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1949년 3월 25일,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중앙지도부는 국공내전 후반기의 지휘부 소재지였던 산시성(山西省) 시바이포(西柏坡)를 떠나 베이징(당시 ‘베이핑’)으로 이동했다. 1948년 가을부터 1949년 겨울에 걸쳐 전개된 이른바 ‘3대 전역(戰役)’에서 승리함으로써 중국공산당의 승리는 이미 명약관화해진 상황이었다. 전국 통일과 중앙정부 수립을 눈앞에 두면서,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은 늦어도 1948년 말에는 베이징을 ‘신중국’의 수도로 내정하였고, 1949년 1월 21일에 베이징을 접수한 뒤, 마침내 3월에 지도부가 베이징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러나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곧바로 베이징 성내로 진입한 것은 아니었다. 베이징 접수 초기의 사회질서 불안정, 치안 문제 등으로 인하여, 마오쩌둥과 지도부는 서쪽 교외에 있는 샹산(香山)에 지휘부를 설립하였고, 이곳에서 약 6개월간 생활하며 업무를 보았다. 쐉칭별서(雙淸別墅)는 바로 이 기간에 마오쩌둥이 머물렀던 곳이며, 현재 샹산공원 내부에 자리하고 있다.
그림 1. 쐉칭별서 입구의 표지석
그림 2. 쐉칭별서 입구(동문)
그림 3. 쐉칭별서 내부 도면
그림 4. 쐉칭별서 내 정자(紅亭)
이곳에는 원래 청(淸) 건륭 연간(1745)에 만들어진 ‘송오운장(松塢雲莊)’이라는 장원이 있었는데, 내부에 맑은 연못 두 개가 있어서 건륭제가 직접 ‘쐉칭(雙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후 2차 아편전쟁과 의화단 운동 당시에 두 차례에 걸쳐 파괴되었는데, 1917년에 슝시링(熊希齡)이 이곳에 개인 별장을 짓고, 이름을 ‘쐉칭별서’로 지었다고 한다.
마오쩌둥과 중공 지도부는 1949년 3월 말부터 9월까지 이곳을 지휘부로 삼아 중화인민공화국 건설에 이르는 일련의 준비 작업을 진행하였다. 4월 초의 ‘도강전역(渡江戰役)’을 성공적으로 지휘함으로써 창쟝(長江)을 건너 중국 남부로 진군하여 중국의 군사적 통일을 이끌었고, 9월에는 신정치협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중국의 정치적 통일을 달성하였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의 수립에 이르는 일련의 준비 과정이 바로 샹산을 거점으로 진행되었고, 쐉칭별서는 그 안에서도 핵심이 되는 공간이었다.
그림 5. 쐉칭별서 내 마오쩌둥의 생활 및 업무 공간
그림 6. 내부 회의실 모습
그림 7. 마오쩌둥 활동 진열관
그림 8. 마오쩌둥의 친필 원고(진열관 전시)
그림 9. 쐉칭별서 내 방공호
그림 10. 방공호 내부 모습
중화인민공화국의 설립과 함께 마오쩌둥과 중앙지도부도 베이징 성내로 옮겨 중난하이(中南海)에 자리 잡았다. 이후 쐉칭별서는 역사의 중심 무대에 다시 오르지는 못했다. 겨울이기는 했지만, 필자가 2013년 초에 이곳을 답사했을 때만 해도 관람객 하나 없는 매우 한적한 곳이었다. 덕분에 마음껏 돌아다니며 자세히 살펴보고, 배경에 사람이 안 나오는 사진도 여러 장 건질 수 있어서 좋았지만, 역사적 장소로서의 중요성에 비하여 사람들의 관심이 너무 적은 듯하여 아쉬운 마음도 남는다.
【이미지 중국 7】
이원준 _ 인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 이 글에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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