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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관행 톡톡
10월호
만화로 보는 중국공산당의 항일전쟁 _ 이원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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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의 만주사변에서 시작되어 루거우차오사건(1937)으로 전면 확대된 중일전쟁은 중국의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역사적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21세기 중국에서도 애국주의의 고양과 함께 끊임없이 다시 소환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적 사건이기도 하다. 중국공산당은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농촌근거지와 홍군 병력을 크게 확대할 수 있었고, 이를 발판으로 삼아 곧이어 전개된 국공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중일전쟁 종전 당시에도 여전히 국민당의 전투력이 공산당의 그것을 압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연구자들이 이 시기를 중국공산당의 성공을 설명하는 열쇠로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공산당의 성공 요인에 대한 연구는 여러 연구자에 의해 오래 전부터 진행되었다. ‘농민민족주의(peasant nationalism)’, 사회 개혁, 군중노선, 토지 개혁, 군사전술, 국민당의 무능과 부패 등 다양한 요인들이 제기되었는데, 이중 어느 하나가 결정적인 것이었다기보다는 여러 요인들이 함께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종합적인 이해가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첫 번째 요인과 관련하여, 중국공산당이 중일전쟁 시기에 농민들을 대상으로 어떻게 선전 공작을 전개했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당시에 활용된 선전 만화 자료들을 일부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일제의 침략과정에서 발생한 파괴와 약탈, 처참한 학살의 현장에 대한 시각적 이미지를 부각시킴으로써 일본군에 대한 저항 심리를 유발하는 것이 필요했다. 중국 민중에 대한 살인과 방화, 약탈, 특히 부녀자들에 대한 성폭력 만행에 대한 묘사를 통하여 일제의 잔학성과 중국 민중의 피해를 드러내는 것이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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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敵占區 日寇奸淫과 약탈로 인민의 고통은 지옥보다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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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 살인과 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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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간음하고 방화하는 일본 군벌은 과연 동방의 평화를 위하는가?

  

또한, 일제의 침략으로 인한 피해가 단순히 인명과 재산에 대한 물리적 파괴에 그치지 않고, 점령지 내 물자에 대한 강제 동원의 방식으로도 이루어졌음이 강조되었다. 탐욕스럽고 잔인한 일본군이 물자를 강제로 공출하기 위하여 다양한 명목을 만들어 이를 중국 민중에 전가하고 있는 모습이 부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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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4. 갖가지 명목을 만들다                                      그림 5.攤派强徵

 

이와 같은 일제의 만행에 대항하기 위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 중국공산당은 항일민족통일전선을 통한 다양한 계층의 연대를 강조하였다. [그림 6]에서는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학생(지식인), 상인, 정부, 군대, 농민, 노동자 등이 하나의 깃발 아래 단결하는 모습을 표현하였고, [그림 7]에서도 아래에서부터 군인과 농민, 지식인, 여성, 노동자가 함께 항일에 나서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적어도 중국공산당의 항일근거지 내에서는 이러한 통일전선의 중심이 공산당과 홍군에 있었음은 자명하다.


이원준4.png              그림 6. 대중화민족 항일구국 대단결 만세!                                 그림 7. 全民抗戰


여성들도 이 통일전선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했는데, 선전 만화에서 묘사되는 여성들의 항일 노력은 주로 전선의 병사들을 위한 피복을 제작하거나([그림 8]), 남편의 홍군 입대를 적극 장려하거나([그림 9]), 부상병을 돌보는([그림 10]) 등의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그림 7]에서도 여성이 옷감을 수선하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은 중국공산당이 당시에 실제로 근거지 내에서 여성들을 동원한 주요 방식이기도 하며, 중일전쟁 종전 이후의 국공내전 기간에도 계속되었다.

    이원준 5.png              그림 8. 전방의 병사에게               그림 9. 남편을  前線으로           그림 10. 軍民합작으로 포악한 적을 

                          온기를 주다                                  보내다                                        막아내다


항일근거지 내에서의 민중 동원은 중국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농촌 정권의 재편 및 강화로 연결되었다. 중국공산당은 이전까지의 토지 몰수 및 재분배, 고리대 부채의 전면 탕감 등의 정책 기조를 바꾸어, 토지의 소유구조는 그대로 두되 소작료를 감면하고, 채무관계도 계속 유지하되 이자율을 낮추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하였다(減租減息). 또한, 근거지 내 정권기관의 문호를 개방하여 당원이 아닌 사람 중에서 진보적이거나 중립적인 사람들도 각각 1/3의 비율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三三制). [그림 11][그림 12]가 이를 묘사하는 장면이며, 이는 모두 계급적 이해관계가 다른 집단을 항일민족통일전선 아래 결합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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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1.減租(소작료 감면)                           그림 12 . 근거지 정권 건설을 강화하다

        

또한, 농촌 정권 구조의 개편과정에서 농민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중국공산당의 정책 집행에 대한 농민의 지지와 동참을 이끌어내는 것도 중요하였다. 중국공산당은 군중노선을 통해서 농민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고 이를 정권 개편과 정책 집행의 중심 동력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림 13]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문맹률이 높았던 상황에서 농민의 정치 참여를 이끌어낼 다양한 방법들이 고안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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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3. 콩을 넣어 좋은 사람을 뽑다                                그림 14. 촌장 선거


모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일전쟁은 중국공산당이 1949년의 최종 승리로 가는 길목에서 매우 중요한 도약을 경험한 시기였다. 위에서 소개된 선전 자료들은 이 시기에 중국공산당이 농민 속으로 침투할 수 있었던, 또는 침투하려 했던 상황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다. 중국공산당의 성공은 다양한 배경에 힘입어 가능했지만, 무엇보다도 인민의 참여 또는 동원이 핵심적인 동력으로 작용했음은 분명하다.


이원준 _ 인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 출처는 다음과 같음

中國革命博物館 編, 『抗日戰爭時期宣傳畵』, 北京: 文物出版社,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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