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초 <관행중국>에 2017년 이후 뜨거워진 중국의 ‘운하열’을 소개했다. 그랬더니 중국의 ‘운하열’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한국의 언론계는 최근 ‘반중’ 정서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학계 역시 ‘한반도 대운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한 탓에 중국의 운하열에 그리 ‘뜨거운’ 반응이 없으나, <관행중국> 독자들을 위해 중국에서 그동안 얼마나 ‘알뜰하게’ 대운하를 활용해왔는지 소개해보고자 한다.
사진 1. 장수성의 대운하
중국의 역대 집권자들은 대운하에 대한 애착을 놓지 않았다. 그들이 대운하를 아끼고 활용하는 방법은 크게 역사적인 관점과 현대적인 관점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역사적인 대운하 활용법은 크게 네 가지로 정리가 가능하고, 현대적인 대운하 활용법 역시 네 가지로 요약되기에, 총 여덟 가지 활용법이 존재했다. 오늘날 중국의 ‘운하열’은 현대적인 활용법과 관련이 있다.
먼저 역사적으로 중원을 점령한 집권자들이 대운하를 활용한 방식부터 살펴보자.
잘 알려진 것처럼 그냥 운하가 아니라 ‘대운하’라는 이름을 붙일 만큼 거대한 인공운하가 연결된 것은 7세기 수양제(隋煬帝)의 업적이다. 당시 양제는 위진남북조의 긴 분열기를 통일한 후 남조(南朝)의 중심지인 강남으로부터 물자를 차출하여 수도로 조달하기 위해 통제거(通濟渠)를 뚫었고, 다시 고구려 침공을 위한 물자조달을 위해 영제거(永濟渠)도 개착했다. 즉 강남의 물자를 차출하고 한반도를 침공하기 위한 용도로 대운하를 뚫었던 것이다. 물론 많은 백성이 부역에 동원되어 사망하고 고구려 침공이 실패하는 상황에서도 용선(龍船)을 타고 대운하를 유람했다고 해서 ‘황제의 오락용’으로 건설된 것이 아니냐는 후대의 비판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양제가 대운하를 개착한 용도는 강남으로부터 물자조달과 대외 원정을 위한 것이 일차적이었다는 것이 공정한 평가일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대운하의 첫 번째 용도였다.
수나라의 멸망 이후 당나라의 지도자들은 대운하를 폐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왕 만들어진 대운하를 남북 방향의 경제교류를 활성화시키는 데 활용했다. “수나라의 백성들에게는 그 해로움이 말할 수 없었지만 당나라의 백성들에게는 그 이로움이 말할 수 없다”고 노래했던 피일휴(皮日休, 834-883)의 시는 이러한 반전의 드라마를 잘 보여준다. 실제 당의 대운하는 남북 물자교류의 대동맥으로 경제적 통합의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남북의 경제적 통합, 이것이 대운하의 두 번째 활용법이었다.
원나라(몽골제국)의 쿠빌라이 칸이 수도를 대도(大都), 즉 현재의 북경으로 천도한 이후 대운하 루트는 이전과 달리 항주에서 수도 북경을 직접 연결하는 경항(京杭)대운하 노선으로 조정되었다. 하지만 원을 무너뜨린 명나라의 개창자 주원장이 수도를 남경(南京)으로 옮기면서 대운하의 기능 역시 쇠퇴하기 시작했다. 남경이 수도로 정착되었다면 대운하 역시 곧 막혀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영락제가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대운하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경제 중심지인 남경에서 1천 킬로미터 이상 북쪽으로 멀어진 황량한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는 것에 동조했던 신료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영락제는 대운하를 새롭게 정비하면서, 대운하가 있는 한 북경으로의 천도와 경제적인 문제는 없을 것이라 장담했다. 결국 대운하는 북경 천도라는 정치적 결단을 돕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이것이 대운하의 세 번째 활용법이다.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 대운하는 남쪽의 물자를 북쪽(북경)으로 운송하는 ‘남량북운(南糧北運)’의 생명선으로 기능했다. 하지만 이는 처음 대운하가 등장했던 7세기 이후 변함없는 대운하의 기능일뿐이었다. 이에 더하여 15세기부터 18세기의 대운하는 해외무역의 욕구를 억제하는 대체제(代替製) 역할을 수행했다. 절강성-강소성-산동성-하북성을 관통했던 대운하는 경제 중심지와 정치 중심지를 연결했기에 당시 증대하던 초지역적(inter-regional) 교역의 욕구, 즉 서로 먼 지역을 왕래하며 시세 차익을 누리려는 욕구를 상당 부분 충족시켜주었다. 정화의 인도양 원정대가 보여주었던 15세기 중국의 해양력 수준이 18세기 후반까지 유지는커녕 오히려 쇠퇴했던 요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처럼 후대의 평가는 다소 달라졌지만, 이것이 역사적으로 대운하의 네 번째 활용법이었다.
청나라의 몰락과 함께 대운하의 생명력도 끝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1949년 이후 등장한 공산당의 신중국은 대운하를 폐기하지 않고 다시 복구하며 ‘알뜰하게’ 활용하기 시작했다. 기차와 자동차가 확산하는 국면에서의 ‘의외의’ 전략이었다.
첫 번째로 북쪽에서 생산된 석탄을 남쪽으로 운송하는데 대운하를 활용했다. 이를 “북매남운(北煤南運)”이라 부른다. 1958년부터 강소성 북부 지역에 시작된 운하에 대한 보수 및 확장 공사는 단순히 대운하의 ‘복원’이 아니라 대약진운동(1958-1960)이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신성장 ‘동력’으로 기획된 결과였다. 이 배경에 당시의 산업과 교통 구조에 대한 고려가 담겨 있었다. 당시 석탄 산지가 주로 화북에 위치한 반면 석탄을 소비했던 발전소, 공장, 생활 주거지는 양자강 하류 지역에 집중되 탓이었다. 대운하는 이미 포화상태에 도달한 철도 운송을 보완하는 용도로 활용되었다.
두 번째로 양자강의 풍부한 수자원을 북쪽의 갈수 지역으로 조달하는데 대운하를 활용했다. 이를 “남수북조(南水北調)”라고 부른다. 남수북조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는 1952년 마오쩌둥의 황하 시찰 이후의 언급에서 시작되었지만, 구체적으로는 2001년 북경 올림픽 유치 이후 북경의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진되었다. 남수북조의 루트는 동선(東線), 중선(中線), 서선(西線)의 3가지가 기획되었는데, 양자강 하류 강소성 양주(揚州)에서 시작하여 천진을 연결하는 동선이 사실상 대운하 루트와 겹쳤다. 그 결과 대운하의 수질은 개선되었고, 대운하는 경유 지역으로 농업용 관개 용수 및 공업, 생활용수까지 공급했다. 홍수를 방지하는 기능까지 덧붙여진 것은 망외(望外)의 수확이었다.
세 번째로 신중국은 대운하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켜 관광 자원으로 활용했다. 대운하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은 2014년의 일이지만 그 발단은 2004년 남수북조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마련되었다. 남수북조의 동선 공정을 추진하면서 대운하의 물길이 훼손되거나 인근 문화재가 수몰되고 파괴되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에 문화유산의 차원에서 대운하를 보호할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법적 보호책 마련이 추진되었다. 2006년 무렵에는 국가 차원에서 추진하는 프로젝트로 격상되고, 범위 역시 대운하와 관련된 6개 성(하북, 산동, 강소, 절강, 하남, 안휘)과 2개 직예시(북경, 천진), 그리고 35개 도시로 확대되었다. 2014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때까지 양주와 항주처럼 대표적인 운하 도시는 도시 재건 및 유람선을 통한 관광객 유치에 성공했고, 강남 지역의 운하망으로 연결된 여러 시진(市鎭)에는 수향(水鄕) 도시를 경험하려는 관광객이 급증했다. 이에 따라 대운하 노선을 따라 분포한 여러 계열 유산(serial heritage)를 연계한 ‘대운하 문화대(文化帶)’라는 용어 역시 등재 직후 등장했다.
네 번째로 중국은 대운하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후 대운하의 개념을 확대하여 일대일로(一帶一路)의 국가전략과 연계하는 데에도 활용하기 시작했다.(2022년 2월호 참조) ‘경항대운하+수당대운하+절동운하’를 모두 포괄한 ‘대운하’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대운하는 수당 시대의 수도이자 실크로드의 종착지인 서안(장안)과 낙양 일대와 항구도시로 발전했던 절강성 영파(寧波)까지 연결되었다. 이는 절묘하게 시진핑 지도체제가 대대적으로 내세운 일대(一帶, 육상 실크로드)와 일로(一路, 해상 실크로드)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루트가 되었다. 이에 중국 정부는 21세기에 들어와 ‘온화(溫和)’하고, ‘연결[聯通]’되며, ‘포용(包容)’적인 국가 이미지를 만들고 선전하기 위해, ‘단절’과 ‘구별’의 상징부호인 만리장성을 대신하여 남북을 ‘연결’하며 ‘통합’시키는 대운하를 새로운 문화기호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알뜰하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신기하고 슬기로운 대운하 활용법을 확인할 수 있다. 신기한 것은 지금부터 1300년 전(우리의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대운하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돌입하는 현재까지 활용되기 때문이고, 슬기로운 것은 그것이 억지스러운 상고(尙古)주의의 발로라기보다는 대운하의 핵심 가치를 변화하는 시대 정신에 맞추어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한국 학계의 건설적인 대응방안은 다음 기회에 논해보고자 한다.
조영헌 _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해당 글은 중국학술원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https://photo.gmw.cn/2020-05/24/content_33855015.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