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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해외 중국학 연구동향
1월호
중국-미얀마 국경지역 조사·연구 성과 소개(10) _ 리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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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20244월호부터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이 중국 윈난대학 인류학과(雲南大學人類學系)와 함께 수행한 중국 남서부 국경지역 공동연구 사업의 연구성과 보고서에 대한 번역·요약을 연재한다. 중국-라오스, 중국-베트남 국경 문제에 관련된 해당 연구사업의 지난 1단계 연구성과는 이미 한국어로 번역되어 국경 마을에서 본 국가라는 단행본1)으로 출간된 바 있다. 중국-미얀마 국경에 대한 현재 2단계의 연구성과는 중국어판 연구성과 보고서의 형태로 중국학술원에 소장되어 있다. 해당 연구성과를 널리 공유하고 확산하기 위해, 특히 국경 및 초국경 이동 관련 분야의 연구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성과 보고서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여 <관행중국> 웹진을 통해 공개한다. 이번 호는 제4<국경마을의 경계 인식과 경계 관념(): 룽안촌 촌락공동체와 장소성의 형성>의 후반부 내용을 지난 호에 이어 번역하여 소개할 것이다.

 

 

[내용요약]

 

장 국경마을의 경계 인식 및 관념()

-룽안촌 촌락공동체와 장소성의 형성(2)-

 

3. 커지는 자이쯔(壯大寨子)

1963, 방첸에서 또 하나의 가구가 룽안촌으로 이주했지만, 이전에 이주해왔던 주민들 중 상당수는 미얀마로 도망가거나 옛 거주지로 되돌아갔다. 따라서 마을에는 다섯 가구만 남아 있었다. 인구 부족과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라오궁바오(老龔保)는 지속적으로 이주민을 모집했다. 현재 징포1(景頗1)와 징포2(景頗2)에 거주하는 대다수 주민은 라오궁바오의 이주 요청에 응하여 1960년대 초반~1970년대 초반 사이에 조금씩 이주해왔다.

 

다른 한편으로, 마을의 한족 주민들은 각각 1965년과 1970년에 두 번의 집단 이주 동원으로 룽안촌에 정착했다. 룽안촌 주민들은 모두 이주민이지만, 일반적으로 이 지역에 먼저 정착했던 징포족 가구를 쭤디후(坐地戶, 즉 이 땅의 원주민 가구)”라고 부르고, 이주해온 한족 가구를 첸이후(遷移戶, 즉 외지에서 온 이주 가구)”라고 칭한다.

 

1965, 룽안촌의 인구는 본격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이주해온 사람들은 대부분 량허현(梁河縣)과 텅충현(騰沖縣) 지역에서 온 한족 주민들이었다. 1950년대, 더훙주(德宏州) 주변 지역은 평화적으로 해방되었지만, 이 지역 가운데 산악 지대에 위치한 량허현와 텅충현은 해방 이전까지 오랫동안 아편 재배에 의존해 생계를 이어왔다. 일부 주민들은 아편 대신 호두, 녹차, 야자 섬유, 누에콩 등을 재배했지만, 이 역시 생계에 충분치 않았다.

 

1952년부터 시작된 공산당 정부의 아편 재배 금지 정책은 1955년까지 철저히 완수됐다. 이에 따라 아편에 의존하던 지역 주민들은 밀, 감자, 옥수수 등의 대체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량허현 지역에서 "산은 높고 돌이 많아, 집 밖에 나서면 곧 오르막길"(梁河山高石頭多出門就爬坡)이라는 속담이 전해질 정도로 일반 식량 생산의 자연조건이 과도하게 열악했다. 자연환경의 제약으로 인해 농업 생산성이 매우 낮고 생계유지가 어려워, “지역의 자원만으로는 그 지역 사람을 부양할 수 없다(一方水土養不活一方人)”는 현실적인 한계에 직면했다. 텅충현의 산악지대 주민도 이와 비슷한 한계를 맞이하고 있었다.

 

윈난성(雲南省) 정부의 조정과 지방정부 간의 여러 차례 협상의 결과로서, 량허현과 텅충현 산악 지대의 한족 주민들을 땅이 넓고 인구 밀도가 낮은 룽촨 평야 지대로 이주시키는 동원 계획이 수립됐다. 이 계획에 따르면, 량허현과 텅충현 산악 지대 40개의 생산대(生產隊)의 약 600여 가구가 최초의 이주 동원 대상이 됐다. 이주 초기에는 각 가구에서 주로 젊고 건장한 노동력이 우선적으로 동원되어 룽촨 평야의 각 마을에 파견되며, 농지 개간, 경작, 가옥 건축 등의 임무를 맡게 됐다.

 

1965년부터 상당히 긴 기간 동안, 량허현에서 룽촨 평야까지 약 100km에 이르는 산길에서는 노약자와 아이를 데리고 크고 작은 짐을 짊어진 사람, 노새와 말들이 이동하는 이주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들은 한 무리씩 차례로 산길을 따라 옛 삶터를 떠났으며, 이주 길 곳곳에는 이들이 야영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현재 룽안촌의 한족1조와 한족2조라는 두 자연촌은 이 이주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마을 설립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에 기록된 문구와 두 자연촌의 첫 이주민들이 회고한 내용을 바탕으로 당시 이주 과정과 원인을 재구성할 수 있다.

 

한족1조와 한족2조의 주민들은 원래 량허현 다창구(大廠區) 샤오중산촌(小中山村, 룽안촌 북동쪽 약 43km 지점)에 거주하고 있었다. 기념비의 문구에 따르면, 이주 이유는 샤오중산은 고산지대에 위치하여 곡물 재배에 부적절, 인구는 증가했으나 토지 자원은 부족,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아편 재배 및 무역이 금지되면서 기존 생계 방식 유지 불가, 1965년 산악 지대 주민에 대한 정부의 접경 지역 경제 발전 및 국경 안보 강화 목적의 국경선 평야 지대 이주 및 개간 동원 때문이라고 했다.

 

한족1조와 한족2조의 첫 이주민들에 따르면, 1965년 이주 동원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가구는 18가구였다. 이들 중 4명의 청년 대표가 민주적인 절차로 선출되어, 같은 해 음력 22일 이주 예정지를 답사하기 위해 룽촨으로 출발했다. 당시 교통이 불편하여 네 사람은 농기구와 침구를 짊어진 채 도보로 이동해야 했으며, 도중에는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나무 아래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룽촨에 도착했을 때는 발이 부어오르고 어깨가 찢어질 정도였으며, 짚신은 여러 켤레가 닳았다.

 

룽촨에 도착한 네 사람은 당시 룽촨현 정부의 안내로 룽안 지역을 이주 예정지로 배정받았다. 네 사람은 룽안촌이 산을 등지고 있으며, 수원이 풍부하고 넓은 초지가 있어 농경과 정착에 적합하다고 판단해 이를 최적의 정착지로 결정했다. 이후 샤오중산촌의 17가구, 75(노동 가능 인구 32)이 같은 해 음력 2월 말 룽안촌에 도착하여 하나의 생산대(자연촌)를 결성했다.

 

정착 과정에서 한족 이주민들은 지역 징포족의 큰 도움을 받았다. 징포족 생산대는 자신들의 가축우리를 한족 이주민들에게 임시 주거지로 제공했으며, 식량을 빌려주어 이주민들의 생계를 도왔다. 정착 이후 지방 당 위원회와 정부는 이주민에게 정착지와 산림 자원을 공식적으로 배정했다. 이주 청년들은 힘을 모아 15일간 노력 끝에 8개의 초가집을 짓고 생산대 공동 식당을 설립했다.

 

이후 일부 이주민은 농지를 개간하고, 일부는 부업으로 농업을 지원했다. 부업을 통해 생산한 채소와 산나물은 주변 소수민족 마을과의 교역을 통해 식량으로 교환했다. 초기에는 경작을 위한 가축이 없어 눙센촌(弄賢村)의 목재를 운반하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소 두 마리를 받아 개간에 필요한 가축 문제를 해결했다.

 

경작이 완료된 이후, 음수와 관개 문제가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다. 이주민들은 군대 농장과 인근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총 8km 길이의 광잉 수로(光英渠)를 개척하여 음수와 관개 문제를 해결했다. 이주민들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노동하며 세 달간의 노력 끝에 곡식을 수확할 수 있게 되었고, 각 가정에서 흙집과 초가집을 짓고 난 후 비로소 량허에 남아 있던 가족을 데려와 다시 합류할 수 있었다.

 

. 생산과 생활 조건의 개선

초기에 징포족 쭤디후들이 룽안으로 이주한 후, 그들이 거주한 집은 나뭇가지와 띠풀로 지어진 간이 가옥이었다. 집을 지은 뒤에는 황무지를 불로 태워 개간한 후 옥수수 씨앗을 대충 뿌리거나, 물이 있는 곳에 볍씨를 흩뿌리고 따로 관리는 하지 않았다. 대신 산으로 올라가 사냥에 나섰다. 이처럼 산에서 내려와 정착한 징포족은 여전히 전통적인 화전 농업과 수렵을 병행하는 생계 방식을 유지했다.

 

룽안으로 이주해온 한족 첸이후들에게 모든 것이 그리 순조롭지 않았다. 정부와 징포족의 도움으로 가옥, 농지, 소와 산림을 확보하고, 공공 식당에서 잡곡과 산나물 위주의 급식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들은 여전히 새로운 생산과 생활 방식을 재건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각 이주민 팀이 차례로 룽촨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직면한 어려움은 "파바이쯔(發擺子)", 즉 말라리아(瘧疾)였다. 이는 열대 평야 지역에서 흔히 발생하는 질병이었다. 역사적으로 룽촨의 인구 밀도가 낮았던 주요 원인은 곧 열대 질병의 만연과 그러한 질병으로 인한 이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한족 이주민들의 고향에서는 룽촨 평야로 가려면 먼저 아내를 다른 집으로 시집 보내라(要到隴川壩, 先把老婆嫁)”는 말이 널리 전해졌다. 이는 룽촨 평야 지역의 열대 질병으로 생존이 어렵다는 점을 반영한 표현으로, 아내를 먼저 재가시켜야 한다는 절박한 결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주민들이 정착한 이후, 곧바로 이 속담에 담긴 과거 이민자들의 절박함을 실감하게 됐다. 춥고 건조한 산악 지대에서 덥고 습한 평야 지역으로 이주한 대다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열대 질병에 쉽게 감염됐다. 말라리아에 걸리면 온몸이 떨리고 한기를 느끼며 고열이 지속됐다. 초기에는 한두 명이 감염됐지만, 이후 감염자가 급속도로 늘어나 대다수로 확산됐다. 더군다나 한 번 감염되면 재발 위험이 높아져 장기적인 고통을 받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일부 첸이후는 말라리아의 만연과 열악한 생활 조건을 견디지 못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정부가 의료팀을 파견하여 소독 약물을 뿌리는 방역 작업을 진행한 후에야 상황이 점차 호전되기 시작했다.

 

당시 지방정부는 이주민 정착 지원을 위해 몇몇 전담 기구를 설립했다. 예를 들어, 장펑구(章鳳區, 현재의 장펑진)와 방와이촌(邦外村) 문화센터에 이주민 정착 지원 공작대(工作隊)가 설치됐다. 이 공작대들은 이주민들에게 임시 거소를 제공하고, 1인당 월 40(, 1=500g) 정도의 저가 곡물을 지급했다. 또한, 이주민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소와 농기구 등 생산 도구를 지원했으며, 1인당 월 12위안의 생활비를 대출금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착 초기의 생산 및 생활 조건은 여전히 매우 열악하여, 많은 이주민들은 몇 달 동안 고기를 한 번도 먹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정착 지원 공작대는 한족 이주민들에게 징포족을 따라 산으로 올라가 사냥과 산나물 채집을 하도록 권유하여 식생활을 개선하는 동시에 부업 수입을 늘릴 수 있도록 동원했다.

 

다행히도 룽안촌은 수계가 풍부하여 작은 하천과 개울에 물고기와 새우가 많았다. 심지어 강가 풀숲에서 손만 뻗어도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고, 물속을 걸어 다니면 발에 물고기가 밟힐 정도였다. 이 때문에 노동이 끝난 후나 농한기에 물고기를 잡는 일이 식생활을 개선하는 또 다른 방법이 됐다. 때로는 물고기가 너무 많아 바구니를 사용해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현금 수입이 매우 부족하여 각 가정에서 기름, 소금, 간장, 식초 등 필수 조미료조차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아무리 많은 물고기를 잡더라도 단지 배고픔을 달래는 용도로만 소비되었을 뿐, 이것이 제대로 된 식사가 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정착 후, 한족들은 룽안촌에서 약 160(, 1=666)의 논과 130무의 밭을 개간했다. 주로 벼, 옥수수, 땅콩, 밀을 재배했으며, 한때는 면화를 시험적으로 재배하기도 했다. 벼농사를 예로 들면, 한 모작이 시작되기 전에 남성 노동력은 논을 갈고 잡초를 제거하며 땅을 고르는 작업을 맡았고, 여성 노동력은 모내기 작업을 담당했다.

 

인민공사(人民公社) 체제 아래 농업 노동 성과는 노동점수제(工分制)에 따라 계산됐으며, 대개 노동 일수에 기반하여 노동점수가 산정됐다. 일반적으로 남성 노동력의 하루 노동점수는 8~10점으로 채점되며, 여성 노동력은 6~8점으로 계산됐다. 그러나 땅 갈기, 모내기, 수확 등 중노동에 대해서는 추가로 성과급 성격의 노동점수가 가산될 수 있었다.

 

남성 노동자들은 가산 점수를 얻기 위해 해가 뜨기 전에 이미 논에서 일을 시작하곤 했다. 이를 통해 공식적인 작업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10여 개의 가산 점수를 얻을 수 있었고, 이를 일당 성격의 일반 노동점수와 합산하면 하루 20점 이상을 벌 수도 있었다.

 

생산대는 구성원에게 노동점수 기록부를 지급하였고, 대원들은 대장의 지시에 따라 낮에는 몇 명씩 한 팀이 되어 각기 다른 장소에서 업무를 수행했다. 저녁이 되면 모두 한자리에 모여, 노동점수 기록원의 주도 아래 각자의 업무 수행 내용을 진술하여, 다른 구성원의 감독을 받으며 이를 공정하고 성실하게 기록부에 기록했다. 예를 들어, “35, 도로 정비, X” “42, 논둑 정비 Y과 같은 구체적인 업무 내용과 해당 점수가 기록부에 기록됐다.

 

생산대는 1년에 서너 차례 회의를 열어 모든 구성원이 모여 노동점수를 세밀하게 정산했다. 연말에는 각 가구의 노동점수 총합을 산출하고, 더 나아가 전체 인민공사의 노동점수 총합도 계산하여 이를 곡물 분배의 기준으로 삼았다.

 

곡물을 분배하기에 앞서, 다음 해에 사용할 씨앗, 정부에 납품해야 할 양곡(公糧), 그리고 자연재해나 전쟁 대비용 인민공사 비축량을 제외한 다음에 남은 곡물이 잉여 곡물이 됐다. 이 잉여 곡물의 총량을 전체 노동점수 총합으로 나누어 1점당 배분되는 곡물의 양을 산출했고, 이를 기준으로 각 가구의 노동점수 총합에 따라 계산하면, 가구별로 배분되는 곡물의 양이 결정됐다.

 

곡물 외의 기타 수입 창출 수단은 거의 없었다. 비록 황무지가 많았지만, 토질이 척박하여 넓게 경작해도 수확량이 적었다. 따라서 이주민들은 달걀과 오리 알을 팔거나, , 오리, 어린 돼지를 판매하여 소량의 현금을 마련했다. 농한기에는 대나무를 사들여 바구니, 광주리, 체 등을 만들어 시장에서 판매했다.

 

또한, 이들은 아침과 저녁의 휴식 시간을 활용해 풀을 베어 판매하기도 했는데, 당시 많은 마방(馬幫)들이 대량의 풀이 필요했다. 일부는 산에서 약재를 채취해 팔거나, 베개 속을 채우는 데 적합한 재료로 여겨진 판즈화(攀枝花, 목면 나무의 꽃)를 채취하여 판매했다. 이 외에도 저녁에는 집에서 등잔불을 켜고 야자 섬유와 삼으로 밧줄을 꼬아 시장에 내다 팔았다.

 

비록 앞서 언급한 현금 수입 창출 수단이 있었지만, 국경 지역의 불편한 교통과 열악한 유통 환경으로 인해 지역 특산물은 현지에서 저가로 판매될 수밖에 없었고, 많은 현금을 벌기는 어려웠다. 또한, 당시에는 배급 표증(票證) 제도가 시행되고 있어, 돈이 있어도 배급 표증이 없으면 상품을 구매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당시 공소사(供銷社, 생활소비 협동조합)조차 소금 재고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고, 비누 역시 줄을 서야 겨우 구매할 수 있었다.

 

시장에 유통되는 대부분의 상품은 국영기업과 공소사가 독점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쌀국수, 찐빵, 만두와 같은 일반 음식조차 국영 음식점에서 독점적으로 판매됐다. 일반 주민들은 시장에서 소량의 채소, 가금류, 가축, 달걀, 수공예품 등을 파는 정도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만약 국영기업이 독점하는 상품을 임의로 유통하다 적발될 경우, 경미하면 몰수로 끝났지만, 중대하다고 판단되면 투기 및 불법 거래죄(投機倒把罪)’ 처벌받아 형사 처분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경 너머의 미얀마는 자유로운 시장 거래가 가능했기 때문에 중국 국경 지역 주민들에게 현금 수입을 얻을 수 있는 매력적인 장소로 여겨졌다. 많은 국경 주민들이 위험을 감수하며 중국 상품을 몰래 미얀마로 들여가 판매했지만, 이 행위가 적발되면 감옥에 가는 중대한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1980년대 국영 제당기업이 설립된 이후, 정부는 사탕수수 재배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이에 따라 이주민들의 생활 수준은 크게 향상됐다. 상당수 1세대 이주민들은 사탕수수 재배가 산악 지역에서 아편을 재배하던 것보다 수익성이 훨씬 높고 더 나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이로써 사탕수수 산업은 이주민들의 생산 및 생활 조건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전환점이 됐다.

 

. 소결: 룽안촌의 장소성과 지역성(locality)

인문지리학적인 장소(place) 개념은 단순히 지리적인 위치(position)와 지형(landscape)에만 연관된 개념이 아니라 그 위치와 지형에서 삶을 영위하는 인간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특히, 인간들의 외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내적인 심정을 반영하는 장소에 대한 기억은, 해당 장소에 대해 끊임없이 감정과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감정과 의미의 부여는 또한 장소에 대한 애착(戀地情節)’2)이라고 칭한다. 결국, 수많은 인간의 집단적인 기억 속에서 그 장소에 관련된 독특한 장소성(sence of place)이 형성되고, 이 과정에서 현지인들의 집단적 감정과 의미가 지속적으로 누적되고 소환되며 재해석됨으로써 해당 장소를 특별한 의미를 지닌 지역(local)’으로 승화시켰다. 이는 곧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역성(locality)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룽안촌의 마을 형성 기억에서 두 가지 두드러진 집단적 기억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이주에 대한 기억이다. 인근 산악 지역에서 이주해 온 징포족이든, 량허와 텅충에서 이주한 한족이든, 모두가 고향, 이주 과정, 정착 과정과 관련된 풍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징포족과 한족의 집단적 기억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여러 측면에서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다. 초기 징포족이 한족에게 아낌없이 제공한 도움과, 한족 이주민들이 대규모 노동력을 투입해 음수와 관개라는 생계와 생활의 근본적인 제약을 해결한 공로는 민족 간 단합을 강화하고 마을공동체의 구심력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이러한 과정은 룽안촌에 대한 주민들의 애착이라는 집단적 감정을 더욱 고양시키는 계기가 됐다.

 

둘째, 산악 지역 주민들을 국경 평야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이주 동원 정책, 이주민들의 정착 지원과 농업 개발 독려, 이와 병행되었던 군대 농장의 개간은 모두 국가 권력이 주도한 이주와 개발의 일환으로, 마을 주민들의 집단적 기억에서 중요한 구성 요소로 자리 잡았다.

 

이민실변(移民實邊, 이주를 통한 국경 안보 강화)’이민흥변(移民興邊, 이주를 통한 국경 지역 경제 개발)’이라는 정책 목표 아래, 산악 지역의 다양한 민족이 동원되어 국경 지역으로 이주하며 새로운 생활 공동체를 형성하고 새로운 생계 방식을 시작하게 됐다. 이는 국가 권력이 주민들의 일상생활에 강력하게 개입한 구체적인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동원된 주민들은 당시 다양한 위험과 고난을 감수하고 정착 초기의 빈곤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어려움을 국가의 지시에 응한 것으로 집단적 기억 속에서 스스로 재해석하고 있다. 이는 국가 권력이 강력하게 개입하더라도, 그 개입이 생활과 생계의 실천 과정에서 이미 내면화되었음을 보여준다.

 

환언하면, 마을 주민들의 집단적 기억에서 국가 권력의 개입이 독점, 금령, 법규, 형벌과 같은 강압적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더 많은 경우가 라오궁바오와 같은 마을 간부나 이주민 정착 지원 공작대와 같은 기층 집행자들을 통해 장기적이고 인간적인 감정이 가득 채워진 상호작용 과정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러한 과정에서는 룽안에 대한 이주민들의 집단적 애착(戀地情節)이 점차 형성됐다.

 

집단적 감정과 기억은 집단적 인식과 행동을 생산한다. 앞서 언급한 룽안 주민들과 인근 군대 농장 및 주변 마을 간의 토지 분쟁은 이러한 집단적 인식과 행동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룽안의 지역성(locality)이 처음으로 경계의 정치라는 형태로 드러난 순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계의 정치로 반영되는 지역성은 이후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났으며, 중국-미얀마 국경 관리의 강화와 함께 더욱 공고해졌다.

 

따라서 룽안촌은 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형성된 마을이고,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마을이지만, 에반스-프리차드(E. E. Evans-Pritchard)누에르족(The Nuer)에서 정의한 부족(tribe)의 개념3)으로 이를 설명해도 무방하다. , 룽안촌은 중국이 국경 강화라는 정책 목표에 따라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강한 집단적 감정과 기억, 그리고 강한 지역성(locality)을 지닌 현대적 국경 부족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리페이 _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중국학술원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참고자료

1) 왕위에핑·장정아·안치영·녜빈 지음, 2022, 『국경 마을에서 본 국가』, 인터북스

2) 장소에 대한 애착은 특정 장소와 맺는 정서적 유대 관계를 의미한다. 물리적 환경과 인간 사이에는 정서적 유대가 존재하며, 이 유대의 강도, 친밀성, 표현 방식은 상황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유대는 촉각에서 비롯될 수 있는데, 예컨대 바람, , 흙을 만질 때 느끼는 즉각적인 기쁨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정서적 유대는 더욱 지속적이고 심층적이며, 구체적으로 표현하기가 매우 어렵다. 段義孚著志丞劉蘇譯:《戀地情結》,北京商務印書館2018

3) 에반스-프리차드는 누에르족에서 부족(tribe)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공통적이고 독점적인 이름을 가짐, 공통된 감정을 공유함, 공통적이고 독점적인 영역을 보유함, 전쟁 시 단합하여 공동 대응할 도덕적 의무가 있음, 중재를 통해 내부적 분쟁을 해결할 도덕적 의무가 있음…(埃文斯·普理查德著儲建芳閻書昌趙旭東譯:《努爾人——對尼羅河畔一個人群的生活方式和政治制度的描述》,北京華夏出版社200214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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