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중국 공산당이 11월 8~11일 개최되는 19기 6중전회에서 ‘당의 100년 분투의 중대한 성취와 역사 경험에 관한 결의(關於黨的百年奮鬥重大成就和曆史經驗的決議)’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역사결의’를 심의하고 통과시킬 듯하다.
중국 공산당의 ‘역사결의’는 이제까지 두 차례 있었다. 첫 번째는 1945년의 「당의 몇 가지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關於若幹曆史問題的決議)」였다. 첫 번째 역사결의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중국 공산당은 마오쩌둥의 당이라는 내용이다. 두 번째 역사결의는 40년 전인 1981년 11기 6중전회에서 통과되었다. ‘건국 이래 당의 몇 가지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關於建國以來黨的若幹曆史問題的決議)’라는 이름의 두 번째 역사결의는 평가와 반성이었다. 주관주의, 계급투쟁의 확대, 문화대혁명을 중국 공산당의 과오로 인정했다. 중국 공산당의 과오를 인정한다면, 당의 지도자이자 지도이념을 만든 마오쩌둥의 과오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이라는 좌파적 오류에 중요한 책임이 있다고 평가했다. 과오에 대한 평가와 반성을 통해 계급투쟁이 더 이상 중요한 모순이 아니며, 집단 지도를 유지하고 개인 숭배를 반대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오에도 불구하고 중국 공산당은 커다란 성취를 달성했으며, 마오쩌둥도 업적이 더욱 중요하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 공산당의 국가라는 점에는 변화가 있을 수 없으며, 역사결의는 이를 위해 필요한 반성과 평가를 담았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역사결의의 구체적 내용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100년의 성취’에 대한 내용이 포함된다고 하니 시진핑 주석이 중국의 성취로서 꾸준히 강조한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길, 제도, 이론, 문화 등 이른바 ‘네 개의 자신감(四個自信)’이 포함될 듯하다. 또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목표도 제시해야 하니 최근 강조되고 있는 ‘공동부유(共同富裕)’가 등장할 것이다.
개별적인 내용보다도 오히려 더욱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세 번째 역사결의가 첫 번째, 두 번째만큼 선명한 내용과 진정한 변곡점을 보여줄 리가 없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세 번째 결의가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가 아니라, ‘역사 경험’에 관한 결의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문제’에 관한 결의였기 때문에 문제의 대상과 내용이 존재했다. 첫 번째 결의에서는 마오쩌둥과 대립했던 공산당의 노선들이 좌경적 오류, 우경적 투항주의 등의 이름으로 비판되었다. 이에 따라 천두슈(陳獨秀), 리리싼(李立三), 왕밍(王明), 장궈타오(張國燾) 등 비판의 대상이 되는 구체적인 인물들의 이름도 제시되었다. 오류의 경중에 따라 리리싼과 왕밍은 ‘동지’로 불렀지만, 천두슈와 장궈타오는 ‘동지’로 부르지도 않았다. 두 번째 역사결의도 마찬가지이다. 결코 동지로 부를 수 없는 린뱌오(林彪), 장칭(江青), 캉성(康生), 4인방 등 마오쩌둥의 과오를 이용하고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인물들이 야심가나 반혁명 집단으로 호명되었다. 여기에 더해 덩샤오핑을 비롯하여 류샤오치(劉少奇), 천윈(陳雲) 등 반혁명 집단에 의해 희생되거나 핍박받았던 동지들의 이름도 열거되었다.
세 번째 역사결의는 결코 동지로 불릴 수 없는 문제적 인물들을 추가로 나열하지 않을 것이다. 마오쩌둥부터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동지가 ‘위대한 경험’의 계보로서 열거될 뿐일 것이다. 새롭게 조성된 조건으로 인해 이론과 노선을 쇄신하기 위해 결의가 필요하기보다는 권력 변동, 더 정확하게는 권력 유지를 위해 새로움이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10년 동안의 권력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의 위대한 경험에 대한 정리가 필요할 뿐이지 문제에 대한 평가와 반성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조형진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1981년 인민일보, '역사결의'에 대한 보도
-
2024.11
-
2024.10
-
2024.09
-
2024.08
-
202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