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계(愚溪)’라는 이름의 계곡이 있다. ‘어리석은 계곡’이라는 뜻이다. 누구든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이 아끼는 대상에 ‘우(愚)’라는 이름을 붙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계곡을 ‘우계’라 부른 사람은 다름 아닌 이 계곡을 누구보다도 아꼈던 사람, 유종원(柳宗元)이었다. 유종원은 왜 자신이 아끼는 계곡을 ‘어리석은 계곡’이라 불렀던 것일까? 그 사연을 알려면 유종원의 굴곡진 인생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그는 젊은 나이인 스물한 살에 과거에 급제했고, 감찰어사이행(監察禦史裡行) 등의 관직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혈기 왕성했던 그는 정치 개혁을 꿈꿨고, 왕숙문(王叔文) 등과 뜻을 같이 하여 영정혁신(永貞革新)에 참여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180여 일만에 끝나버린 거사의 여파는 컸다. 그는 변방인 영주(永州)로 좌천되었고, 이후 수도로 잠시 복귀했으나 요직에 중용되지는 못했다. 곧이어 다시 유주(柳州)로 좌천된 그는 그곳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그림 1. 계곡을 바라보는 유종원
유종원은 정치적 실패로 인한 원망과 낙담을 시와 문장 속에 담아냈다. 「우계시서(愚溪詩序)」 역시 유종원이 영주에서 귀양살이하며 쓴 글이다. 이 글은 그가 자신의 「팔우시(八愚詩)」라는 시에 대해 쓴 서문인데, 현재 시는 남아 있지 않지만 어리석다는 뜻의 ‘우(愚)’자를 넣어 명명한 여덟 가지 경물을 읊은 시로 추정된다.
그가 영주에 도착한 지 6개월 만에 함께 갔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곧이어 정치적 동반자인 왕숙문은 사형을 당했다. 또한 그는 귀양지에서조차 정치적 반대 세력들의 온갖 비방에 시달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신만의 공간을 찾고 싶었을 것이다. 이때 발견한 것이 염계(冉溪)라는 계곡이다. 그는 이 계곡에 ‘우계’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고 계곡 가에 초가를 짓고 텃밭을 가꾸며 마음의 안식을 찾았다.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내 어리석음 때문에 죄를 지어 소수(瀟水) 가에 귀양 왔는데, 이 계곡을 아껴 2,3리(里) 들어간 곳에서 특히 아름다운 곳을 찾아 집을 지었다. (… 중략 …) 지금 내가 이 계곡에 집을 짓고는 이름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터에, 이 지방 사람들도 계곡의 이름을 가지고 옥신각신하기에 이름을 다시 지어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름을 ‘우계(愚溪)’라고 바꾸었다.
이어서 그는 계곡의 이름을 하필이면 ‘우계’라고 붙인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다.
무릇 물은 지혜로운 이가 좋아한다. 그런데 지금 이 계곡만이 유독 어리석다고 욕을 당하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대체로 물길이 매우 낮은 곳에 있어서 관개하는 데 쓸 수 없고, 또 물길이 급하고 돌출한 바위가 많아 큰 배가 드나들 수 없으며, 유심(幽深)한 곳에 있는 데다 얕고 좁아서 교룡(蛟龍)도 하찮게 여겨 구름과 비를 일으킬 수 없어 세상에 이로움을 주지 못하니, 나를 꼭 닮았다. 그러니 모욕하여 어리석다고 불러도 되는 것이다.
즉, 이 계곡이 세상에 이로움을 주지 못하니 어리석다고 불러도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종원은 계곡이 세상에 이로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 “나를 꼭 닮았다”고 했다. 이어지는 글에서 그는 ‘우계’라 명명한 계곡과 자신의 어리석음을 연결시켜 전개함으로써 계곡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고, 시각을 전환하여 자신이 발견해낸 계곡의 쓰임을 밝혔다.
지금 나는 도(道)가 시행되는 때인데도 이치를 어기고 일을 그르쳤으니, 어리석기로는 나만한 사람이 없다. 그리하여 천하에 아무와도 다툼이 없이 이 계곡을 나 혼자 차지하고서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 계곡은 비록 세상에 이로움을 주지 못하지만, 만물을 잘 비추며 맑고 깨끗하며 종(鐘)이나 경쇠를 치는 듯한 아름다운 소리를 내어, 어리석은 이로 하여금 즐거워 웃고 애모하여 즐겨 떠나가지 못하게 할 수 있다.
다음 단락에서는 계곡을 변호한 기세를 몰아 자신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서술했다. 앞서서는 “어리석기로는 나만한 사람이 없다”며 자조 섞인 푸념을 했지만, 계곡의 숨겨진 쓸모를 밝힌 후에는 어리석은 내게도 특별한 장기가 있다며 모든 것을 초월한 듯 만족감을 드러낸다.
나는 비록 세속에 어울리지 못하지만 글 쓰는 일로 꽤나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만물을 깨끗이 씻어내고 온갖 모습을 잘 표현하니 어느 것도 내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리석은 문장으로 어리석은 계곡을 노래하노라니 아득히 서로 어긋남이 없고 혼연히 융화되어 혼돈 상태를 초월하고, 허공과 융화되어 고요히 나 자신조차 깨닫지 못하게 된다.
유종원은 이 글에서 치밀한 전개를 통해 작품 말미에서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를 드러냈다. 그는 정치적 포부가 좌절당하고 폄적당한 상황에서 이 글을 썼기 때문에 계곡이 “세상에 이로움을 주지 못하니, 나를 꼭 닮았다.”, “어리석기로는 나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며 자신을 ‘어리석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세상에 이로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우계’라는 이름을 얻은 계곡에 나름대로의 효용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쓰이지 못해 어리석다고 자조하는 자신에게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세속의 잣대에서 쓸모없다고 평가받는 계곡이 자신에게는 가장 큰 위안을 주며, 세상이 알아주지는 않지만 자신에게는 만물을 담아내는 글을 써내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림 2. 우계
또 다른 면에서 이 글은 예술의 가치를 생각해보게 한다. 이 글에서는 세속적 가치와 순수한 미(美)가 대립되고 있다. 계곡이 가질 수 있는 세속적 가치는 실용적이고 즉각적인 효용으로, 이는 글의 전반부에 서술되어 있다. 물길이 높은 곳에 위치하면 전답의 관개에 활용할 수 있고, 유속이 적당하고 물길이 평탄하면 수운(水運)에 활용할 수 있으며, 수량이 많고 개방된 곳에 있으면 강수에 도움이 된다. 이런 조건을 갖춘 계곡은 쓸모가 있다. 우계의 경우에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아 세상에 이로움을 주지 못하며, 따라서 어리석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글의 후반에는 앞서 살펴본 실용적이고 즉각적인 쓸모와는 다른 측면에서 우계가 갖는 효용이 서술되어 있다. “만물을 잘 비추며 맑고 깨끗하며 종(鐘)이나 경쇠를 치는 듯한 아름다운 소리를 내어, 어리석은 이로 하여금 즐거워 웃고 애모하여 즐겨 떠나가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는 우계가 갖는 순수한 아름다움이 감상자에게 주는 즐거움과 위로를 서술한 것이다.
우계가 갖는 이와 같은 효용은 예술의 가치와 일맥상통한다. 예술 작품은 사람들에게 실제적이고 즉각적인 쓸모를 제공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에 내재된 아름다움, 혹은 감상자가 그것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을 통해 사람들에게 미적 쾌감을 선사한다. 또한, 창작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예술이 주는 치유의 기능에서 예술의 가치를 찾을 수도 있다. 이 글을 읽어 보면 저자 역시 우계에 대한 글을 쓰면서 스스로 치유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세상이 자신에게 부여한 평가가 아닌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찾고 이를 글로 표현하면서 치유된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 우계에 대해 ‘어리석다’고 단정 짓는 것이 섣부른 판단이었음을 알게 된다. 결국 어떤 가치를 추구하든 세상에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이로움을 주지 못한다고 해서 쓸모없는 것이라고 속단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새로운 시선과 새로운 관계 속에서 언제나 새로운 쓸모를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자에게 세상은 끝없이 풍요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누워서 읽는 중국 고전 10】
윤지양 _ 인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그림 1. https://m.sohu.com/a/255554116_100243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