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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시사&테마
8월호
중국공산당 창당 95주년 _ 박승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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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이 7월로 창당 95주년을 맞았다. 원래 창당기념일은 중국공산당 제1차 당대회가 열렸던 1921723일이지만, 19385월 마오쩌둥(毛澤東)의 제의에 따라 제1차 당대회가 열린 달의 첫째 날인 71일을 창당기념일로 결정했다

 

사진 1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창당 95주년 대회

건국95주년.jpg

 

중국공산당 집계에 따르면 2014년 말 현재 당원 수는 87793000명으로, 전년에 비해 1107000명이 증가했다. 남성 당원과 여성 당원의 비례는 13 정도로, 여성 당원의 숫자가 전체의 24.7%에 해당하는 21672000명이다. 학력은 대졸 이상이 43%, 37755000명이 전문대학 이상의 학력 소지자들이다. 직업별로는 노동자가 7342000, 기술자가 12532000, 국유기업과 민간기업 경영인이 9016000명이고, 당정 기관 관료가 7397000, 학생이 2247000, 기타 직업 종사자 7105000, 은퇴자들이 16216000명이다.

 

중국공산당은 지난 38년간의 개혁개방에 따른 빠른 경제발전 과정에서 이미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옷을 벗어버렸다. 그 이론적 배경은 장쩌민(江澤民) 전 당 총서기가 20002월에 제시한 ‘3개 대표이론이었다. 당시 장쩌민 총서기는 중국공산당이 전 인민의 대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제시하여, ‘중국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정당이라는 이론적 기초를 제거하고 전 인민의 대표라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는 덩샤오핑(鄧小平)197812월 개혁개방에 착수하면서 누구든 먼저 부자가 되라”선부론(先富論)’에 따라 부자와 기업인들을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받아들였던 결과였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중국공산당의 존재 근거가 얇아지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2016년 현재 9000만 명이 넘는 당원수를 자랑하는 중국공산당이지만 95년 전 상하이(上海)에서 열린 제1차 당대회에 참석한 대표들의 숫자는 12명이었고, 전국의 당원 숫자는 50여명에 불과했다. 당시 마오쩌둥은 창사(長沙) 대표로, 12명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1차 당대회가 열린 곳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의 한 건물로, 현재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물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다. 1차 당대회를 개최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은 베이징(北京) 대표 천두슈(陳獨秀)와 광저우(廣州) 대표 리다자오(李大釗)였으나 참석하지 못했다.

 

1921년에 창당된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의 내전과 항일(抗日)전쟁을 치루고 승리자가 되어 194910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수립을 주도했다. 이후 19769월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이라는 소용돌이를 거치면서 사회주의 계획경제 체제를 확립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영국의 철강 생산량을 3년 이내에 따라잡겠다는 등의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을 잇달아 시행하고, 문화대혁명이라는 이름의 정치 투쟁을 10년 가까이 계속한 끝에 마오가 사망할 당시에 중국경제는 세계 최빈국의 나락으로 떨어져있었다.

 

마오의 사망으로 권력을 장악한 덩샤오핑(鄧小平)은 중국공산당 정치국 연설을 통해 사상해방(思想解放)’실사구시(實事求是)’로 개혁개방 시대의 정책을 펴나갈 것을 강조함으로써 마오쩌둥 시대의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틀에서 벗어나 사회주의에 자본주의를 접목한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개혁개방 38년 만에 이루어진 빠른 경제발전의 결과 중국의 경제볼륨이 미국 다음가는 G2로 올라 선 가운데,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등장한 시진핑(習近平)201211월 선출되면서 두 개의 100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중국공산당이 창당된 1921년 이후 100년이 지난 2021년까지는 중산층이 충분히 확보된 전면적인 샤오캉(小康) 사회를 이루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1949년 이후 100년이 흐른 2049년까지는 중국이 과거 당()이나 청나라 초와 같은 세계 최강의 나라로 복귀한다는 내용의 야심찬 구호가 바로 '두 개의 100'이다.

 

중국공산당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11년 만인 19896월 천안문 광장에서 반부패와 민주화 요구를 내건 시민, 대학생들의 시위에 대해 군대를 동원하여 유혈 진압함으로써 민중의 해방자라는 공산당의 존립기반을 잃고 커다란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정치 민주화는 보류하고 경제의 민주화와 자유화라는 중국특유의 권위주의라 할 수 있는 신 권위주의를 내세워 위기를 극복하고, 오로지 경제발전 일변도 정책 추구를 통해 G2로 올라서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1989년의 천안문 사태로 인민해방군을 동원하여 인민의 불만 표시를 유혈 진압한 과거를 남겨 아직도 그 그늘이 남아있는 상태다.

 

현재 중국공산당은 내년 가을의 제19차 전당대회를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전당대회를 할 때마다 새로 선출되는 중앙위원회 위원들과 정치국 상무위원, 당 총서기의 임기는 5년이고, 중국공산당은 대체로 1921년 창당 이후 5년마다 한 차례씩 전당대회를 개최해왔다. 5년마다 개최되는 전당대회를 중국공산당은 과연 언제까지 개최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중국공산당의 수명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인터넷 블로그에는 최근 다음과 같은 글이 올라와 주목을 받고 있다.

 

중국공산당의 수명은 대체 얼마나 되는 것일까.”

 

중국공산당의 수명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우선 윤회(輪回)하는 문제를 남기지 않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경제 방면에서 중국의 개인재산은 국가전체의 자산의 크기를 넘어설 수 없게 되어 있다. 중국공산당이 에너지와 자원, 그리고 세수(稅收)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들이 당의 권력을 뺏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둘째는 사회주의적 정치제도 방면에서 현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5년 또는 10년마다 규칙적으로 정권교체를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당교(黨校)를 통해 인재와 후계자를 양성하고 있고, 자신을 대신할 다음의 정치 지도자를 양성하는 과정을 철저히 준수하고 있다. 이런 요소들이 중국공산당에서 체계화 되어가고 있는 점은 바로 중국공산당의 수명을 확장하는 데 커다란 플러스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은 왕조의 흥망성쇠를 반복해온 전통을 가지고 있다. (), (), (), (), (), (), () 왕조가 그랬듯이 발전기와 쇠락기를 거쳐 왕조의 붕괴에 직면했던 것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해왔다. 거기에다가 중국공산당 지도부에게 최대의 난제인 소수민족 문제는 경제적인 빈부의 격차라는 문제와 겹쳐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존립 근거까지 흔들어 놓는 문제로 확대되고 있는 중이다. 시진핑이 두 개의 100년을 통해 2050년의 중국에 대한 그림을 그렸고, 덩샤오핑은 1980년대에 중국공산당 100년 부동요(不動搖)’를 주문해서 2080년까지도 중국사회를 중국공산당이 리드할 것을 요구했다. 어떨까, 중국공산당의 수명이 거기까지만 일까.

 

박승준 _ 인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 중국학술원 연구위원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http://politics.people.com.cn/n1/2016/0701/c1024-2851724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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