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동아시아에서 최초의 계엄 사례는 1890년대 메이지 헌법이 시행되면서 계엄 제도가 법적으로 명문화되면서,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 내 일부 지역에서 군사적 비상조치가 계엄과 유사한 형식으로 발동된 사례를 들 수 있다. 동아시아의 두 번째 계엄 사례는 1904년 러일전쟁 시기로 일본 정부가 본토와 대만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한 사례이며, 대만 지역에 내려진 최초의 계엄 사례이기도 하다.
사진 1. 대만의 계엄 포고령
중국에서도 1908년 《대청헌법안(大淸憲法案)》에 계엄 조항을 포함한 사실이 있으며, 1912년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중화민국 임시약법(中華民國臨時約法)》에도 계엄 조항을 명기한 사례를 볼 수 있다. 이후 1926년부터 북벌이 시작되면서 장개석은 1926년 7월 1일에 동원령을 선포했으며, 이 동원령의 세부 내용을 보면 전시 국가를 상정하고 있었다. 이 동원령은 사실상 계엄령과 다를 바 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북벌 기간뿐만 아니라 제1차 국공내전 기간 내내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1936년 서안사변 당시 장개석의 구금에 앞장섰던 장학량과 양호성, 그리고 장개석과 면담하기 위해 서안에 왔던 주은래가 장개석에게 정치범의 석방과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정치적 참여의 확대 등을 요구한 것을 보면, 이때까지도 장개석은 계엄령과 다름 없는 상황을 유지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제2차 국공내전 기간 중인 1948년 12월 10일에 장개석은 계엄령을 정식으로 선포하였다. 이 계엄의 선포 지역은 신강, 청해, 서장, 대만 등지도 포함된 전국적 규모의 계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947년 대만에서 2.28 사건이 발발하면서 일본에 이어 중화민국 정부 역시 대만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일본의 항복 이후, 대만은 일본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났으나 곧바로 국민당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의 부패와 강압적인 통치에 대만인들의 불만이 점점 쌓이고 있었고, 1947년 2월 28일, 담배 밀매 단속 과정에서의 경찰의 폭력 행위가 민중 봉기로 이어지며 대만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2월 28일, 대만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며, 점차 고웅(高雄), 기륭(基隆), 가의(嘉儀) 등지에도 계엄령이 선포되어 대만의 모든 지역에 있는 사회단체의 해산과 언론, 시위가 금지되었다. 이때 계엄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나온 것은 물론 수많은 정치 인사와 교사, 학생이 정치범으로 낙인찍혀 감옥으로 보내지기도 했다. 2·28 사건으로 인해 발포된 계엄은 같은 해 5월 16일에 종료되지만, 당시 국민당 군대에 의한 소탕 작전인 청향(淸鄕)이 남긴 피해는 대만인에게 큰 상처로 남겨지게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정치 분열의 바탕이 되었다.
이후 제2차 국공내전이 발발하고 1948년 국민당 정부는 1949년 중국 본토에서의 공산당 승리로 대만으로 퇴각하게 된다. 이른바 국부천대(國府遷臺) 이후 1949년 5월 19일에 임시대만성정부주석 및 대만경비총사령관 진성(陳誠)의 명의로 전시 계엄령(臺灣省政府、臺灣省警備總司令部佈告戒字第一號)을 선포한다. 5월 20일 00시를 기점으로 대만 본섬과 팽호 등 도서 지역을 포함한 대만 전역이 계엄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정치적 반대 세력을 철저히 탄압하고 공산주의 활동에 대한 엄격히 단속이 시행되었다. 이 계엄은 1987년까지 38년 동안 계엄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는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계엄 중 하나로, 1967년부터 2011년까지 이어진 시리아의 계엄 사례보다 길다. 이 시기는 현재 국민당 정권의 권위주의 통치로 인한 백색공포(테러) 시기로 규정되기도 한다. 일례로 1949년 계엄이 발효됨에 따라, 이로 인해 모든 공무원에게는 임용과 처벌 등에 연좌제가 적용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거의 모든 대만의 민간 기관에도 적용되면서 사회의 기본 검열 제도로 정착되기도 했다.
계엄을 해제하려는 정치권의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계엄 초기인 1952년, 1957년, 1960년, 1961년, 총 네 차례 대만 입법원(우리의 국회)에서 계엄 해제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 이 요구는 현재 대만은 전쟁 상태에 있지 않고 적국의 군사적 위협도 받지 않고 있으니, 계엄은 필요가 없으며, 민주 자체가 공산 국가에 대한 정치 선전의 무기가 될 수 있으니 이제 계엄을 해제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히면서 정부 측에 이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입법위원의 계엄 해제에 대한 요구가 있을 때마다 정부 측은 반박했다. 관련 기록을 보면, 앞의 1952년과 1957년에는 국방부 인사가 계엄 해제 요구에 대한 반박을 진행했고, 뒤의 1960년과 1961년에는 행정원 측에서 반대한 사례가 있다. 흥미로운 점은 계엄 해제에 대한 국방부와 행정원의 반대 이유가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점에 있다. 먼저 1950년대 국방부의 반박은 주로 군사적 위협과 침공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고 계엄이 아직 전면적으로 실시되지 못한 상태니 지금 당장은 계엄 해제를 할 수 없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반면, 1960년대 이후 행정원의 반박은 다른 명분으로 진행되었다. 행정원 측은 이미 계엄 상태가 이어져 이에 따른 사회, 군사 체제가 굳혀졌으니 갑자기 계엄을 해제하게 되면 사회의 혼란이 초래되고, 이때를 틈타 적국이 침공할 수 있다는 점을 든 것이다. 즉, 장기간 지속된 계엄 체제가 사회에 고착되어 정치·사회 전반의 기본 원칙으로 굳어졌다는 점을 들어 계엄 해제를 거부한 것이다. 이러한 대만의 사례를 보면, 일시적인 계엄이란 것은 없으며 계엄 체제가 한번 사회에 정착되고 나면 돌이키기 쉽지 않다는 점을 알려준다.
이후 대륙에서는 등소평이 집권하고, 개혁개방 정책을 비롯해 삼통정책 등 대만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장경국은 삼통정책에 삼불정책으로 대항하면서, 일국양제에 비협조적인 정책을 전개했다. 그러나 대륙과 대만의 분위기는 화해 모드로 들어가는 상태였으며, 이전 중화민국 정부가 내세우던 반공 정책 역시 설득력과 실효를 점차 잃어가게 되었다. 여기에 대만 내부에서도 미려도 사건(美麗島事件), 중력 사건(中壢事件), 5.19 녹색 행동 등과 같은 정치 사건이 발생하고, 민주화에 대한 대만 민중의 요구가 점점 거세짐에 따라 장경국 역시 정권 유지와 사회 안정을 위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대만 총통 장경국은 유국화 행정원장과 정위원 국방장관의 공동서명으로 1987년 7월 14일에 15일 0시을 기점으로 계엄령 해제를 선포하면서 38년 2개월 만에 대만의 계엄령은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1991년 금문도 포격의 위기로 인해 금문 지역에 한정된 임시계엄이 있었으며, 이 계엄이 1992년 11월 7일에 해제된 것을 기간에 포함한다면 포괄적 의미에서 대만의 계엄은 해제까지 43년이 걸렸다.
사진 2. 대만의 계엄 해제령
김봉준 _ 인천대 중국·화교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중국학술원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 참고문헌
(臺灣)行政院, 『公報』(行政院公報資訊網, nat.gov.tw)
内閣法制局, 「戒厳及準戒厳の先例」, 明治27年10月05日.
若林正丈, 『戰後臺灣政治史』(第二版), 臺大出版中心, 2017.
薛化元,『戰後臺灣歷史閱覽』, 五南出版社,2010.
鄭大發, 「重評《欽定憲法大綱》」, 『湖南師範大學社會科學學報』 1987年 第6期.
陳儀深, 「臺獨主張的起源與流變」, 『臺灣史硏究』 17-2, 2010.
荒邦啓介, 「昭和10年代後半の戒嚴硏究」, 『憲法硏究』, 第53号, 2021.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2. 臺史博線上博物館 國立臺灣歷史博物館 (https://the.nmth.gov.t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