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은 한중 수교 30주년이 되는 해다. 사실 30주년이라고 해서 29주년보다 더 특별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숫자가 갖는 상징성은 여전히 중요하다. 대부분의 단체나 행사, 사건, 인물에 대해서도 대체로 10년 단위로 기념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개인적으로 10년 단위로 특별한 생일을 기념하지 않는가.
포털에서 ‘한중 수교 30주년’으로 검색해보니, 각 분야에서 다양한 기념사업이 준비되고 있는 것 같다. 눈에 띄는 행사들은 주로 문화계, 예술계에서 진행하는 일종의 문화 교류 차원의 공연이나 행사든지, 아니면 중앙‧지방 정부 차원에서의 외교적 기념행사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아직 매체를 통해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주변에서 여러 학술단체가 이와 관련해서 다양한 학술회의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주지하듯이 현재 중국은 우리나라의 수출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너이며, 남북관계나 외교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그 중요성은 결코 미국에 뒤처지지 않는다. 한중관계의 현재적 중요성을 감안할 때, 30년간 관계 발전의 명암을 되짚어 보고 향후 관계의 발전적 확대를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현재 준비되고 있는 다양한 기념사업도 이를 위한 것일 것이다.
다만, 양국의 관계가 비단 수교 이후 30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지리적 인접성으로 인하여 양국은 초기 국가의 성립 이래로 2,000여 년의 역사적 관계를 맺어왔다. 장구한 세월의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최근 30년의 한중관계는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그리고 이 역사적 유산이 앞으로의 한중관계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들도 ‘30주년’을 회고하는 여러 화두 가운데 하나가 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한중관계의 역사를 회고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역시 ‘조공-책봉 관계’라는 개념일 것이다. 중원의 왕조를 중심으로 형성된 동아시아의 비대칭적 국가 간 관계를 하나의 외교적‧의례적 질서로 구현한 이 시스템은 진(秦), 한(漢) 통일제국이 등장하면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주(周)의 종법적 봉건제도에서 제후가 정기적으로 방물(方物)을 갖추어 천자를 ‘조근(朝覲)’하는 것에서 비롯된 ‘조공(朝貢)’은 통일제국의 성립과 함께 주변 국가와의 관계에도 확대 적용되었다. 주변국의 군주가 중원의 황제에게 조공하며 ‘신속(臣屬)’하고, 황제는 여기에 대하여 하사품과 함께 특정 관작을 내려 ‘책봉(冊封)’하는 외교적 관계가 형성되었다. 국력의 압도적 차이라는 현실이 반영된 이 질서는 때로는 침략의 명분으로 활용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조공-책봉 관계의 프로토콜을 준수하는 이상, 국제 질서의 안정을 유지하는 기능을 해왔다.
조공-책봉 관계는 ‘주종관계’의 형식 논리를 차용하고 있지만, 이러한 상하 관계는 다분히 형식적인 차원에 국한되는 것이었다. 중원 왕조와 조공국은 서로 힘의 우열을 엄연히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이러한 우열 관계를 ‘천자/군주’와 ‘제후/신하’의 관계로 설정했지만, 중원 왕조와 조공국의 관계는 결코 지배-피지배의 관계는 아니었다. ‘군신(君臣) 관계’의 외피는 중원의 황제에게는 ‘중화세계의 천자’로서의 정통성을 분식(粉飾)하는 수단이었고, 주변국 군주에게는 안보 확립, 문물 교류, 정치적 위상 강화 등을 위한 지렛대였다.
한중관계에서 조공-책봉 관계의 형식성은 특히 조선 왕조 이전 시기에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漢)의 몰락과 중원의 분열은 책봉 주체의 다원화를 가져왔고, 조공국도 복수의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을 수 있었다. 고구려는 북위(北魏)로부터 책봉을 받았으면서도 남조(南朝)의 송(宋)‧제(齊)‧양(梁)‧진(陳)으로부터 책봉을 받았다. 백제는 주로 남조의 왕조들에 조공했지만,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북위에도 접근하며 조공했다. 비록 고구려와의 관계 안정을 우선했던 북위로부터 거절당했지만, 백제의 실리적 접근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 역시 남북조 모두에 조공하며 중국의 문물을 수용함으로써 고대국가로 성장해갔다. 삼국 모두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실리적 전략을 구현하기 위해 조공-책봉 관계라는 외교 관계의 형식을 활용하였다.
수(隋), 당(唐) 통일제국의 재등장은 남북조 시대의 다원적 국제 질서를 다시 일원화하는 변수가 되었다. 중국 중심의 일원적 국제 질서 수립을 추구한 중원 왕조의 압박은 조공-책봉 관계의 형식을 통한 자주성 확보를 추구했던 고구려‧백제와의 마찰을 초래했고, 결국은 중원 중심의 일원적 국제 질서를 수용한 신라에 의해 삼국시대가 종식되었다. 당에 의해 ‘대일통’이 이루어졌던 시대에 발해와 신라는 당과의 조공-책봉 관계를 활용하며 상대방을 견제하였고, 아울러 이를 선진 문물 수용의 통로로 활용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조공-책봉의 관계 속에서도 양국은 때로는 당과 군사적 대결을 벌이기도 하였다.
송(宋) 이후 북방 민족의 흥기와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다변화는 조공-책봉 관계의 도구적 측면을 더욱 강화하였다. 고려는 건국 초기에 정치적 필요에 따라 오대(五代)의 왕조들로부터 책봉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거란의 1차 침략 이후에는 북송(北宋)과의 국교를 단절하며 거란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고려가 거란의 3차 침략을 격퇴한 후에 거란의 국력이 서서히 약화하자, 11세기 후반에는 북송과 외교를 재개했다. 하지만 12세기에는 여진이 거란을 무너뜨리고 중국 북부를 장악하면서, 고려는 여진에 조공을 보내며 남송(南宋)과 거리를 두었다. 동아시아 국제정세가 가장 유동적인 시기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고려는 조공-책봉 관계의 형식을 이용하여 외교의 실리를 최대화하였다.
조공-책봉 관계의 형식적 성격은 조선과 명(明)‧청(淸)의 관계에서도 기본적으로 유지되었지만, 성리학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요소가 더해지면서 조공-책봉 관계의 유연성은 이전 시대보다 훨씬 약해졌다. 조선-명 관계의 양상과 조선-청 관계의 양상은 엄연히 달랐지만, 주자학이라는 이념적 토대를 국정 및 대외관계 운영의 근간으로 삼았던 조선의 외교적 유연성은 앞선 시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떨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임진왜란, 명‧청 교체기 등의 외교 실패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국제정세의 변화에 부합하는 실리 추구의 ‘수단’이었던 조공-책봉 관계는 조선 시대에는 그 자체로 이념적 정통성을 갖춘 ‘목적’에 가까워졌다.
19세기 후반에 제국주의 침략의 지구적 확장이라는 흐름 속에서 이전과는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국가 간 관계의 원리가 유입되면서, 동아시아의 조공-책봉 질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국제 질서의 급격한 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하지 못한 조선/대한제국은 결국에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고, 이로 인해 ‘한중관계’의 한쪽을 담당할 일방이 사라졌다. ‘국가 대 국가’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물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적 노력도 중요하지만, 온전한 국가로서의 위상을 갖추지는 못한 점에서 역사 속의 한중관계와 동일 선상에서 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2차 세계대전 종전과 일본의 패망에 이은 한국의 ‘광복’은 중단된 ‘한중관계’의 복원을 위한 조건을 형성했다. 하지만 곧이어 한국과 중국은 모두 내전을 거치면서 통일 정권을 수립하지 못했다. 물론 중국의 상황은 한국의 상황과 달랐지만, ‘중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으로 갈라진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후 냉전 시대의 체제 대립 속에서 ‘한중관계’는 ‘대한민국-중화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중화인민공화국’의 관계로 이원화된 상태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 시대의 ‘한중관계’는 역사상 그 어느 시기보다도 이데올로기에 강하게 속박되었다.
이상의 맥락에서 볼 때, 1992년 한중 수교와 그 이후 30년간의 양국 관계 발전은 획기적인 역사적 의미를 갖는 변화였다. 조금 과장해서 의미를 부여하자면, 길게 보면 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온 이데올로기의 속박에서 벗어나, 다시 실리 추구를 중심으로 한중관계를 재구성할 수 있는 토양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분단체제를 극복하지 못한 현실에서 여전히 이데올로기라는 요소는 중요한 변수로 남아 있지만, 지난 30년간 한중관계의 발전 추세는 적어도 그 변수를 약화하는 방향으로 이어져 왔다. 이데올로기라는 경직성 변수를 계속해서 약화할 때, 실리 추구라는 유연성 변수를 최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근래 동북공정, 김치‧한복 논란, 홍콩 문제 등으로 우리 사회에서 반중 정서가 확산하고 있고, 중국과의 협력 확대를 한미일 안보협력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규정하는 분위기가 커지고 있다. 중국과의 관계 악화가 우리의 실리 추구를 위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할 일이지만, 이데올로기라는 변수가 다시 강화된 결과라면, 그것은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닐까. 좋든 싫든 중국은 우리와 인접한 강대국으로서 역사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형성해왔다. 특히, 당(唐) 이후로는 일종의 공동 운명체처럼 역사적 격동의 폭풍우를 함께 맞았다. 당의 발전과 신라의 삼국 통일(7세기), 당과 신라의 몰락, 그리고 송과 고려의 건국(10세기), 원‧명 교체와 고려‧조선 교체(14세기 말), 청과 대한제국의 몰락(20세기 초),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건국(20세기 중엽) 등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두 지역은 서로 비슷한 운명의 주기를 경험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중관계의 역사적 중요성을 다시 환기하면서, 21세기 한중관계를 장기적 맥락에서 재평가하고 새로이 정립해가야 할 것이다.
이원준 _ 인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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