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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갯벌로에서
2월호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_ 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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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되새겨보면 이것은 하나의 민족국가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에서 문자매체가 가지는 영향을 생각해보면, 중국과 다른 입말을 제대로 표기할 수 있는 문자를 따로 만들어 사용하겠다는 결정은 통일된 언어를 사용하는 공동체로 나아가고자 하는 정치적 기획이었다(적어도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 게다가 이 선언은 문장 구조상으로도 ‘나라’와 ‘중국’을 똑떨어지게 대칭시킴으로써 근대 이후 한국의 민족주의가 전유하기에 참으로 알맞은 ‘사건’이 되었다. ‘한반도’에서 ‘한국어와 한글’을 사용하는 ‘한민족’이라는 조건은 그 자체로 근대 민족국가 건설의 당위성을 웅변해주었다. 또한 글자의 창제에 있어 입말이 중국과 다르다는 점을 첫 번째 전제로 삼은 것은 그 다름을 강조하는 동시에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언어적 혼재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민족의 혼으로서 강조되어온 국어의 순수성과 함께 소위 ‘한자문화권’이라는 언어 환경 역시 우리의 언어생활을 둘러싸고 있는 중요한 틀이 되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날 중국어의 번역은 언제나 두 가지 선택항 앞에 놓이곤 한다. 예컨대 ‘北京’이 북경이냐, 베이징이냐 라는 식의 논란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고유명사는 원음에 의거해 표기한다는 원칙을 적용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두 가지 방식이 혼용되고 있다. 새로운 용어와 개념이 원음대로 수입되는 일이 많은 다른 언어와는 달리 중국어 번역의 경우 가급적이면 우리식의 한자독음을 이용하거나 원래 있던 어휘 안에서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한자문화권에서 공유하는 문화와 어휘가 많다보니 생기는 현상일 것이다. 그나마 오랜 기간 존재했던 어휘는 하나씩 원칙을 만들어가며 정리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혹은 앞으로 새로 만들어질 어휘들이 문제다. 또 기존에 사용하던 어휘가 변화를 겪거나 새로운 의미가 생기는 것도 문제가 될 것이다.


설을 맞아 중국인 관광객들의 방한이 또 다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여러 언론에서 보도하는 내용은 비슷하되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는 ‘유커’, ‘요우커’, ‘중국(인) 관광객’으로 제각기 다르다. 이러한 용어의 사용에 대해 제기되는 문제는 대략 두 가지다. 하나는 알기 쉬운 우리말을 두고 굳이 ‘유커’나 ‘요우커’와 같은 생경한 어휘를 써야 하느냐는 문제다.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은 우리식 한자독음이 아닌 중국어 원음을 따르는 표기법에 불편함을 토로한다. 또 이런 방식이 국어의 오염을 초래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과연 현재 사용되고 있는 ‘유커’, ‘요우커’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관광객’이 맞는지 묻고 싶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관광객이란 ‘관광하러 다니는 사람’이다. 지역의 명소를 찾아 둘러보고 현지 문화를 체험하며 간단한 기념품을 사는 정도가 일반적인 관광객의 모습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요우커’는 다르다. 이들은 거대한 규모, 막강한 소비력, 특정 기간에 집중되는 등 기존의 관광객이라는 단어로는 포괄할 수 없는 행위 집단으로 등장했다. 과연 우리가 외국 관광객 때문에 그 나라의 국경절을 기억한 적이 있는가. 어느 나라 관광객이 자국 연휴를 앞두고 한국 기업들의 주가를 올려놓던가. 우리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에 있어 이들은 그저 관광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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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문제는 중국어 발음을 차용한 ‘요유커’와 ‘유커’ 가운데 ‘유커’의 경우 관광객을 의미하는 중국어의 발음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중국어 발음기호인 한어병음에 따르면 관광객을 뜻하는 '游客'는 ‘youke’로 표기하는데, 중국어에서 ‘you’는 ‘요우’에 가까움에도 한국의 ‘중국어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이를 한 소리로 쳐서 ‘유커’로 표기하고 있다. 많은 중국어전문가들이 ‘현행 중국어 표기법과 한어병음 사이에 편차가 너무 크다’고 지적하고 개정을 요구하고 있지만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다수의 용어가 혼용되는 상황에 대해 국립국어원에서는 ‘유커란 游客(유객)의 중국어 발음을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한 것’이라며 기존의 표기법을 유지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고, 더 나아가 어려운 외국어인 ‘유커’보다 ‘중국인 관광객’ 또는 ‘중국 관광객’ 등 알기 쉬운 우리말로 바꾸어 쓸 것을 권장한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의미로도, 소리로도 현실과는 맞지 않는 방안으로 보인다. 


‘알기 쉬운 우리말’이라고 하지만, 그동안 나라 말씀도 참 많이 바뀌었다. 말씀이 맞닿는 경계는 크게 확장되었고 그조차도 수많은 구멍이 뚫려 있는, 결코 견고할 수 없는 경계다. 오늘날의 한국어가 외부와의 접촉 속에서 밖으로 확장해가지 못하고 외부의 것들을 안으로만 끌어들여 새로운 개념을 원래 가지고 있던 어휘에 가둬두려 한다면 그것은 과연 순수성을 지키는 것인가, 아니면 폐쇄성을 고집하는 것인가. 중국의 문호 루쉰(魯迅)이 ‘뻣뻣한 번역(硬譯)’을 주장했을 때, 그는 그러한 번역을 통해 중국어를 확장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중국의 문화를 발전시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우리가 부딪치게 될 수많은 타자를 함부로 전환하거나 공백을 남겨두는 일 없이 대면하고자 할 때 이를 우리 언어에 대한 오염으로 간주하고 새로운 의미를 기존의 언어에 욱여넣으려고만 한다면, 결과적으로 우리의 세계에 대한 이해와 사고의 폭을 좁히는 결과가 초래되지 않을까.


세종은 한자를 익힌 지배계층이 사유를 독점하는 상황에서 우리글이 있어 우리말을 마음껏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백성들의 생각을 깨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근대를 목도하면서 이광수는 ‘만국이 이웃과 같이 교통하는 시대’를 예감하고 다양한 영역에서 외국어학을 공부할 것을 권하며 마지막으로 ‘한문도 외국어의 한 과목으로 배울지라’고 덧붙인다. 한자문화권과 민족의 혼으로서의 국어라는 틀에서 벗어나 시대에 맞는 한국어를 고민하고 외국으로서의 중국, 외국어로서의 중국어를 다시 생각해볼 때다. 세종도 그렇게 하셨다.


김남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http://bit.ly/2kM0a0M

http://bit.ly/2jozva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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