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해마다 춘절(春節, 음력설)이면 중국 극장가에는 다양한 영화가 쏟아져 나온다. 연휴 기간 극장을 찾는 관객들을 겨냥한 이 신년맞이 영화들은 명절 분위기에 맞춰 웃음과 희망을 주거나, 현실을 비틀어 꼬집으면서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금년 설을 맞아 개봉한 한 편의 영화가 흥행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중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다.
그 주인공은 SF(공상과학) 블록버스터 『유랑지구(流浪地球)』다. 음력설인 2월5일 개봉 이후 한 달여 만에 입장 수입 46억 위안(약 7천800억 원)을 돌파하며 중국 역대 박스오피스 2위에 올랐다. 거침없는 과학적 상상력을 자국의 기술력과 산업기반을 이용해 구현해낸 새로운 영화의 등장에 중국 내에서는 ‘중국 SF영화의 원년’이라며 한껏 들뜬 모습이다. 반면 해외의 반응은 사뭇 달라 보인다. 국내 언론에 소개된 내용만 하더라도 중국의 애국주의와 ‘중국이 지구를 구한다’는 팍스 시니카(Pax Sinica)의 등장을 경계하는 시선이 적지 않다.
이러한 우려는 영화 속 상상을 단순히 허구로 치부할 수 없는 현실 때문일 것이다. 그 동안 수많은 할리우드식 영웅담이 거센 비판을 받으면서도 흥행에 성공해온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거북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데에 있다. SF영화 속의 우주선과 우주복, 복잡한 기계 설비에 새겨진 ‘NASA’라는 글자는 지구인이 우주를 향해 외치는 ‘열려라, 참깨’와도 같은 주문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개혁개방 40년 만에 이미 G2의 위치에 올라선 중국이 항공우주산업에서도 빠른 발전을 보이더니 지난 1월에는 인류 최초로 달 뒷면에 우주선을 착륙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미 2003년에 유인우주선 션저우5호(神舟五號)를 쏘아올린만큼, 중국인 우주비행사의 모습도 낯설지 않다. 지금 당장 중국이 미국을 대신하겠다고 나선다 해도 이상할 것 없는 현실이고 보니 영화의 성공을 지켜보는 심경이 편치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유랑지구' 속 중국 우주비행사
그렇지만 영화 『유랑지구』를 단지 미국식 영웅주의의 중국 버전으로 치부하기에는 기존의 문법과 다른 몇 가지 지점이 포착된다. 우선 제목에서도 말해주듯 ‘떠도는 지구’의 모습이다. 영화는 태양이 급격히 노화되어 팽창함에 따라 질서가 무너진 태양계를 보여준다. 더 이상 태양을 중심으로 돌 수 없게 된 지구는 기존의 질서인 태양계를 벗어나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나선다. 할리우드 영화가 미국을 중심으로 외부의 침입을 물리치거나(『인디펜던스데이』,1996) 외부로부터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아마겟돈』, 1998) 외부로 확장함으로써 (『인터스텔라』,2014) 지구를 지켰다면, 『유랑지구』는 내부/외부, 중심/주변의 틀을 벗어나 광활한 우주를 떠도는 지구의 미래를 보여준다.
이러한 이탈을 현실에 대입해보면 미국을 중심으로 구축되고 운용되어왔던 국제질서에 대한 일종의 폐기선언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해석이 가능한 것은 영화 속에서 시종일관 유지되는 미국의 부재(不在) 때문이다. 등장인물 중에는 미국인이 없다. 따라서 미국인과 대립하는 일도 없고, 영어조차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지구 밖 우주정거장에서 우주비행사와 대화하는 ‘MOSS’는 영어를 사용하지만, 이 인공지능시스템은 일방적인 지시와 관리의 기능을 수행할 뿐 쌍방향적 소통과 돌발 상황에 대한 대처는 불가능하다. 과거 ‘NASA’와 성조기가 있었을 법한 자리는 연합정부 깃발과 각국 국기, 혹은 ‘Made in China’로 대체되었다. 이렇듯 미국은 흡사 태양계에 버려두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철저하게 비가시화된다.
미국이 보이지 않는 ‘새 판짜기’에는 중국이 추구하는 가치관이 채워진다. 태양계를 떠나는 것은 지구‘인’이 아니라 ‘지구’다. 태양계를 떠나는 방식이란 1만개의 거대한 추진체를 건설해 지구 자체를 이동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가동되는 추진체의 동력에 의해 움직이는 지구의 모습은 그야말로 상상력에서의 ‘대륙의 위엄’이라 하지 않을 수 없거니와, 소수의 영웅이 동분서주하는 할리우드식 문법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지구가 소멸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앞두고 도움을 요청하는 중국 소녀의 호소에 한국군이 가장 먼저 호응하고 나서고 뒤이어 인도네시아, 일본, 러시아, 영국군이 속속 돌아와 힘을 보태는 장면 역시 그 동안 보아왔던 영웅 서사와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지구를 인류 공동의 ‘집’으로, 전 세계인을 한 집에서 생활하는 ‘운명공동체’로 그림으로써 영화의 시야가 더 큰 세계와 더 먼 미래에 닿아 있음이 드러난다.
유랑하는 지구
이렇게 영화에서는 미국이 되었든, 외계의 무엇이 되었든 중국 외부의 것을 적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제거하는 영웅에게 박수갈채를 보내기 보다는 지금까지 세계를 지배했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질서가 힘을 잃어버린 미래와 그 안에서 필요하게 될 새로운 협력의 모델을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영화 속 상상은 현실 속의 몇몇 장면과 맞물리며 더욱 구체화된 메시지를 구성한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을 태운 연료 수송 차량이 각 도시를 연결하며 인도네시아까지 남하하는 경로 위로 남아시아로 인프라를 확대해 가는 일대일로의 구상도가 떠오른다. 여기에 지난 2월 베트남으로 향하는 김정은 위원장에게 중국이 열어준 기찻길도 겹쳐진다. 평양을 출발한 열차가 중국의 도시들을 거쳐 하노이에 도착한 사흘간의 여정을 지켜보는 세계를 향해, 중국은 북한의 개방,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해 중국이 할 수 있는 역할과 그것을 제대로 이용할 때 펼쳐질 미래를 말 한 마디 없이 재확인시켜주었다. 베이징을 출발한 연료가 상하이(上海), 항저우(杭州), 필리핀을 거쳐 인도네시아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미국을 제외한) 각국이 힘을 모아 위기를 벗어나는 영화의 결말은 현재 중국이 추구하는 협력의 내용이자 일대일로의 최종목표이기도 한 ‘운명공동체’의 형태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영화와 현실에서 중국이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일까. 적어도 중국이 세계를 구할 수 있다는 단순한 힘자랑만은 아닌 듯하다. 현재로서는 갈수록 복잡해져가는 세계 역학구도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고 대안을 제시하며 협력을 구하는 태도에 가까워 보인다. 말하자면 앞장서되 대립하거나 강요하지 않는 방식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제질서를 세울 비전을 제시하고 참여를 설득하겠다는 것이다. 중국으로서는 주변국의 신뢰와 지지가 절실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의 굴기를 경계만 하기 보다는 적절한 타협과 협력을 통해 중요한 동반자로서 관계를 발전시켜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물론 그 결과 중국이 새로운 패권국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신중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김남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상임연구원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 이 글은 2019년 3월 18일자 『국민일보』 (인터넷판)칼럼 [차이나 로그인]에 게재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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