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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현장&공간
2월호
연구성과 소개 _ 김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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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현, 「상인과 민간신앙: 수운의 안전과 금룡사대왕묘」, 『중앙사론』 제46집, 2018.01, 539-588쪽.


민간신앙은 불안한 생존여건 하에서 초자연적인 존재나 역사적 실존인물을 신격화해 숭배함으로써, 인간의 심리적 안정과 신령의 보호를 꾀한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또한 민간신앙은 각종 제례의식을 통해 촌락공동체 내부의 결속력을 강화하거나, 혹은 종교행사와 상업교역을 결합함으로써 도시문화 형성에도 일조한 측면이 있다.

 

남송시기 절강성 회계의 사대부 사서(謝緖)가 망국의 한을 품고 항주의 금룡산(金龍山)에서 숨어 살고 있었다. 원나라 병사들이 공격해오자 강에 투신자살했는데, 이후 인귀가 된 사서가 명 태조 주원장을 도와 원나라 군사를 물리침으로써 금룡사대왕(金龍四大王)’이란 칭호가 부여되었다. 옛 문헌기록에 따르면, ‘금룡사대왕이란 칭호의 유래는 사서가 은거한 지역이 금룡산이고, 또한 사서가 형제들 중 넷째라는 점이 반영된 것이다. 백성을 위해 수재를 예방하고 물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여러 신들 중 가장 영험했다고 한다. 사대왕은 항상 금색의 작은 뱀의 형상으로 나타나며, 중국의 북방지역에서 강과 하천 및 대운하를 운항하는 뱃사람들이나 상인들이 주로 숭배했다고 한다.

 

금룡사대왕 신앙은 명대 국가의 조운정책의 영향으로 16세기부터 하천을 관리하는 관료들이 운하와 황하의 신으로 숭배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일반민들 특히 수로를 이용하는 운수노동자나 상인들이 항행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숭배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청대 예제의 규정에 따르면 신령에 대한 봉호 글자수는 최대 40글자를 넘길 수가 없는데, 1879년에 석우라는 두 글자가 추가됨으로써 봉호의 글자수가 44자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시의 상황이 반영된 결과인데, 1876~1877년 화북지역에서 발생한 가뭄으로 약 천만 명이 굶어죽자, 물과 관련 있는 금룡사대왕의 가호를 바라는 국가적 기원을 담아 사대왕에 대한 파격적인 봉호수여가 이루어진 것이다. 금룡사대왕 신앙 사례는 국가권력에 의해 형성되고, 그것이 아래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국가권력과 일반민의 상호작용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화북지역에서 형성된 금룡사대왕 신앙이 다른 지역으로 전파된 것은 산동성 제녕주 출신 상인의 역할이 컸다. 제녕 상인은 주로 대운하를 이용해 강남지역에 위치한 주요 상업도시에서 상업활동에 종사했다. 이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숭배하는 금룡사대왕 신앙을 강남지역에 이식했는데, 제녕 상인들은 금룡사대왕 사묘 건립을 통해 수로의 안전과 상업의 번영을 기원했을 뿐만 아니라, 사묘를 상인회관으로 활용함으로써 같은 고향 출신 상인들의 유대감 형성과 결속력을 다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금룡사대왕 신앙의 성격이 조운의 신, 황하의 신에서 행업의 신으로 변화하기도 했다. 이후 금룡사대왕 신앙은 주요 수로의 연변에 위치한 상업도시에 들어온 외지 상인들이 사묘를 건립함으로써 신앙의 전파가 이루어졌지만, 중국 전역에서 숭배된 것은 아니었다. 주로 산동성, 하남성, 강소성, 안휘성 등지의 주요 하천유역-대운하, 양자강, 회하, 황하-의 상업도시에서만 숭배되었는데, 금룡사대왕 신앙의 성격은 조운신, 황하신-넓게 보면 하천의 신, 그리고 행업신 등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아울러 금룡사대왕은 일부 지역에서는 수재예방을 위한 목적에서도 숭배되기도 했다.

 

금룡사대왕 신앙은 국가권력에 의해 국가제사-봄과 가을에 제사-에 편입됨으로써, 해당 신앙의 수용과 전파가 보다 용이해졌지만, 이것이 민간에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상인의 현실적인 기대가 컸기 때문이었다. 한편 금룡사대왕 신앙의 형성과 전파가 위로부터 아래로 향했다는 점에서 국가권력과 상인의 상호작용을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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