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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시사&테마
9월호
오삼계의 딜레마와 청대 서사시 <원원곡> _ 이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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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4

1644년은 중국사에서 특별한 연도이다. 무려 네 개의 왕조가 존재했다. 북경 자금성의 명, 동북의 신흥 강호 청, 섬서 이자성의 대순(大順), 사천 장헌충의 대서(大西)였다. 중원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거듭되었고 결국 최후의 승리자는 청이었다. 만주의 오랑캐청나라가 중원을 점령하다니. 한족 사대부들에게도, 조선의 군신들에게도 충격적인 현실이었다. 역사에는 우연이 없다지만 청의 북경 입성에는 돌발적인 일들이 몇 차례 벌어졌다. 그 중 가장 극적이고 결정적인 장면은 산해관 전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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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산해관(山海關, 하북성 진황도시 소재)


산해관 전투

16441월 서안에서 대순을 건국한 이자성은 동진하여 4월 북경을 함락시켰다. 자금성이 무너지자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후문으로 도망쳐 경산에서 자결했다. 숭정제가 목을 맨 나무는 지금도 있다. 277년 역사의 명나라가 멸망한 순간이다. 당시 영원총병 오삼계(吳三桂)는 병력을 이끌고 북경을 방어하기 위해 오던 길에 자금성의 함락과 숭정제의 사망 소식을 듣고 산해관으로 들어갔다. 오삼계는 영원성에서 청군과 대치하며 청의 세력을 방어하던 장수다. 이제 산해관이 중원 쟁패의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다. 산해관은 북경에서 동쪽으로 300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했는데 험한 산세와 바다를 접하고 있었고 성벽이 견고해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북경을 점령한 이자성의 다음 타겟은 산해관의 오삼계였고 혼란한 정국을 틈 타 중원 진출을 노리는 청으로서도 산해관을 정복해야 했다.


5월 이자성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산해관을 공격했다. 며칠간 격렬한 교전을 벌이며 승세가 이자성 쪽으로 기울어질 때 쯤 느닷없이 청나라 대군이 등장했다. 청군은 오삼계 측과 연합하여 이자성의 군대를 공격했다. 사전에 오삼계가 청에 투항한 것이다. 다시 승부의 추가 기울었다.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은 정예병사로 산해관의 지형에 익숙했고, 양측의 공방을 관망하며 치밀한 전략을 세운 터라 지친 이자성의 군대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부장 유종민(劉宗敏)이 중상을 입었고 사상자가 수만이었다. 이자성은 북경으로 퇴각하여 급히 황제 즉위식을 올린 후 다시 서안으로 도망쳤다. 북경에 있던 오삼계의 부친 오양이 이 와중에 처형당해 효수되었다. 결국 도르곤의 청군이 북경에 입성했고 10월 청은 수도를 심양에서 북경으로 옮겼다.

 

오삼계의 딜레마

청이 산해관을 넘어 중원을 차지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오삼계의 투항이었다. 명나라의 입장에서는 민족의 배신이고 청나라의 입장에서는 예기치 못한 행운이었다. 오삼계는 왜 그랬던 것일까?


산해관으로 들어간 오삼계는 혼란에 빠졌다. 조국은 멸망했고 숭정제도 죽었다. 충성의 대상이 사라지고 자립도 불가능한 고립무원의 상황이었다. 이자성과 청이라는 강력한 양대 세력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자신의 5만 병력으로 이들과 대적하기는 불가능했다.


이자성은 산해관을 공격하기에 앞서 오삼계를 회유했다. 북경에 있던 오삼계의 부친을 인질로 잡고 오삼계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편지와 은 사만 냥을 보냈다. 오씨 집안 수십 명 식솔들의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다. 그리고 대대로 명 황실의 신하였던 입장에서 자신의 주적이던 북방 오랑캐와 손잡는 일은 역사의 대역죄인이 되는 것이니 더욱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때 오삼계의 마음은 이자성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자성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도 있었다. 이자성의 세력은 북경에 입성하고 강압적인 태도로 명나라 신하들을 대했다. 항복한 신하들의 관직을 몰수하고 구금했으며 민가를 약탈하고 양민을 학살했다. 자신도 항복한 이후에 어떤 대접을 받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청에서도 자신을 포섭하려고 계속 의사를 타진해왔다. 얼마 전 청에 투항한 조대수(祖大壽)가 높은 직위와 경제적 이익을 보장받고 안정적인 삶을 영위한다는 것도 고려의 대상이었다. 조대수는 그의 외삼촌이었다.


결국 그는 청을 선택하고 도르곤의 손을 잡았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내린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그에게도 민족을 배신했다는 비난에 대응할 명분이 필요했다. 그것은 군왕과 부친에 대한 복수였다. 이자성의 군대는 기본적으로 왕조를 거역하고 일어난 농민반란군이다. 조국을 멸망시키고 천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또 자신의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부친을 잡아갔다. 복수를 위해 청의 힘을 빌린다는 것이다. 오삼계는 황제와 부친을 위한 복수라는 명분으로 부하들을 결속시켰다. 청의 도르곤은 그를 진정 큰 충효의 위인이라고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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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금전(金殿, 운남성 곤명시 소재) 내 진원원 상


미인 진원원

오삼계의 결심을 굳힌 계기로 알려진 중요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바로 그가 사랑한 진원원(陳圓圓)이라는 여성이다. 다음은 <갑신전신록(甲申傳信錄)>에 기록된 내용이다.

 

오삼계가 물었다. “우리 집에는 별 탈이 없는가?” 두 사람은 이자성의 군사들이 온 집을 샅샅이 뒤졌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의 부친께선 탈이 없으신가?”라고 물었더니 이자성의 군사들이 집을 뒤질 때에 잡아 가두셨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오삼계가 오랫동안 깊이 신음하다가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나의 그 사람은 탈이 없는가?’ 진원원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놈들이 빼앗아 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오삼계는 크게 노하여 눈을 부릅뜨고 소리치며 대장부가 여자 하나를 지키지 못한다면 무슨 낯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곧 말을 타고 산해관을 나가 목숨을 걸고 적과 싸우겠노라고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군의 관리들과 참모, 사졸들을 모두 불러 모아 황제와 부친을 위해 복수하겠다고 맹세했다.

 

<갑신전신록>은 명청 교체기 전사형(錢士馨, 생졸년 미상)라는 문인의 역사 기록이다. 전사형은 절강성 출신으로 이자성의 난 당시 북경에 있다가 당시의 변란을 모두 지켜보았고 훗날 각종 관련 기록을 수집해 이 때의 일을 역사로 남겼다.


오삼계는 자신의 집안과 부친이 곤욕을 당했다는 사실을 듣고도 참았다. 하지만 진원원의 납치 소식에 크게 노하여 이자성에게 복수를 맹세했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이 있다. 여성의 미색이 나라의 운명을 기울게 만든다는 말이다. 진원원이 그랬다. 오삼계는 이자성에게 투항하기로 마음을 굳혔다가 진원원을 뺐겼다는 사실에 분연히 청에 투항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한 명의 여성 때문에 역사가 바뀐 것이다.


진원원은 원래 소주 출신의 기녀였는데 북경에서 황실의 외척 전홍우(田弘遇)의 집에 의탁하고 있었다. 오삼계는 그녀의 뛰어난 미색을 보고 사랑에 빠졌다. 산해관으로 가면서 부친 오양의 집에 그녀를 맡겨 두었는데 변란이 일어나면서 이자성의 부장 유종민이 납치한 것이다. 이 사건은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켰다. <갑신전신록>은 개인의 기록이니 야사이고 이 기록에는 사실과 풍문이 섞여있을 것이다. 어쩌면 당시 사람들이 망국의 울분과 청조에 대한 원한을 오삼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싶은 심리가 작용했을 수도 있다. 1980년 중국 소설가 야오쉐인(姚雪垠)은 진원원이 허구의 인물이라고 했다. 하지만 오삼계는 소유욕과 경쟁심이 강한 갓 서른의 나이였고 역사에서 이런 상황은 얼마든지 있다. 오삼계와 진원원의 러브스토리는 명청교체사의 가장 중요한 장면으로 지금까지 널리 알려졌다. 후일담으로 오삼계는 청을 따라 북경으로 입성한 후 진원원을 다시 찾았고 운남, 귀주 일대를 통치할 때도 함께 갔다고 한다.

 

오위업의 <원원곡>

오삼계와 진원원의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로 굳어지는 데에 결정적 작용을 한 것은 오위업(吳偉業)의 장편서사시 <원원곡(圓圓曲)>이다. 이 시는 총 78549자의 칠언가행으로 청의 통치가 시작된 후인 1651년에 지어졌다.


이 작품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여인이 천하 대사를 어찌 알랴만 영웅은 넘치는 애정을 어쩌지 못했네(妻子豈應關大計, 英雄無奈是多情

곡하는 황제의 군사는 모두 소복을 입었는데, 머리끝까지 치솟은 분노는 홍안의 그녀 때문이었네(慟哭六軍俱縞素, 沖冠一怒爲紅顔)

 

이자성의 난으로 황제가 죽었는데 오삼계는 진원원을 빼앗긴 분노로 청에 투항했다는 내용이다. 오삼계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한 대목이 이 정도다. 너무나 완곡하고 우회적이다. 서사보다 서정에 치중하는 중국 고전시의 전통 때문일까? 이 작품도 전체적으로 진원원의 아름다움과 사랑, 기구한 운명에 대한 묘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진원원의 이야기를 쓰면서 오삼계의 매국 행위를 질타하지 않았고 그녀로 인해 청의 통치가 시작됐다는 사실에 통탄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이 작품의 주제에 대한 후인들의 평가는 엇갈린다. 혹자는 청이 통치 중이고 권력자 오삼계의 생전이니 이 정도면 현실을 비판했다고 하고, 혹자는 풍자가 모호하고 애정 찬미에 그쳤다고 했다. 명조 사대부 출신 오위업의 작품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로 인해 명청교체라는 역사적 격변 속에 오삼계의 치정극이 있었다는 인식이 후인들에게 굳어진 것도 사실이다. 청초 <우초신지(虞初新志)>에 실린 육차운(陸次雲)<원원전(圓圓傳)>에도 진원원 스토리의 근거는 오위업의 시라고 했다. 오삼계가 거금을 주며 이 시를 없애달라고 했는데 오위업이 거절했다는 말도 있다.



<원원곡>이 명작이 된 배경에는 청조에 출사했던 오위업의 인생 역정도 한몫했다. 오위업은 23세에 진사 급제한 이후 한림원 편수관을 비롯 명조 조정의 고관을 지냈으나 1653년 청조의 강압에 못이겨 국자감 좨주에 임명되었다. 숭정제의 사망 소식을 듣고 자결하려고 했던 만큼 새로운 정권에서 다시 벼슬길에 나가는 심경은 괴로웠을 것이다. 결국 그는 스스로 변절했다는 자괴감을 이기지 못하고 삼년 만에 사직했다. <청사열전(淸史列傳)>에는 <이신전(二臣傳)>에 기록되었다. 두 임금도 아니고 두 왕조를 섬긴 지식인이 되었다. 죽으며 자신의 묘비에 시인 오위업이라는 말만 적으라는 유언을 남겼으니 그의 고뇌를 짐작할 만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의 인생 역정은 산해관에서 고민하는 30대의 오삼계와 오버랩된다. 그가 <원원곡>을 완곡하고 유미한 서정의 서사시로 쓴 이유도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규일 _ 국민대학교 중국학부 교수


                                                           

해당 글은 중국학술원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1: 위키피디아 

사진2: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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