子制度)를 봉건적으로 보았기에 1순위는 혈연관계가 있는 직계비속, 즉 친자녀와 ()손자녀만으로 한정하고, 양자녀는 혈연관계가 있는 직계존비속의 1/2이상을 받을 수 없도록 명시하였다.

 

한편,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노동소득의 유무에 따라 상속 순위를 달리하였다. 즉 인민이 합법적으로 가질 수 있는 소득은 노동을 통한 임금뿐이었기에, 노동능력이 없는 부모나 더부살이하던 친척이 상속에서도 제외될 경우, 그들은 곧바로 사회보장제도의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국가의 부담을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그런 노동소득이 없는 사람들을 배우자나 자녀들과 같은 1순위에 놓은 것이다.

 

1956년 초고는 중화인민공화국도 소련의 모델처럼 부모의 노동능력에 따라 순위를 달리하지만, 이것은 소련과는 전혀 다른 논리에서 근거하고 있었다. , 초고를 기초한 시화이비의 보고서에 의하면, 그와 연구팀의 초고 작성자들은 중국에서 젊은 아들이 늙은 부모를 봉양하는 현실을 무시한 채 부모를 2순위에 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시집간 딸의 유산이 친정 부모에게 가는 경우가 거의 없듯이, 결혼한 아들의 유산을 친부모가 무조건 상속하는 것은 남녀차별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딸의 친정부모나 아들의 친부모 등이 이미 결혼한 자녀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서는 그들이 정말 자식의 유산을 받아야 할 만큼 곤궁한 상황인지를 증명해야만 1순위에 놓아야 한다고 규정한 것이다. 그런 필요를 검토하지 않고 무조건 부모에게 유산을 준다면, 남은 아내나 자식들의 몫이 너무 작아진다는 우려였다. 1956년 초고 작성자들은 사회보장제도의 부담유무가 아니라, 중국 사회의 현실과 함께 남녀평등이라는 혁명의 아젠다를 함께 고려해 이 사이에 균형을 잡으려 노력한 것이다.

 

또 그들은 양자(養子)의 상속자 신분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접근하였다. 만약 양자가 단순히 대를 잇기 위한 존재라면, 그들을 상속인에 포함시키지 말아야 하겠지만,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았다. 당시, 딸들은 거의 주변 다른 마을로 시집가기에 아들 없는 부모들은 대개 조카들을 양자로 삼아 의지하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 만약 이들에게 중화민국의 상속법처럼 시집가 떠나버린 딸들 몫의 절반만 준다면, 많은 조카들이 양자노릇을 포기해서 오히려 아들 없는 부모의 이익에 상반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처럼 실제 부양의 정도를 살펴 조카들도 온전한 자식으로 대접해서 상속분을 주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1956년 상속법 초고 작성자들이 이처럼 현실과 반봉건의 이상 사이에 균형점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1951년 이상 북경과 허베이 지역에서 제기된 700여건의 상속분쟁을 실제로 분석하여 혁명의 원칙들과 실제 인민들의 삶의 조건들을 면밀히 검토해 이 사이에 조화를 찾으려 했던데 기인한다.

 

이들 초고 작성팀의 균형 감각은 상속 비율에서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중화민국의 상속법은 배우자를 중심으로 나머지 상속인들의 몫을 규정하지만, 원칙적으로는 같은 순위에 있는 상속인끼리 1/n으로 동일하게 나누게 하고 있다. 이처럼 동일 순위자간의 평균분배는 거의 황금률처럼 적용되어 소련의 민법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1956년 초고는 일견 이 원칙을 수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바로 덧붙인 문장에 의해 이를 전면적으로 부인한다. 즉 사망자에 대한 부양의 유무에 따라 상속인들 사이에 상속액을 달리 할 수 있다고 명시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사망자에 대한 부양의 정도에 따라 상속액을 증감할 수 있다라는 이 평범한 문구는 실은 결혼해 출가한 딸들도 아들처럼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가라는 근대 중국상속법상 최대논쟁거리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최종적인 결론이었다. 이 문제는 비단 공산당뿐만 아니라 1930년 중화민국 상속법 제정 당시에도 중화민국의 대법원과 민법전문가들이 마지막까지 대치한 부분이었다. 결국 서구식 근대화를 이루고자 했던 중화민국의 입법가들은 대법원의 판례를 뒤엎고 남녀평등의 대의에 따라 친자녀는 성별/결혼 유무에 관계없이 모두 동등분배라는 문구를 삽입하였다. 그러나 이 대의는 사회의 현실을 너무나 도외시하였기에 대도시 밖에서는 거의 실효성을 가지지 못했고, 실제 중국의 많은 아버지들은 사망 후 법에 따라 나누어질 유산이 아니라, 살아서 자기 뜻대로 줄 수 있는 증여라는 편법을 통해 아들들에게만 재산을 물려주었다.8

 

실제 이 결혼한 딸들의 상속권 여부에 대한 문제는 단순한 가부장제하의 남녀차별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실질적인 삶의 정황에 기반하고 있었다. , 중국에서는 대개 딸들은 동성혼(同姓婚)을 피해 주로 다른 마을로 시집가는 반면, 아들들은 고향 마을에 남아, 노동력을 상실한 부모님을 봉양하였고, 이 유산은 실제로는 이러한 봉양에 대한 댓가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과 늙은 부모의 입장에선 이미 다른 마을로 시집간 딸에게 집안의 토지나 가옥을 배분해 준다는 것은 관리상의 문제만 야기할 뿐 아니라, 공평하지도 않은 조치였던 것이다.

 

실제 토지균분과 함께 남녀평등을 혁명의 주요 아젠다로 내걸었던 중국 공산당이었지만, 결혼한 딸의 상속권을 단순히 남녀평등의 문제로만 접근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에 대한 접근은 지역마다 천차만별이었다. 실제로 허베이, 산둥, 허난의 접경 지역을 관할하던 지루예 행정처(冀魯豫行署)는 상속권은 남녀가 동등하게 지니지만, 딸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상속권을 포기한다면, 정부는 여기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다. 반면, 비교적 진보적인 상하이를 중심으로, 난징, 산둥, 저장, 장쑤, 푸지엔 지역까지 관할하던 화둥 군정위원회(華東軍政委員會)의 사법부는 단순히 복잡하고 분쟁이 날 수 있다는 우려로 결혼한 딸의 상속권을 부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관할 법원들에 시정 명령을 내린다. 둥 군정위원회에 의하면 만약 딸이 부모와 다른 촌에 살더라도, 불법만 아니라면, 물려받은 토지를 팔 수도 있고 남에게 소작을 줄 수도 있는 문제이지 딸들의 상속 자체를 근본적으로 막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런 혼란은 1953년에 발표된 시안을 중심으로 간쑤, 칭하이, 산시(陝西)성 등을 관할하던 서북행정처 사법부(西北司法府)의 새로운 원칙에 의해 정리되었다. 그 원칙은 상속과 부양을 하나의 대응 개념으로 정리하며 남녀 구별 없이 부모를 봉양한 이에게 유산을 분배해 준다는 것이었다. 언뜻 새로워 보이지 않지만, 이는 상속을 아들/딸의 문제가 아닌 권리-의무의 관계로 치환한 것이다. 즉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부모를 봉양하기 때문에 부모의 유산을 상속받는 것이기 때문에, 만약 딸이 봉양의 의무를 할 경우 그들도 당연히 유산 상속권을 주장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로써 이 시기 중국의 법원들은 남녀평등이라는 원칙을 지키면서도, 인민들의 삶의 맥락이 가지는 관행의 진정한 의미를 놓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1956년 초고에 등장한 사망자에 대한 부양의 정도에 따라 상속액을 증감할 수 있다라는 문구는 바로 이러한 원칙을 법제화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선 바로 이와 같이 혁명의 아젠다를 인민의 삶의 정황 속에서 재해석하고 균형을 잡으려는 공산당의 노력은 단순히 서구화를 모델로 했던 민국시대의 근대화와는 다른 결을 취하고 있고, 필자가 이 연재 글의 제목으로 삼은 혁명적 근대성은 바로 이러한 공산당의 시도를 잘 포착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중국의 사회 현실과 혁명의 아젠다를 결합시키려 했던, 혁명적 근대성을 잘 반영한 1956년 상속법 초고는 결국 법으로 제정되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필자가 천착한 문제는 과연 이러한 1956년 상속법 초고의 좌절이 단순히 19577월 개시된 반우파 투쟁으로 대표되는 중국혁명의 좌경화만의 결과인가라는 점이다. 실제로 마오쩌둥이 너무 많은 법률을 만들지 말라(不要搞那么多法)”고 지시하면서 상속법을 비롯한 민법제정의 모멘텀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또 시화이비가 주도했던 상속법 연구팀도 1957년에 해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화이비나 그의 팀멤버들, 나아가 전인대 상무위의 비서장으로 민법제정 전체를 총괄했던 펑전(彭真) 등 이와 관련된 누구도 이 상속법 초고와 관련되어 비판을 받거나 강등되지 않았다. 펑전은 공산당 정치국에 1966년까지 머물렀으며 문화대혁명 초기 이를 주도했던 5인조 문화혁명 그룹의 리더로 임명되기도 했었다. 또 시화이비는 진급을 거듭해 1964년에는 윈난성(云南省)의 부성장으로까지 승진하였다. 이들이 당으로부터 처벌을 받은 것은 모두 문화대혁명이 가속화된 1966년 후반기에 와서였다.

 

실제 필자가 분석한 전인대 상무위과 허베이성 사법청이 이 초고를 놓고 협의한 문서는 이 56년 초고가 폐기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다른 세력에 대한 힌트를 준다. 바로, 현장에서 법을 해석하고 판결해야 할 일선 인민법원의 판사들이었다. 초고가 각 성 사법청에 보내져 일선 판사들이 회람한 후, 허베이 성 판사들의 의견을 전인대 상무위에 개진한 허베이성 사법청은 이 초고가 가진 두 가지 문제를 집중적으로 지적한다. 첫 번째는 노동력을 가진 부모의 2순위에 대한 문제였다. 사법청의 지적에 따르면, 모두가 동의하듯이 유산은 늙은 부모에 대한 부양을 전제로 하는데, 비록 아들이 사망한 현재 부모가 노동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언젠가는 부양이 필요한 것이 명확한 만큼 현재의 노동력 유무로 그들의 상속권을 박탈하는 게 과연 공평한가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문제는 사망자의 부채를 유산의 실제 가치한도 내에서만 책임지고, 초과분은 면제해 준다는 규정이었다. 초고 작성팀은 중국의 고리채가 대를 이어 인민을 착취한다는 관점에서, 중화민국 민법이나 소련 민법과 마찬가지로 한정승인(限定承認)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일선 판사들의 입장에선, 현실에서 채무는 주로 춘궁기때 가장(家長)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혹은 농사에 필요한 씨앗이나 도구를 마련하기 위해 빌리는 것이었고, 이 채무를 단순히 가장의 명의로 빌린다고 해서 마치 가장의 개인채무로 삼아 면제해 준다면, 과연 누가 도움이 필요한 가정에 돈이나 양식을 빌려주겠냐는 것이었다. 이처럼, 현장 실무자들인 일선 판사들은 이 1956년 초고에 반대하였다. 한정승인이라는 근대 상속법의 대원칙과 부모의 부채로 자녀들을 압박하는 고리대업을 금지시키겠다는 순수한 의도가 실제로는 농촌의 신용 채권시장의 붕괴를 가져올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허베이성 사법청의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일선 판사의 비판적인 목소리를 담고 있다. “우리는 인민법원의 판사들이기에 인민의 실생활을 판결에 반영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결국은 판사입니다. 만약 법조문이 명확하게 어떤 지시를 내리면 그것이 실생활의 내용과 배치되더라도 법조문을 따라 판결해야만 합니다.” 즉 일선 판사들은 1956년 초고가 아직은 그대로 적용하기엔 여전히 인민의 실생활과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한계를 지닌 초고를 법제화해버리면 그들의 판결은 인민의 삶과 유리될 수밖에 없다고 반발한 것이다.

 

실제 시화이비가 1957년에 출판한 상속법에 대한 보고서는 바로 그러한 한계를 가감 없이 토로하고 있다. 그의 보고서는 상속법의 필요에 대해서 역설하면서도, 아직 자신과 초고작성 팀이 부채나 부모의 순위, 심지어는 아내가 죽은 데릴사위가 처가의 유산에 대한 상속권을 갖는지, 혹은 반대로 남편이 죽은 며느리가 시부모의 유산에 대한 상속권을 지니는지 등과 같은 문제에 더 많은 연구(进一步的研究)”가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있다. 심지어, 자신은 자신의 팀이 내린 결론과 다르게 개인적으로는(个人认为) 부모가 노동능력 여부와 관계없이 1순위 상속자여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진술한다. 결국 1956년 초고는 이미 중국사회의 현실과 혁명의 이상이 가지는 간극을 상당히 메웠다고는 하지만, 아직 법률로서 강제성을 지니기에는 여전히 여러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한계가 이 초고가 결국 법으로 제정되는데 실패한 한 중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1956년 중국 상속법 초고 작성과 법제화 실패를 둘러싼 논의들은 중국혁명 당시 기술관료와 농촌 출신 혁명가들간의 노선투쟁, 혁명의 좌경화와 같은 거대 담론만으로 분석할 수 없는 일상적인 국가 기구들의 활동과 이들의 활동 방향을 발견하게 한다. 이 상속법 초고를 주도했던 시화이비는 기술관료도 법 전공자도 아닌, 게릴라 출신의 혁명가로 베이징시의 민정국(民政局)에서 식량공급, 아편/매춘 단속, 노사갈등 관리 등의 업무를 관할하던 실무관료였다. 당시 베이징시 시장과 전인대 상무위 비서장을 겸하던 펑전은 혁명의 대의만큼이나 현장의 난해함을 이해하는 그에게 상속법 제정이라는 임무를 맡긴 것이다.

 

이처럼, 상속법을 비롯한 민법제정 전체를 기획한 펑전, 실무자였던 시화이비와 그의 팀은 혁명가이자 실무적 기술관료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추구했던 중화인민공화국의 상속법은 남녀평등과 같은 혁명의 이념을 인민의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는 매개물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발휘한 혁명적 근대성에도 불구하고, 1956년 초고는 바로 그 지점에서 아직은 미완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미완성의 빈틈은 바로 법률분야에서 현장의 실무자들인 일선 판사들이 메워야 할 부분이었다. 이 연재의 마지막 호가 될 다음 글은 바로 이 현급 법원의 일선 판사들이 어떻게 그 간극들을 메우며 펑전과 시화이비의 이상을 실현시켰는지, 그리고 그러한 결과물이 1986년에 제정된 중화인민공화국의 상속법에 녹아드는지 살펴볼 것이다.  


안병일 _ 미국 새기노밸리주립대 역사학부 교수


                                                                  

해당 글은 중국학술원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1)이는 필자가 Modern China 47 no.1 (2021)에 발표한 “Searching for Fairness in Revolutionary China: Inheritance Disputes in Maoist Courts and Their Legacy in the PRC Law of Succession”을 요약 정리한 글이다.

2)당시 중국은 민사소송법이 제정되어 있지 않아, 소송당사자는 거의 무한대로 항소를 제기할 수 있었고 이를 막을 법적 근거가 없던 법원들은 이러한 항소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필자가 언급한 사례는 1973년에 처음 재판이 시작되어 4번의 항소를 통해 1976년에야 마무리되었다 (华东政法学院 法学编辑部, 法律顾问. 上海: 华东政法学院, 1983: 12122).

3)필자가 아는 유일한 관련 연구로는 李秀清中国移植苏联民法模式考가 있다. 그는 이 상속법 초고를 1945년 소련 민법의 영향을 받은 결과물로 보았다. 李秀清, “中国移植苏联民法模式考,” 中国社会科学 5(2002): 12541.

4)史怀璧, 略论我国继承制度的几个基本问题 (北京: 法律出版社, 1957).

5)Jinlin Xia, The Civil Code of the Republic of China (Shanghai: Kelly & Walsh, 1930).

6)Vladimir Gsovski, Soviet Civil Law: Private Rights and Their Background under the Soviet Regime (Ann Arbor: Univ. of Michigan Law School, 1949), 217-35.

7)中华人民共和国继承法(草稿) (1956), 河北省档案馆 1051-1-171.

8)민국시대 결혼한 딸의 유산 상속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Kathryn BernhardtWomen and Property in China, 9601949 (Stanford, CA: Stanford Univ. Press)134-138152-153 참조.


**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과 표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필자 촬영
표: 필자 작성
프린트 복사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