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19세기말, 현대일본의 지폐에도 등장하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국가목표였던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나라(일본:필자)는-(중략)-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해야 하며, 중국과 조선을 대하는 법도 이웃나라라고 해서 특별한 사정을 두지 말고 바로 서양인들이 그들 나라를 대하는 방식에 따라 처분해야 한다. 나쁜 친구와 친한 자는 함께 오명을 면할 수 없다. 나는 진심으로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를 사절하는 바이다.1)
그러나 1919년의 한국의 기미 독립선언에서는 일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중략)-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일본을 믿을 수 없다고 비난하는 게 아니다. 일본의 학자와 정치가들이-(중략)-우리의 오랜 사회와 민족의 심성을 무시한다고 해서, 일본의 의리 없음을 탓하지 않겠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기에도 바쁜 우리에게는 남을 원망할 여유가 없다.-(중략)-지금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지 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2)
그림 1. 돈 위의 사상가. 최근 다른 인물로 바뀜
20여년 사이의 차이가 있기는 했으나, 일제 강점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일본에 대한 원망보다는 보편적 가치와 자존이 더 핵심적 주제가 되었다. 일본의 멸시 대상이었던 한국에서 오히려 보편적 가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현재의 한/미/일 3국 관계에서도 일본의 아베정권이 취하는 행동을 보면, 후쿠자와 유키치의 부정적 유산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사실 일본에서 일부 지식인 집단을 제외하면 한국에 대한 인식이 정상적이었던 적이 언제 있었는지 모르겠다. 일본의 일반인들에게 한국의 역사문제에 대해서 물으면 아마도 ‘모르겠다.’ ‘들은 바 없다’라는 대답이 일반적 반응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의 저변에서 작동하는 것은 ‘종족주의’적 타자부정(특히 한/중)의 ‘일본 우월주의’일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인식과 태도는 교육이나 체험을 통해서 거의 변화될 수 없는 본질적 문제라는 점에서 매우 우려된다.
한일 관계의 서술이나 논의에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은 논의와 토론에서 실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고통이나 참혹함이었다. 한일회담이 그랬고, 소위 위안부 합의라는 것이 그랬다. 여기에는 한일 양국의 현실이 작동한다.
특히 최근 국내에도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일본 우익의 역사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상대를 용서함으로써 한일 양국이 화해와 공존의 장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 매우 비관적 생각을 갖게 한다.
미국의 점령통치 시대인 패전 직후부터 일본우익의 활동이 조직화되고 진화해온 역사와 그것을 비판하고, 견제해야 할 언론의 부재, 진보정치의 몰락의 가속화 등이 그러한 우려를 뒷받침한다. 특히 그중에서 주목되어 온 것 중의 하나가 <세이쵸노이에(生長の家)>라는 종교집단의 역할이었다. 다니구치 마사하루(谷口雅春1893~1985)가 1930년에 창설한 이 종교결사는 기관지 역할을 했던 『생장의 집』의 발간과 “그 잡지를 읽으면 병이 낫는다”는 식의 논리를 퍼뜨리고 교주가 집필한 『생명의 실상』의 구매를 선전하여 그 지지기반을 확대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다. 마사하루는 이러한 성공을 기반으로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를 주창하기 시작했고, 1944년 7월에는 “대일본은 신국이다. 천황은 절대자이다. 절대자의 나라는 절대로 승리한다는 황국신민의 신념”을 라디오로 방송하는 등 일본 극우의 논리를 천명했다. 이러한 전쟁협력 활동으로 인해서, 그는 미군정 당국에 의해 1947년 공직추방대상자로 지정되어 공직에서 추방되었다.3) 말하자면 그는 일종의 전범이었던 셈이다.
그림 2. 2000년에 한국어로 번역/출판된 마사하루 저서의 표지
그러나 전후에도 마사하루는 “마음은 있어도 발언할 수 없는 헌법개정, 자위대 재군비론, 오키나와 핵무기, 1970년에 닥쳐온 안보재개정 등을 직접적인 형태”로 대변하거나 “(일본: 필자)우파가 전술상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던 것”을 주장하는 등의 역할을 통해 일본 우익논리의 핵심부분을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하였고 마침내 일본 극우세력의 집합체인 일본회의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사실 <세이쵸노이에>라는 조직이 보여주었던 우익논리에 비추어 보면, 한국이나 중국에서 저지른 범죄 행위에 대한 성찰적 인식을 일본에 기대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거기에 문제는 이러한 우익의 일본에서의 헤게모니 장악의 과정이 민주주의의 형식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어서, 그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본회의>에 대한 기사를 구미의 주요 언론에서는 찾는 게 어렵지 않지만 일본에서 기사화된 것은 별로 없다. 그래서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일본회의가 일본에서는 거의 언론의 주목을 받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말하자면 일본 언론은 이미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지식인들도 지적하는 것이지만, 다나카 정권의 <금권정치>가 일본의 주류언론에서는 원래 무시되었다는 점, <사가와 규빈사건>을 특종하여 가네마루 신이이라는 정계실력자를 은퇴시킨 도화선이 되었던 기자가 언론사에서 결국 축출되었던 기묘한 사실 등에 비추어 보면, 일본 언론은 이미 1990년대부터 이미 언론으로서의 책무를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국가주의로 질주하는 일본의 과속을 저지할 수 있는 세력이 과연 일본에서 출현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나라와 화해는 어떤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하는가. 질문에 답을 찾기가 막막하다.
게다가 한국의 상황도 녹녹치 않다. 위에서 언급했던 다니구치 마사하루의 책은 포탈검색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로 국내에 제법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1985년 마사하루의 사망 이후 그의 데릴사위인 후계자 다니구치 세이쵸(谷口淸超) 이후 <세이쵸노이에>의 방향이 바뀌었다거나, 건강과 환경에 대한 마사하루의 글들은 정치적인 글들과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마사하루 사상과 논리 구조의 위험을 진지하게 검토해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사상은 실천의 맥락에서 검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일본 우익문화의 국내 유입과 그에 대한 성찰의 결여는 한국사회를 분열시킬 수 있다. 지식인 세계에서도 정황은 비슷하다.
1905년의 조약이 ‘불법’이라는 주장에는 자국이 과거에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의식이 결여돼 있듯이, 한일협정의 불성실을 이유로 또다시 협정체결이나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일방적이며, 스스로에 대해 무책임한 일이다. 일본의 지식인이 스스로에게 물어온 것만큼의 자기비판과 책임의식을 일찍이 한국은 가져본 적이 없었다.4)
한국에서 스스로 우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논리가 어떤 역사적 인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이 문장은 그러한 역사적 전개에서 정작 중요한 사람들, 강제징용에 동원된 노동자의 삶이나, 성노예로 팔려가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온 할머니들의 슬픔 등은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 보통사람들의 고통과 그 기나긴 인고의 세월이 몇 개의 통계상의 숫자, 결코 사실만을 기록하지 않는 일본 관료들이 남긴 자료, 제한된 인터뷰 등으로 표현될 수 있겠는가. 결국 이러한 글들은 진영논리에 스스로가 갇혀있음을 증명할 따름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현실인식이 한국의 일부 주류언론과 정치집단 그리고 일본에서 ‘헤이트스피치’를 주도하는 집단과 유사한 한국의 거리운동 세력들이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울하다. 한국이나 일본에서나 거리의 증오연설들이 제도권 정치가들에 의해 반복되고, 오히려 피해자가 미안하다고 고백하게 만드는 논의 구조 안에서 화해가 가능할까.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이 강제하는 현실 속에서 피해자들은 어디에서 안식을 찾을 수 있을까.
【김태승의 六十五非 15】
김태승 _ 아주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1) 서경석 저, 한승동역,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 퇴락한 반동기의 사상적 풍경』, 도서출판 나무연필, 2017.
2)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펴낸 「쉽고 바르게 읽는 3.1독립선언서」에서 인용.
3) <세이쵸노이에>에 관한 서술은 김태기, 「일본회의의 성장과 종교단체의 역할 세이쵸노이에를 중심으로」,『한일관계사연구』54, 2016에서 인용.
4) 서경석 저, 위의 책, 2장에서 재인용.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