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최초로 부설된 철도는 영국자본으로 부설된 오송철도이다. 그러나 철도가 완공되고 머지 않아 청조가 이를 매입한 후 철거하였기 때문에 이후 중국 철도의 발전과 연속성을 가지지는 못하였다. 중국이 스스로의 자본과 역량으로 부설한 최초의 철도는 1881년 11월 8일에 개통한 당산에서 서각장에 이르는 총연장 9.7킬로미터의 당서철도이다.
사진 1. 1881년 11월 8일에 개통한 당서철도
청조 말기 근대적인 군사설비로 무장한 북양해군은 기선을 운행하기 위해 석탄의 채굴과 공급이 필요했으며, 이와 함께 근대적 기업인 윤선초상국과 천진기기창을 가동하기 위해서도 석탄의 공급이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이에 직예총독 이홍장은 윤선초상국 총판인 당경숭으로 하여금 자본을 모집하여 개평현 당산에서 기계로 채굴하는 개평매광공사를 창설하도록 하였다. 개평탄광은 하루 석탄 생산량이 800-900톤에 달하였으나, 외부로 운반할 수 있는 교통이 매우 불편하였다. 이에 당경숭이 이홍장에게 철도를 부설하여 운반을 편리하게 하도록 건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당산의 개평탄광에서 생산된 석탄은 탄광에서 가장 근접한 북당해구까지 운반하여 선박에 선적해야 했다. 1879년 이홍장은 당산에서 북당에 이르는 구간에서 석탄을 운반하기 위한 철도를 부설해 주도록 청조 중앙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홍장의 요청은 이내 청조 내 수구적인 대신들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하였다.
개평광무국은 어쩔 수 없이 운하를 파서 선박편으로 석탄을 실어 나르는 방안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서각장에서 탄광에 이르는 구간은 지세가 매우 험준하여 운하는 탄광에 이르지 못하고 서각장까지만 준설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이에 철도 노선을 단축하여 당산에서 서각장에 이르는 구간에만 철도를 부설하고, 서각장에서 염장에 이르는 구간은 운하를 파서 기존의 계운하와 연결하여 북당해구로 통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청조는 당산에서 서각장까지 부설되는 철도의 예산을 편성하였다. 그러나 조정 내의 수구대신들은 열차가 운행될 경우 진동으로 말미암아 당산 준화 마란곡의 동릉에 모셔져 있는 선왕의 위패를 어지럽히고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빌미로 철도의 부설에 적극 반대하였다. 이에 청조는 철도가 완공된 이후 기관차를 대신하여 노새와 말이 열차를 견인하는 조건으로 철도의 부설을 승인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세인들은 이 철도를 노새와 말이 끈다고 하여 ‘마차철도’라 불렀다.
철도 부설을 앞두고 먼저 철도 궤간을 정하는 일이 시급하였다. 철도 궤간을 두고 크게 세 가지의 주장이 서로 대립하였다. 첫 번째, 경비를 절감하자는 취지에서 2.5피트(0.762밀리미터)의 협궤 경편철도로 부설하자는 주장이었다. 두 번째는 당경숭 등의 의견으로서, 5.6피트(1067밀리미터)의 일본식 궤간으로 부설하자는 주장이었다. 세 번째는 총공정사 킨더의 의견으로서, 표준궤로 부설하자는 주장이었다.
킨더는 비록 당서철도가 광산철도의 짧은 구간이기는 하지만, 이후 반드시 방대한 중국 철도네트워크의 한 구간이 될 것이다. 따라서 협궤로 부설할 경우 부설 경비를 다소 절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장래 중국철도의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이홍장은 킨더가 주장한 영국식의 표준궤 레일로 부설하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1881년 6월 9일 당산에서 서각장에 이르는 철도의 부설이 개시되었으며, 9월에 이르러 준공식을 거행하고 11월 8일에 정식으로 열차를 개통하였다. 1미터당 15킬로그램의 강철 레일을 사용하였으며, 총 11만 량의 비용이 소요되었다. 이후 중국철도는 대부분 당서철도와 동일한 표준궤를 채택하였다.
황릉을 진동시키고 훼손한다는 이유로 개통 첫 해에 노새와 말을 동력으로 열차를 운행하였다. 그러나 기차의 속도가 지나치게 느리자, 킨더는 탄광에서 구할 수 있는 낡은 보일러 및 도르래, 수직 갱탑의 철골 등 온갖 자재들을 수집하여 암암리에 소형 경편기관차를 설계하여 제작하고 시험 운행하였다. 기관차는 중국로켓호라고 명명되었으며, 이것이 중국에서 제작된 기관차의 효시가 되었다.
기관차는 길이가 5.69미터로서 100톤을 견인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로켓이라는 명칭은 영국 스티븐슨이 최초로 제작한 기관차의 명칭이다. 그러나 중국 노동자들은 로켓이라는 명칭 대신에 기관차 양 측면에 용호(龍號)라는 명칭을 새겨 넣고, 이를 용호라 명명하였다. 당서철도는 명실상부하게 중국인이 스스로의 역량으로 부설한 중국 최초의 철도가 되었다.
당서철도는 부설 이후 개평탄광에서 생산된 석탄을 운송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883년 한 해에 개평탄광에서 각 항구로 운송된 석탄의 수량은 총 8,503톤에 달하였다. 1886년에는 무려 3만 3,677톤으로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같은 시기에 천진항으로 수입된 외국산 석탄은 9,728톤으로부터 301톤으로 크게 감소하였다. 이러한 수치는 철도의 부설과 운영이 중국 사회와 경제의 발전에 얼마나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는지 대내외에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당서철도가 완공된 이후 각 지역에서 철도의 부설이 크게 증가한 사실은 당서철도가 중국철도의 발전 도상에서 가지는 의의를 잘 말해주고 있다.
【중국문화오디세이 15】
김지환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당시 카이펑 탄광 (meipian.c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