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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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젬핑 동(Zem Ping Dong)과 전후 미국의 중국인 별거 아내, 전쟁 신부들 _ 정은주

세계 제2차 대전과 전후 시기는 미국 정부의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가 변화하고 그에 따라 대중의 자국 내 아시아계에 대한 인식도 변화한 시기이다. 1941년 진주만 공습 이후 루즈벨트 대통령이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함과 동시에, 미국 내 일본인은 남녀노소 모두 일본과 연관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강제수용소에 감금되었다. 반면 미국에 거주하던 중국인들은 필리핀인과 함께 미군에 편입되어 일본, 독일에 맞서 싸우게 되었고, 대체로 이들은 외국인인 상태에서 징병되어 미군에 편입되고 미국 시민이 되었다. 뉴욕시 서베이에 따르면 전쟁 기간 중 중국계 인구의 약 40%가 징병에 응했는데, 이는 미국 내 민족집단 중 가장 큰 비중이었다. 이와 함께, 1941년 고용에서의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이 선포되어 과거 법적 이방인에게 금지되었던 방위산업 등 모든 경제 행위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수많은 중국인 세탁업자와 식당 종업원들은 차이나타운 경제를 벗어나 좀 더 나은 임금의 산업 일자리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전 시기 이단, 쥐 먹는 집단, 시민이 될 자격 없는 이방인등으로 악마화됐던 중국인들에 대한 인식은 1949년 갤럽 조사에서는 열심히 일하고 정직하며 용감하고 지적이며 현실적이라는 완전히 변화된 성격 규정으로 드러났다. 뉴욕 차이나타운의 한 2세 중국인이 이제야 아메리칸 드림의 일부가 된 듯하다. 전혀 다른 시대가 열렸고, 우리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다”(Takaki 1989: 373 재인용)고 토로할 만한 변화였다.


이러한 변화는 일련의 법과 이민정책을 통해 공고화되었다. 연합군 중국에 대한 선의의 제스추어로 중국인 관련 이민 정책이 재정비되었는데, 1943년 중국인을 배제하는 기존의 모든 법령이 무효화되며, 중국인 이민자에게 귀화할 자격이 주어졌고 매년 약 100여 명의 중국인 입국이 허용되었다. 무엇보다 전후에 공포된 일련의 이민법령은 1945년부터 이민법 개정으로 아시아인 이민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1965년 이전까지 아시아인의 미국 이민에서 여성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게 되는 흐름을 형성했다. 1945년 제정되어 1949년 말 만료된 전쟁신부법(War Brides Act)에 의해 약 6천 명의 중국계 미군이 고향에서 결혼한 후 신부를 미국에 데려올 수 있었고, 1946년 미국 시민의 아시아인 배우자를 받는 데 제한을 두지 않는 법(nonquota immigrants)에 의해, 군인 외, 시민권을 얻은 중국인들도 오래 별거했던 아내를 불러올 수 있었다. 미군 주둔지였던 일본과 한국, 필리핀의 전쟁 신부들이 대체로 비아시안 미국인과의 결합이었던 반면, 중국인 전쟁 신부의 경우 거의 중국계와 결혼한 여성들이어서 이들의 유입은 중국인 커뮤니티 내 불균형한 성비를 크게 좁히며 가족 단위 중국인 이민사회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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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독신 남성 위주로 오래 이어져왔던 중국인 이민사회는 아내, 아이들과 결합한 가족지향적, 젠더균형적 삶을 위한 준비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했다. 미국에 도착한 여성들은, , 사회복지, 취업과 위생 상태가 좋아지지 않은 상태에서, 부엌이나 목욕시설도 제대로 없는 방 하나짜리 독신 남성 거주지를 급히 개조한 곳에 살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편의 변변치 않은 수입으로 살기 힘들어 언어와 문화가 익숙지 않고 인종차별이 여전한 상태에서 차이나타운의 레스토랑이나 열악한 작업장에서 최소 임금 이하를 받으며 장시간 일해야 했다. 2세 중국계 영화감독 아더 동(Arthur Dong)이 기록한 어머니 젬핑 동에 대한 다큐멘터리 <바느질하는 여성들 Sewing Women(1982)>은 전후 수많은 중국인 이민 여성들이 겪은 고난한 삶의 면면을 잘 보여준다키울 여력이 없어 여동생들이 다 버려진 중국 농촌 가정에서 자란 젬핑 동은 캘리포니아 금광을 찾아 미국으로 간 이에게 13세에 시집보내진 후, 중일전쟁 기간과 이후 내내 남편과 헤어져 지내다가, 2차대전 후 별거 아내의 대열에 섞여 남편과 미국에서 재회했다. 말이 통하지 않고 별다른 기술이 없지만, 생존을 위해 의류공장에서 일하게 된 그녀의 미국에서의 삶은 내내 재봉기계에 묶여있던 시간으로 소회된다: “아직도 기억나, 애 하나는 업고, 한 발은 재봉틀 페달 밟아대고 다른 한 발은 아들 재우느라 흔들의자 흔들어대고... 애 우는 데 신경쓰다가, 일하다가 조느라, 옷감 대신 내 손가락을 꿰맸던 적도 많았지”(Yung 1986:81 재인용). 1946년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과 재회한 또 다른 별거 아내 리와이란(Lee Wai Lan)벽돌 두 개 사이에 구멍 뚫린 게 화장실인 더러운 집을 보고 죽고 싶었지만 가족의 생존을 위해 차이나타운 중국식당에서 설거지하고 채소 다듬는 일에 추가노동 수당이나 의료보험 혜택같은 것 없이 일생을 매진했다. 18년에서 25년 장기간 남편과 떨어져 살았던 별거 아내들도 많았는데, 남편이 아내 부재 시 터득한 요리, 다림질, 장보기 등을 하며 노동 성분업을 재조정한 경우도 있었지만, 별거 이민생활 중 남편의 습관이 된 음주와 도박 때문에 갈등이 빚어진 경우도 많아, 생존의 압박과 새로운 삶, 남편에 환멸을 느끼고 다시 중국에 돌아간 이들도 많았다. 전쟁 신부들 역시 신부를 구하러 고향에 왔던 이와 잠깐 만난 후 결혼한지라 남편과 친해질 기회가 없었으나, 대체로 별거 아내들보다 10여년 가량 어린 세대로서, 서구식 의상과 머리스타일을 하고 영어 이름을 채택하며 밖에서 남편과 손을 잡는 등 미국에서의 생활에 상대적으로 용이하게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독신 남성 이민사회에 팽배했던 술과 도박 혼외관계의 습성은 전쟁 신부의 가정에서도 문제로 드러났다. 이 시기 독신 남성 위주에서 가족 단위의 삶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별거 아내와 전쟁 신부들의 삶은 고된 노동과 불안, 좌절, 분노로 채워졌다. 한편, 재미 중국인 커뮤니티에 이들 여성의 유입은 미국 시민으로 성장하는 중국계 2세를 양산하기도 했다.


1940년대와 1950년대 전후의 재미 중국인 사회는 전쟁이 초래한 국제관계의 변화와 이민법 개정과 더불어 전시의 노동력 부족에 힘입어 중국계가 일할 수 있는 영역이 확대되고 사회적 편견이 축소되면서 중국계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나아지고 정상적인 가족 단위의 정착 생활이 시작된 시기이다. 미국에서 나고 자랐어도 이 시기 젊은 중국계 여성들은 여전히 가족 내에서의 성차별과 미국 사회에 뿌리박힌 아시안 아메리칸 여성에 대한 성적 고정관념과 싸워야 했지만, 중국계의 베이비붐으로 등장한 2세 중국인 남녀 가운데에는 중산층으로 성장하는 이들도 상당수 등장하게 된다. 이들과 더불어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된 후 중국 북동부에서 망명한 남녀가 중국계의 중산층 성장을 주도했다. 이들은 1948년과 1953년의 난민구제법(Displaced Persons Act of 1948, Refugee Relief Act of 1953)에 의해 미국에 정치적 도피처를 마련하게 되는데, 교육수준이 높고 이전의 해외 경험으로 서구의 개념에 익숙하여 학계와 전문직에 진출하고 오히려 쉽게 미국사회에 통합되었다. 이들은 사회경제적으로 성공한 2세들과 더불어 중국계 미국인 중산층을 형성하며 교외에 거주지를 형성하기 시작했으며, 차이나타운 중심의 과거 중국인 이민자들과 어울리지 않으면서 중국계 미국인 사회는 계급적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미국의 중국인 6

정은주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

 

                                      


* 참고자료   

Takaki, R. 1989. Strangers from a Diferent Shore: A History of Asian Americans. Boston: Little, Brown.

Yung, J. 1986. Chinese Women of America: A Pictorial Essay.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Dong, A. 1982. Sewing Women, Documentary fil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