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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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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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오는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매우 독특한 땅이다. 우리에게는 홍콩처럼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갈 수 있는 여행지이지만, 또 그곳에 갈라치면 ‘뭐 볼게 있나?’하는 마음이 들어 쉽게 갈 수 없게 되는 곳이다.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만만한 곳은 아니기 때문에 그곳에 가서야 그 진면목을 알게 되는 것이다.
마카오는 지난 199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에 귀속되었지만, 1557년부터 적어도 4세기 이상의 기간 동안에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남아 있었다. 어찌 보면 유럽의 항해 시대의 산물인 셈인데, 그런 까닭에 이후 이곳에는 중국문화와 포르투갈 문화가 공존하면서 독특한 역사가 생성되어 왔다. 사실 마카오는 중국본부와 멀리 떨어진 광동성의 동남부 해안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중원문화의 영향은 그리 크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변방이라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동남부 해양문화 혹은 동남아문화의 특성이 강한 곳이기도 하다.
마카오 기행은 2012년 2월에 한나절 정도 진행되었다. 당시 중국사전공자 위주로 구성된 우리팀의 목표는 마카오보다는 광동지역의 역사 유적을 답사하려는데 있었기 때문에 실상 마카오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정도의 여행지였다. 광동지역을 오랫동안 연구한 필자 자신이 아직까지 광동지역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던 아쉬움이 컸던 것도 이 답사에 참여한 중요 이유이기도 하였다. 그러니 그간 보고 싶었던 역사유적을 집중적으로 다니려고 하는 마음이 앞섰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하지만 사소한 곳이라고 해도 주의해서 보면 유적도 적지 않거니와 그 의미 또한 독특하였다. 이 중에서 소개하고픈 것이 마조각(媽祖閣)이다.
사진 1 마각묘 안에 봉안된 천후의 신상
마조각이란 마조(媽祖)를 모신 사당을 의미한다. 현지에 세워져있는 안내판에는 마각묘(媽閣廟)로 쓰여 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의 한 부분이다. 현지의 안내원에게 들으니, 마카오는 마각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곧 마카오의 상징인 셈이다. 이 한 가지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본전을 뽑고도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마카오와 이웃해 있는 ‘홍콩’은 분명하게 중국어라는 점을 알 수 있으나, ‘마카오’는 포르투갈어인지 중국어와 포르투갈의 혼합어인지 애매했기 때문이다.
이 사당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은 천후궁(天后宮)이다. 이는 청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한 봉호이자 건물명이기도 하다. 마카오 사람들은 천후궁보다 마조묘 혹은 마각묘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관제(官製)의 엄숙하고 딱딱한 명칭보다 오랫동안 친숙하게 사용하던 이름을 선호하는 셈이다. 마조란 복건어로서 할머니를 뜻하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마조의 사당은 광동성과 복건성에 가장 많으며, 원래 광동성 광주부 향산현(오늘날의 중산시)의 일부였던 마카오에도 오래전부터 이 사당이 세워졌다고 한다.
사진 2 마카오의 상징인 마각묘 전경.
나지막한 산이지만, 바로 앞에 항구가 있으므로 묘가 자리 잡기 좋은 위치라고 할 수 있다. 여전히 많은 마카오사람들이 이곳에 숭배차 들를 정도로 마조신앙은 중국의 항구에서 오랫동안 숭배되어 왔다.
이 마조각은 <안내문>에 따르면 명나라 홍치 원년(1488년) 혹은 만력 33년(1605)에 세워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이미 복건의 상인들이 이곳에 왔던 성화연간(1465-1487) 혹은 천순 2년(1458)에 창립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여하튼 마카오에서는 가장 오래된 마조 사당이다. 마조 사당이 대체로 원대와 명대에 많이 세워진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 사당도 그 초기의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 위치는 마카오 반도 서쪽 끝의 내항 입구이다. 뒤로는 낮은 산이 있고, 앞으로는 좁은 바다가 펼쳐져 있는 곳으로 전통시대에 포구가 자리하기에 좋은 위치이다.
건물 배치는 중국의 전통적인 사당 형식으로 정문, 패방, 정전, 홍인전, 관음각, 정림선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들의 성격이 각각 유교적, 도교적, 그리고 불교적 특성을 드러내고 있으므로 마조각은 그 점에서 전형적인 삼교합일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건물들은 산 사면 아래쪽에 낮게 지어졌기 때문에 웅장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연 속에 묻혀 있는 느낌을 준다. 북경이나 남경과 같은 대도시의 사당들의 크기가 어마어마한 것과 비교되었다.
이제 우리에게도 조금씩 알려진 마조는 본래 송나라 때에 복건성의 미주(湄洲)라는 섬에서 태어난 역사적 인물이 신으로 승격된 전형적인 사례이다. 중국의 민간 사회에서는 대체로 그 지역사회에 공을 세운 인물이 사망하면 신으로 승격시켜 공동체의 수호신으로 삼는 관행이 오랫동안 지켜져 왔기 때문이다.
사진 3 천후성모사적도(天后聖母事跡圖).
조운선이 난파당하기 직전에 마조가 등장하여 파도를 가라앉히고 이들을 무사히 항구에 도착하도록 도와주었다는 민간설화를 그린 그림이다. 청나라 때에 그린 시리즈물 중의 한 장면이다.
임묵랑이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불성(佛性)을 타고 났기 때문에 살아생전에 구름을 타고 바다를 건너는 초인적 영력을 가지고 지역민들을 재난과 불행으로부터 구해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선원들에게는 바다의 신으로, 상인들에게는 재물의 신으로, 또 수군에게는 전쟁의 신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예컨대 원왕조는 동남아에 대한 해상 원정 시 그녀의 보호를 받기 위해 마조를 ‘천비(天妃)’로 승격시켰다. 쿠빌라이 시대의 일이다. 민간신이 국가의 신으로 변신한 셈이지만 이러한 종류의 조치는 이미 송대에도 이루어졌다. 12세기 항주로 천도한 남송대에 송왕조가 남부의 안전을 위해 영혜부인(靈惠夫人)으로 봉하였던 것이다. 청의 순치 때에는 천상성모(天上聖母)로, 건륭제 때에는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천후(天后)로 봉하였다. 말하자면 여성신에게 최고의 신격을 부여한 것이다. 청조의 이런 조치는 광동 연안에서 활동하던 해적들을 제압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러한 역사적인 과정을 보면 임묵랑이라는 해양 세계의 한 여성이 마조 → 영해부인 → 천비 → 천상성모 → 천후로 승격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복건지역의 연안무역상인들이 숭배하였던 해신으로 그 성격을 강화하였고, 이 때문에 포구가 있는 곳곳에 그의 사당이 세워졌다. 조선왕조 시대에 청나라 선원들이 자주 왕래하였던 인천에도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카오에 가게 되면 마카오의 어원이자 그곳의 상징이 되는 마조각에 꼭 가보기를 권한다. 아직도 마카오의 중국인들은 마조의 탄신일인 음력 3월 23일에 대대적으로 축제를 거행할 만큼 오랫동안 최고신으로 숭배하여 왔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중국의 사당이나 절의 분위기가 우리나라의 그것과 사뭇 달라 좀 꺼리기도 한다. 특히 강한 향불도 그렇거니와 건물 배치도 우리와 달라 아름답거나 자연스럽기보다는 인위적이고 갑갑할 정도로 촘촘히 세워져 있다. 낯선 신상(神像)도 다가가기에 쉽지 않다.
그래도 가서 보면 그곳의 사물과 문화를 이해를 하는데 훨씬 유익하다. 그래야 우리의 문물이나 문화, 그리고 역사도 좀 더 객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해외여행을 하고 난 뒤 느끼는 소회는 항시 우리가 그간 좁은 우리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갇혀 살아왔구나 하는 것이다.
【현장에서 마주친 관행 6】
유장근 _ 경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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