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한국인들 사이에서 중국의 태산은 매우 오랫동안 중국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왔다. 얼마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으면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와 같은 시조로 표현했을까 싶다. 하지만 그 태산은 1,532미터의 높이이므로 외형상 높다거나 웅장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산이다. 물론 이 태산이 반드시 산동의 그것을 지칭하기보다 그저 높은 산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중국에 있는 태산으로 보는 편이 더 그럴듯하다. 중화주의에 기울어져 있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공자가 태어난 언저리에 있는 태산이 세계에서 높고 고귀할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직접 태산을 가보고 그곳에 대해 기행문을 남긴 것은 그리 오래전의 일은 아니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들이 이 산에 올랐었던가에 대한 여부는 잘 알 수 없지만, 태산 등산은 적어도 한중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에서야 비로소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등산을 통해서 보다 오히려 몇몇의 책들, 특히 태산에서 태동하여 발전한 종교를 다룬 책에서 태산의 진면목을 먼저 알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태산은 오랫동안 축적되어온 중국의 종교전시장과 같은 곳이었고 만신을 만날 수도 있는 곳이었으며, 따라서 중국사회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사진 1 남천문쪽에서 바라본 태산.
커다란 암반과 그 사이에 자란 소나무가 인상적이었다.
이처럼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 이 산을 볼 기회가 2011년 가을에 찾아왔다. 산동대학에서 주최한 학술회의의 말미에 북경에서 유학중인 작은 아들과 함께 태산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몇 해 전에도 부자가 중국을 함께 여행하였으니, 중국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여행만큼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또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으니, 더 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었다.
태산을 끼고 있는 도시는 산동성의 중심부에 위치한 태안시인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태산은 거대한 바위 덩어리에 군데군데에 나무가 자라난 형상이었다. 외형상 여느 산과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구나 태산 주위에는 이처럼 높이 솟아오른 산은 사실상 없다. 북경 부근의 산들은 좀 자잘한 모습들이고, 태산 주위의 사방을 이처럼 하늘을 찌를 듯이 빼어난 산은 없으니, 그 웅장함으로도 태산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하다고 생각하였다. 단순히 높이만으로 그 명성을 따질 수 있는 산은 아니었던 것이다.
사진 2 벽하사에 모셔진 벽하원군.
특히 태산은 공자가 이 산에 올라 오나라를 바라보았다는 사실로 인해 중화권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공자가 태어난 곡부가 이 부근에 있는 까닭에 태산은 말하자면 오랫동안 유교의 본향으로서 노나라 문화권의 상징물이기도 한 셈이었다. 게다가 유네스코가 1987년에 이곳을 자연과 인문적 요소가 복합된 세계유산으로 지정함으로써, 그 성가는 더더욱 높아졌다. 고대로부터 쌓여온 문화가 산의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으려니와, 용암이 기왕의 바위를 뚫고 솟아오른 형태의 바위나 자연의 역사를 보여주는 지형들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자연사의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한 요소들 때문에 태산은 고대부터 성스러운 산으로 인식되었다. 고대의 진 제국 이전에 이미 서쪽의 화산, 북쪽의 숭산, 남쪽의 항산을 포함한 5악 중의 동악으로 상징되어 왔던 것이다. 진의 시황제가 통일제국을 건국한 뒤, 먼저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낸 곳도 바로 태산이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사기』의 「봉선서」에 따르면, 그는 이곳에서 자신이 천하에 둘도 없는 권력자라는 사실을 하늘과 땅에 고하였다. 불행히도 그의 자취를 산 정상에서 찾을 수는 없었지만, 시황제와 마찬가지로 불로장생을 추구하였던 한나라의 무제는 말 그대로 아무런 글자가 쓰여 있지 않은 무자비를 남겼다고 한다. 그보다 몇 백 년 뒤에 제위에 오른 당나라의 현종 역시 이곳에 올라 봉선의식을 거행하고 난 뒤 이 의식의 시말, 주목적, 선대 황제와 자신의 공적 따위가 실린 글을 거대한 마애석에 금색으로 새겨 놓았다. 그 역시 진시황이나 한무제처럼 이곳에서 절대적인 권력의 상징 뿐만 아니라 도교에 심취한 자취도 남겨 놓았던 것이다.
사진 3 공자묘내에 모셔진 공자상.
'인고유대'라는 편액은 건륭제가 써서 내린 것이다.
이런 연유가 쌓이면서 태산은 특별히 도교에서 숭배하는 산이 되었고, 그런 흔적은 예컨대 태산의 딸로 알려진 벽하원군을 모신 벽하사나, 도교에서 최고의 신으로 받드는 옥황상제를 모신 옥황묘, 신내림 바위, 공자묘 등에서 볼 수 있었다.
벽하사에 모셔진 벽하원군은 별칭이 태산낭낭이라고 부를 정도로 태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태산의 신들을 거느리고 인간의 선악을 관장하는 신으로써 도교의 여신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신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민간에서는 신통력이 더욱 확대되어 농경, 상업, 여행, 혼인, 치병, 자녀 생산과 양육 등 거의 모든 인간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로 숭배되면서 그의 사당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사진 4 태산의 정상부에 자리한 옥황묘와 신내림 바위.
당연히 공자묘도 이곳에 세워져 있다. 명나라 가정 연간에 세워진 이 사당으로 인해 태산은 유교적 특색을 내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산에서 공자는 정통 유교주의자라기 보다는 본전의 좌측에 관우를 모신 초재전이, 오른쪽에는 관음보살을 모신 관음전과 함께 있기 때문에 유불도 삼교를 절충하는 구도 속에 위치해 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태산의 정상에는 옥황상제의 신상을 모신 옥황묘가 있다. 그 앞에는 ‘신이 강림하는 바위’라고 알려진 바위 무더기가 마주하고 있어서 말하자면 신의 기운이 이 산에 가득하다는 느낌을 받도록 배치되어 있다. 옥황상제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송나라 진종 때(1012)라고 한다. ‘별 볼일 없는 가문’ 출신인 송왕조의 조씨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신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꿈에 옥황이 우리들에게 명하길..."로 시작하는 글 속에서 그 옥황이 자신들의 조상을 보낸 것으로 각색하였다는 것이다. 도교의 영향을 받은 후세인들은 그에게 면류관과 법복, 그리고 손에 옥홀을 들려주어 마치 진시황제와 같은 유형의 스타일처럼 꾸며 놓았다.
이처럼 태산에 대한 숭배와 그 관행은 고대부터 시작되어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졌고, 잠시 동안의 공백기를 거쳐 최근에 다시 부활하고 있었다. 공자의 사당 앞에는 많은 이들이 향을 사르면서 자신의 자녀들이 학문을 연마하여 세상에 나아갈 수 있기를 빌고 있었고, 벽하사에서나 옥황묘에서도 그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너무나 많은 향불과 연기로 인해 관람하는 것조차 방해를 받을 정도였다.
우리는 시간이 급해 케이블카를 타고 올랐지만,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고대의 황제나 노백성들이 그랬듯이 태산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남천문 쪽 돌계단을 하나하나씩 걸어서 올라오고 있었다. 등산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지팡이에 의지한 채, 공들여 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저것이 바로 중국인들이 오랫동안 행해왔던 수도의 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5 태산을 오르는 주통로인 남천문 돌계단.
수많은 중국인들이 수도하는 마음으로 이 계단을 오르고 있다.
【현장에서 마주친 관행 3】
유장근 _ 경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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