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1. 명대 구영(仇英) <도화원도(桃花源图)>(부분),
비단에 채색, 33*427cm, 미국 보스턴미술관 소장
이상적인 사회를 의미하는 유토피아라는 용어는 영국 토머스 모어(Thomas More)의 소설 <유토피아(Utopia, 1516년)>에서 유래했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로 ‘어디에도 없는 곳’을 뜻한다. 상상으로만 가능할 뿐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유토피아를 이해하는 전제조건이다. 한자문화권에서 유토피아의 대체어는 도화원이다. 동진의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이 <도화원기병시(桃花源記幷詩)>에서 그려낸 복사꽃 핀 마을이다.
진나라 태원(太元) 연간의 일이다. 무릉(武陵)군에 고기 잡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시내를 따라 가다가 길을 잃었다가 문득 복사꽃이 활짝 핀 숲에 도달했다. 좁은 물가 수백 보 길이에 나무 하나 없이 신선한 향초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고 꽃잎이 분분히 떨어졌다. 어부는 심히 이상하게 여기며 다시 앞으로 나아가 숲의 끝까지 가려 했다. 숲은 물이 솟아나는 곳에서 끝났다. 거기엔 산이 하나 있고 작은 동굴이 있었는데 동굴 속에서 밝은 빛이 나오는 것 같았다. 어부는 배에서 내려 입구를 따라 들어갔다. 처음엔 너무 좁아 겨우 사람이 들어갈 정도였는데 몇 걸음 더 걸어가니 갑자기 환한 길이 열렸다. 땅은 평탄하고 넓었으며 집들은 반듯하게 늘어서 있고 기름진 전답, 아름다운 연못, 뽕나무와 대나무가 있었다. 논밭의 두렁은 서로 이어지고 개와 닭의 울음소리를 서로 들을 수 있었다. 왕래하며 경작하는 사람들을 보니 남자나 여자나 입은 옷이 다른 세상 사람 같았다. 누런 머리 노인이나 더벅머리 아이나 모두 편안하고 즐거워 보였다. 어부를 보고 크게 놀라 어디서 왔느냐고 묻기에 그들에게 대답했다. 그들은 서로 자기 집으로 오라고 청하며 술을 준비하고 닭을 잡아 식사를 대접했다. 마을에 이런 사람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들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한 사람이 말하기를 “조상들이 진나라 때 난을 피해 처자식과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이곳에 왔다가 다시 나가지 않았더니 바깥세상과 멀어졌습니다”라고 했다. 지금은 어느 시대냐고 묻는데 한나라도 알지 못하고 위나라, 진나라는 말할 것도 없었다. 어부가 하나하나 들은 바를 다 말해주었더니 모두 탄식하며 아쉬워했다. 다른 사람들도 각각 자기들의 집으로 초청했는데 모두 술과 음식을 내놓았다. 며칠을 머문 후 가겠다고 말하자 그 중 한 사람이 말하길 “바깥사람들에게는 말하면 안됩니다”라고 했다. 어부는 동굴을 나가서 자기의 배를 찾아 원래 왔던 길을 따라 나오며 곳곳에 표시를 했다. 군에 도착한 후, 어부는 태수를 찾아가 이런 사정을 이야기했다. 태수는 곧 사람을 보내 어부를 따라 가도록 했는데 나오면서 표시한 것을 찾았지만 헤매기만 할 뿐 끝내 다시는 길을 찾지 못했다. 남양의 유자기라는 사람은 절개가 높은 사람인데 그 이야기를 듣고 기뻐하며 찾아가려고 했으나 찾지 못하자 결국 병을 얻어 죽었다. 그 후에는 이곳을 찾는 사람이 없었다.
제목에 기병시(記幷詩)라고 되어 있는데 산문과 시를 함께 썼다는 뜻이다. 위 내용은 서문에 해당되는 산문이고 뒤에 32구 분량의 오언시가 있다. 주인공이 무릉 사람이라 도화원을 무릉도원이라고도 부른다. 서울 부암동에 무계정사가 있고, 강원도 동해시에도 무릉계곡이 있다.
이야기 속에서 도화원을 발견한 사람은 어부이다.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생계를 도모하는 직업이다. 서양의 고전소설에서도 유토피아를 발견하는 사람은 주로 여행자다. 1933년 영국 작가 제임스 힐턴(James Hilton)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에서도 주인공은 비행기 불시착으로 티베트에 있는 신비한 국가 샹그릴라에 도착한다. 샹그릴라도 생활의 고통과 근심이 없는 이상향의 대명사가 되었다. 언제든 자신의 공동체와 생활의 터전을 떠날 수 있어야 새로운 세계를 발견할 수 있는가보다.
사진 2. 영국 제임스 힐턴(James Hilton)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 1933년
어부가 발견한 마을은 노자가 말한 ‘소국과민(小國寡民, 영토가 작고 인구가 적음)’이 구현된 곳이다. 마을의 이쪽 끝에서 나는 개와 닭의 울음소리를 저쪽 끝에서 들을 수 있는 작은 사회다. 논밭을 경작하여 밥을 먹고 누에를 쳐 옷감을 짜며 자급자족을 실현한다. 낯선 나그네를 이집 저집 돌아가며 대접하는 착한 사람들. 바깥 세상과 철저히 단절됐지만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오히려 세상에 알려질까봐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부탁까지 한다.
통치자가 없으니 세금도 없고 분에 넘치는 생산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노자>는 훌륭한 통치자의 덕목을 이렇게 말했다. “최고는 그가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것이다.(太上不知有之태상부지유지)” 통치자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백성들이 모른다니. 법과 제도가 없어도 생계에 아무 지장이 없다는 말이다. 신분의 귀천도 없으니 모두가 평등하고 어른이나 아이나 행복하다. 함께 일하고 함께 수확을 나눌 뿐 생산물의 소유를 다투지 않는다. 한국 영화 <웰컴 투 동막골>(2005년)을 보면 북한 군인이 동막골의 원로와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부락을 잘 다스리는) 위대한 영도의 비결이 뭐요?” 수염이 하얀 노인은 대답했다. “많이 먹여야지, 뭐.”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그만이다. 평화를 뜻하는 ‘和(화할 화)’는 ‘禾(벼 화)’와 ‘口(입 구)’를 붙여 만들었다. 쌀과 입의 결합이다. 옛날 사람들은 평화라는 개념을 글자로 표현할 때 왜 쌀과 입을 결합했을까? 입에 밥이 들어가야 평화가 오기 때문이다. 먹을 게 부족하면 남의 것을 빼앗아 내 입에 넣어야 한다. 전쟁이다.
도연명이 도화원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욕심 없는 순박한 본성일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인간의 순박함을 파괴하는 가장 큰 요소는 정치다. 도화원 사람들은 진나라 때 전쟁을 피해 이곳에 왔다. 바깥 세상은 뺏고 속이며 이익을 추구하지만 그들은 외부와 단절되었기 때문에 순박하게 살아간다. 옛날 옷을 입고 옛날 예법을 지키며 바깥 세상이 한나라인지 진나라인지도 모른다. 정치 때문에 순박함을 잃었는데 정치가 없는 세상에서 살다보니 순박함을 회복했다.
<도화원기>에는 두 가지 세계가 있다. 하나는 속이는 세계이고 또 하나는 순박한 세계다. 이 순박한 세계는 마음이 착한 사람만 갈 수 있다. 어부는 길을 잃어버리고 문득 도화원을 발견했다. 도화원으로 가려면 ‘잃어버림’과 ‘문득’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아야 이 세계가 보인다. ‘문득’은 무심의 상태다. 아무런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어부는 이 마을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부는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태수에게 알리고 관리들과 도화원을 찾아나섰다. 왜 그랬을까? 공을 세우려는 마음 때문이다. 이때는 벌써 탐욕이 생긴 것이다. 태수에게 상을 받으려는 욕심, 이익을 얻으려는 욕심이다. 탐욕에 빠진 어부는 당연하게도 도화원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다.
도화원은 사실 우리와 가까운 곳에 있다. 강 건너 지척의 거리다. 욕심을 버리면 언제든 갈 수 있다. 순수한 마음으로 복사꽃 둥둥 떠가는 물길을 따라가면 된다. 푸른 숲이 끝나는 곳에 동굴이 있고 어디선가 환한 빛이 비추면 도화원이 나온다. 얼마나 환상적이고 낭만적인가. 하지만 도화원은 인격이 있고 신비한 능력을 가진 생명체다. 스스로 문을 열고 스스로 닫는다. 어부가 무욕의 마음일 때는 문을 열고 그를 받아들였지만 그가 탐욕을 갖자 문을 닫았다. 동화 속 이야기 같다. 이렇게 환상적인 묘사 방식을 사용한 것은 도화원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도연명은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여자엄등소(與子儼等疏)>에서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어려서 거문고와 글을 배우며 이따금 한적함을 즐겼는데, 책을 펴서 읽다가 얻는 바가 있으면 즐거워 밥 먹는 것을 잊고는 했다. 나무에 녹음이 우거지고 철새 소리가 바뀔 때도, 또 다시 매우 기뻐했다. 나는 늘 말하기를, 오뉴월에 북창 아래에 누워 서늘한 바람이 간혹 스쳐 지나갈 때면, 나는 복희씨 때의 사람인가 하고 자주 말하곤 했다.” 복희씨는 삼황오제 이전의 신화 속 인물이다. 부와 명예, 사회적 성공을 추구하지 않고 내면의 순수함을 성찰하는 삶이 그에게는 가장 즐거운 기억이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태고 시대에나 가능한 것이다. 사회는 복잡하고 인간은 변하기 마련이니 이런 세상은 환상 속에만 존재한다. 어떻게 어린 시절의 진실과 순수함을 끝까지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
도연명이 그려낸 도화원은 무욕의 상징이지만 현실은 다르다. 현재 중국에서 자신들이 도화원의 실제 모델이라고 주장하는 지역은 일곱 곳 정도 되는데 그 중 충칭시 유양(酉阳)현과 후난성 창더(常德)시의 타오위안(桃源)현 두 곳이 유명하다. 이 두 지역은 도화원 관련 상표권 분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며 서로의 상표등록 신청을 취소해야 한다고 설전을 벌인 바도 있다. 경제적인 이익 때문이다.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에서 유토피아로 묘사한 샹그릴라도 마찬가지다. 샹그릴라도 소설 속 가상의 공간이지만 엄청난 지명도를 가진 명칭이다보니 윈난성 디칭(迪庆), 누장(怒江), 리장(丽江), 쓰촨성 다오청(稻城) 등 많은 지역이 이 지명을 차지하려고 경쟁했다. 이 사안은 결국 2002년 중국 국무원이 디칭(迪庆) 소재 중뎬(中甸)을 샹그릴라로 비준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중뎬(中甸)이라는 지명은 샹그릴라로 개명했고 한적한 시골 마을이 세계적인 관광 명소가 되었다.
도화원이 훗날 분쟁의 소지가 될 줄은 도연명 자신도 몰랐겠지만 이들 지자체의 마케팅 전략을 비난할 수는 없다. 사회는 이렇게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이니까. 다만 도연명이 꿈꾼 순수무결한 유토피아는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다.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어원처럼.
이규일 _ 국민대학교 중국학부 교수
해당 글은 중국학술원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1.
사진2.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