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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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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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8월 15일 중추절은 1년 중 달이 가장 크고 밝은 날이다. 상고시대에 날이 어두워지면 맹수나 적의 접근을 알아차리기 어려우니, 자연스레 밤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어둠을 밝혀주는 만월은 그 자체로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달은 ‘밤을 밝히는 신’으로 ‘밤의 태양’이었으며, 이러한 까닭에 명나라 사람들은 달을 ‘夜明’이라 부르기도 했다. 만월을 갈망하고 숭상하는 고대인들에게 1년 중 달이 가장 둥글고 밝은 중추는 자연스레 중요한 날이 되었다.
중추절은 예로부터 달을 숭배하여 달 아래 노래하고 춤추던 습관에서 유래되었다. 中秋라는 말은 『주례』의 ‘夏官, 大司馬’에 처음 등장한다. 송대의 『夢簗錄』은 가을의 한 가운데에 있는 까닭에 中秋라 부른다고 하였다. 중추절은 밤에 달빛이 아름다워 ‘月夕’이라고도 하였다. 월석이라는 명칭은 옛날 추분을 夕月이라 불렀던 것과 연관이 있다. 8월에 해당되는 절기라 하여 八月節이라고도 하며, 秋節, 追月節(달맞이날)이라고도 불린다.
예로부터 왕실에서는 달에 제사를 올리는 의식이 있었는데, 봄철인 2월 15일 아침에 태양에, 가을철 8월 15일 저녁에 달에 제사를 올렸다. 해와 달은 각기 양과 음을 대표하며, 시간상으로 낮과 밤에 속한다. 계절로는 봄과 가을에 속하며, 공간적으로 동과 서, 그리고 오행으로는 불과 물에 속한다. 『禮記』에는 “태양은 동쪽, 달은 서쪽, 음과 양이 서로 순환하니 이로써 천하가 조화를 이룬다”라고 기록하였다. 해와 달이 정상적으로 운행되어야 우주의 조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은나라 사람들은 해와 달을 東母와 西母라 불렀다.
주대에 들어서 아침에는 태양에, 저녁에는 달에 제사를 올리는 ‘朝日夕月’의 祭法이 유행하였다. 이에 대해 당나라 孔穎達은 춘분 아침에 동문 밖에서 태양에 제를 올리고, 추분 저녁에 서문 밖에서 달에 제를 올리는 것이라 주석을 달았다. 주대에 日祭는 높은 壇에서 행하고, 月祭는 埳에서 지낸다고 기록하였다. 단과 감은 해와 달의 상징으로서 단은 위에 있어 광명을, 감은 아래에 있어 고요함을 의미하였다. 명나라 世宗은 달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月壇을 건축하기도 하였다.
그림 1. 상월(賞月)
왕이 주재하던 제사를 이후 고관이나 문인들이 모방하여 제사 지내다가 점차 민간으로 전파되었다. 당대에는 절기의 명칭을 中秋라 하여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달을 감상하는 賞月이 유행하였으며, 명청대에 들어 주요한 민속 명절로 자리잡았다. 타향에서 미처 귀향하지 못한 사람도 가족을 그리며 같은 달을 바라보았다. 중추절에 타향살이에 지친 나그네의 고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은 당나라 李白의 ‘靜夜思’라는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침상 앞 밝은 달빛
땅 위에 서리가 내린 줄 알았네
고개를 드니 달빛이 휘황하고
고개를 숙이니 고향 생각이 가득하네“
예로부터 민간에서는 달을 바라보며 결혼과 자손의 번성을 기원하였다. 고대 자손의 번성을 바라는 의식은 오곡이 성숙하는 가을에 주로 행해졌는데, 이후 점차 중추절로 옮겨왔다. 청대에는 賞月을 ‘달밤에 걷는다(走月)’라고 표현하였다. 특히 부녀자들은 곱게 차려입고 달구경에 나섰는데, 달밤을 걷는 것은 유교적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賞月에는 자손의 번성이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 청대 『江夏縣志』를 살펴보면, 추석에 강하성에 위치한 증자양이라는 교각은 사람들로 붐볐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는 부녀자들이 다리 위에 새겨진 石龍 머리를 다투어 쓰다듬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행위는 신비한 힘을 빌어 자손을 얻기 위한 목적이었다. 마치 조선 후기에 부녀자들이 아이를 얻기 위해 세검정 부근의 付岩洞에서 바위에 엽전을 붙이던 풍속과 흡사하다.
이처럼 중국의 주요 절기는 흩어진 가족이 모이는 團圓節이자, 농민에게는 날씨와 농사를 가늠하는 시간표였다. 또한 부녀자들에게는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또한 장사하는 상인들에게는 빚을 갚고 결산하는 날이기도 하였다. 중국에서는 관습적으로 “빚은 5월 절기(단오절)와 8월 절기(추석)에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습속이 있어, 이를 절기 결산이라 불렀다. 따라서 추석은 1년 중 가장 중요한 결산일이었으며, 혹은 계약을 연장하거나 종료하는 날이기도 하였다. 반대로 빚이 있는 자는 어떻게 해서든 이 날을 넘기려 하였고, 상점에 고용된 사람들은 저녁 연회 전에 다음날부터 나오지 말라는 말을 들을까 전전긍긍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추석이 즐거운 명절이 아니며 달빛도 그리 아름답지 않았을 터이다. 명절을 보내는 일이 마치 관문을 통과하는 것과 같았으니, 이를 ‘명절 통과하기’라고 부르곤 하였다.
제사상에는 과일과 땅콩, 월병 등 갖은 먹거리를 올린다. 청대에는 추석날 밤에 달을 향해 향을 피웠는데, 이 때 황토로 옥토끼를 만들어 색을 입혔다. 이러한 전통으로 지금도 중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달에 올리는 제사를 ‘토끼 인형 제사’라 부르기도 한다. 산서성 일대에서는 밀가루로 빚은 화모가 주요한 제수음식이 된다. 밀반죽을 토끼 모양과 꽃 모양으로 빚어 솥에 찌고 색을 입힌다. 이 때 색 입힌 것을 화모(花饃), 색을 입히지 않은 것을 모모(饃饃)라 한다. 소를 넣지 않은 만두와 비슷하며, 제사가 끝난 뒤 나누어 먹는다.
그림 2. 화모(花饃)
제사상에 오르는 음식과 과일은 모두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수박은 통으로 사용하지 않고 반으로 갈라 붉은 속과 씨가 잘 보이도록 배열한다. 수박은 달처럼 둥글어 원만함과 단결, 화합을 상징하며, 까만 씨는 자손의 번성을 상징하고, 수박 속의 홍색은 길상을 상징한다.
중추절에 월병을 만들어 먹는 것은 매우 오래된 풍습이다. 월병의 기원은 송나라부터 시작된다. 송대 시인 소동파는 “달처럼 둥근 월병 속 연유와 엿은 달콤하기가 그지없다”라고 노래하였다. 일반적으로 설탕과 견과류, 건조 과일 등이 있는데, 단 맛이 강하여 차와 함께 먹으면 어울린다. 청대 『연경세시기』에는 “제사용 월병 위에는 달에 사는 옥토끼가 그려져 있다”라고 하였다.
예전에 월병 정면에 빨간 색으로 네모난 도장을 찍었는데, 이를 채색월병이라 불렀다. 어떤 월병은 꽃모양이고, 어떤 것은 月餠이라는 글자를 새기기도 하였다. 달처럼 둥근 월병은 외지로 멀리 나가 있던 가족들이 이 날 모두 한 자리에 모인다는 의미로 ‘團圓餠’이라고도 불렀다. 월병은 종류가 다양하여 속에 넣는 소에 따라 이름을 붙인다. 녹두, 깨, 달걀, 호두, 곡류, 과일 등 다양한 소가 있다. 재료와 크기에 따라 가격 또한 천차만별이다. 한 때 월병 속에 금이나 돈을 넣어 뇌물로 사용하기도 하여 사회 병폐로 언론에 회자되기도 하였다. 월병이 충분치 못할 경우 가족들이 쪼개어 나누어 먹었다. 이 때 가족 수를 세어 똑같이 잘라서 나누었는데, 집에 임산부가 있을 경우 한 사람 몫을 더 받았다.
【관습과 중국문화 21】
김지환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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