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스포츠는 이념과 국경을 초월하여 세계로 전파되어왔지만, 그것은 민족국가의 틀 안에서 조직되었고, 국제경기는 민족국가의 이름으로 치러진다. 현대 스포츠의 탄생 자체가 산업화 및 민족국가의 등장과 함께 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스포츠가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특히나 올림픽은 스포츠의 정치적 도구성을 강화시킨다. 개막식에서 출신국 특유의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국가별로 입장하고, 경기장에는 각 나라의 국기가 높이 게양되며, 자국의 선수들을 위해 한마음으로 응원한다. 그리고 메달 수상자의 고된 훈련과 고난한 인생의 역경 극복 스토리는 모든 국민의 경험으로 치환되고, 메달 시상식에서 이루어지는 상위 입상자의 소속 국가의 국기게양과 국가제창에서 민족적 감성은 극에 달한다. 관중들의 환영과 응원의 강도는 그 국가와의 정치적 친소 정도를 반영하며, 경기에서의 순위와 점수에 국가와 매스컴의 관심이 집중되고, 이는 민족적 자긍심과 연결된다. 경기 주최국은 이전의 경기 주최국보다 경기 준비와 운영에서 더 나은 평가를 받으려고 애쓰며 이것을 국가의 위상과 연결시킨다. 이처럼 올림픽을 통해 고조된 민족주의는 각 국가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거나 글로벌 경쟁에서 특수한 정치적 이익을 위해 활용된다.
사진 1. 1936년 베를린 하계 올림픽의 성화 봉송자가 베를린을 순회한 후,
개회식 직전에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과하여 들어오고 있는 장면
민족주의에 철저히 이용된 대표적 올림픽으로는 1936년의 베를린 올림픽을 들 수 있다. 히틀러는 이 대회를 “아리안 인종”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파시스트 정권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대규모 선전장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올림픽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먼 과거의 일이거나 권위주의 국가에서만 벌어지는 것도 아니다. 미국에서 개최된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은 미국의 민족주의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미국은 올림픽 개막식 때 ‘찢어진 성조기’를 들고나와 ‘9·11 테러’ 희생자 위령제를 지냈고, 미국인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행사로 일관했다. 키신저는 미국 독립혁명 200주년을 맞아 1976년 올림픽을 미국에서 유치할 수 있도록 ‘총력전’에 나서기도 했었다. 물론 이 시도는 미국의 캄보디아 확전으로 나빠진 국제 여론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중국의 인권문제를 비판하는 서구 국가들과 이에 대한 중국 민족주의의 대응이 치열하게 벌어지기도 했다. 2008년 올림픽 성화 봉송 과정과 올림픽 개최 기간 중 드러난 중국인들의 공격적인 민족주의적 성향은 그때부터 세계 각 국의 우려의 대상이 되었고 중국 위협론을 더욱 심화시켰다.
현재 일본에서 치러지고 있는 도쿄올림픽의 현장에도 스포츠뿐만이 아니라 정치와 민족주의적 분쟁과 논란이 가득하다. 우선 개최국인 일본의 정치적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에 대해 일본 전문가들은 아베 전 총리를 계승한 스가 정권이 올림픽 개최 성공을 통해 국민들 가슴 속 내셔널리즘 즉 ‘민족주의’를 최고치로 끌어올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장기집권과 개헌을 노리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1964년 일본은 도쿄올림픽 개최를 통해 전쟁 패배의 치욕감을 씻어내고 전후 부흥과 경제력 향상을 과시하여 국내 민족주의를 고취하고 발전의 동력을 마련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번 도쿄올림픽에서도 1964년의 올림픽에서 얻었던 성과를 기대하는 일본 정부는 헌법 개정에 대한 구상까지 그 안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올림픽에서 중국의 민족주의와 정치적 문제는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우선 ‘하나의 중국’ 원칙과 관련한 정치적 논란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홍콩 민주화를 상징하는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출전한 홍콩 배드민턴 선수로 인한 논란은 올림픽에서조차 정치가 얼마나 예민하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올림픽에 출전한 홍콩 선수들은 홍콩특별행정구(HKSAR)의 엠블럼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어야 하는데, 응카롱은 이름의 이니셜(Ng)과 ‘Hong Kong, China’라고만 적힌 검은색 옷을 입었고, 이에 친중성향의 누리꾼들이 응카롱의 페이스북에 비난의 글들을 올린 것이다. 스폰을 받지 않아 개인 티를 입었을 뿐이라는 해명으로 논란이 잠식되기는 했으나 이는 홍콩과 중국의 첨예한 정치문제를 그대로 반영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홍콩 펜싱 선수 청카룽(張家朗)이 홍콩 반환 이후 첫 금메달을 따고 시상식에 중국 국가가 울려퍼지자 응원의 함성이 정치적 구호로 바뀌기도 하였다. 청카룽의 경기는 홍콩 시민들의 특별한 관심을 받았는데, 대형 쇼핑몰 내 전광판 앞과 바닥에 주저앉아 응원을 하던 시민들은 중국 국가 연주에 "우리는 홍콩이다"(We are Hong Kong)를 연호하며 불만을 표현했다.
사진 2. 7월 26일 2020 도쿄올림픽 펜싱 남자 플뢰레 개인전 결승전에서
홍콩에서 온 24세의 청카룽(張家朗)이 금메달을 따고 시상식장에 중국 국가가 연주되자
홍콩의 시민들이 "우리는 홍콩이다"(We are Hong Kong)를 연호하는 장면
현재 미·중 사이에서 전략적 중요성을 갖는 대만문제 또한 올림픽에서 비켜가지 않고 이용되었다. 대만은 1981년부터 대만을 뜻하는 타이완 대신 ‘차이니스 타이베이(Chinese Taipei·중화 타이베이)’라는 이름으로 국제대회에 참가하고 있으며 올림픽에서 대만 국기는 물론 국가도 사용할 수 없다. 이러한 대만 또한 ‘하나의 중국’ 원칙이라는 민족주의 정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만은 지난 2018년 도쿄올림픽에 ‘차이니스 타이베이’가 아닌 ‘대만’으로 참가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진행했지만 결국 부결되었다. 당시 국민투표를 준비하는 대만 정부를 향해 중국 정부는 정치적 압력을 행사했으며, IOC(국제올림픽위원회)도 중국의 입장을 지지했다. 그러나 지난 23일 올림픽 개막식 중계에서 일본 공영방송인 NHK 앵커가 대만을 ‘타이완(대만)’으로 호칭하였다. 또한 미국 올림픽 중계권을 가지고 있는 NBC 유니버셜은 중국 선수들이 입장할 때 대만과 남중국해를 표기하지 않은 지도를 보여주었으며, NBC 앵커는 중국 대표팀이 등장하자 시청자들에게 홍콩과 신장을 잊지 말아 달라는 멘트를 덧붙였다. 중국 정부와 언론매체들은 이러한 일본과 미국의 ‘하나의 중국’ 원칙 훼손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고 항의 했다.
중국 또한 자국의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를 고취시키기 위한 기회로 이번 도쿄올림픽을 놓치지 않고 있다. '링링허우'(零零後·2000년대생) 선수들의 메달 수상이 계속되면서 중국은 이들 세대의 진취성과 국가에 대한 사명감을 추켜세우고 이를 ‘애국주의’에 연결하여 중국 국민들을 결집시키려 한다.
이번 도쿄올림픽뿐만 아니라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 또한 정치문제에 연결되고 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의 보도에 따르면 유럽의회가 홍콩 반중매체 빈과일보 폐간과 홍콩 사회의 자유 침해에 대응해 관련자 제재와 베이징동계올림픽 외교 보이콧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준비 중이다. 또한 미국 의회·행정부 중국위원회(CECC)는 중국 정부가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인권 탄압 문제를 이유로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나치 독일 하에서 치러진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빗대며 자국 내 기업들의 베이징동계올림픽 후원을 비판하고 압력을 넣고 있다는 내용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도 하였다. CECC 소속 의원들은 지난주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에 서한을 보내 베이징동계올림픽을 1년 연기하고, 중국이 인권 침해 행위를 계속할 경우 올림픽 개최지를 변경하라고 촉구하였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였던 '피에르 드 프레디 쿠베르탱(Pierre de Frédy, Baron de Coubertin)' 남작은 당대 팽배했던 민족주의 사상을 벗어나 스포츠를 통한 세계 청년들의 화합을 위해 ‘올림픽’을 개최했다. 그리고 그는 “All sports for All people”이라는 말을 남겼다. 즉 모든 스포츠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주의를 극복하기 위하여 시작된 올림픽은 현재 분쟁과 갈등의 정치와 민족주의적 경쟁이 그대로 투영되는 현실 정치의 복사판에 지나지 않는다. 스포츠를 정치와 분리하고 오롯이 스포츠를 통해서만 행해지는 교류와 소통의 장을 마련하는 것은 경쟁과 갈등으로 점철된 현실 국제정치에서 새로운 관계와 대안 창출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정주영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상임연구원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https://encyclopedia.ushmm.org/
사진 2. https://n.news.naver.com/article/025/0003122091(중앙일보 유튜브 영상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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