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부터는 전북대 동남아연구소에서 전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는 김주영 연구원의 컬럼 【지금 여기, 홍콩】을 연재합니다. 김주영 연구원은 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에서 홍콩 시민사회와 사회적 경제 운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홍콩과 한국의 빈곤, 이주노동, 시민사회,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연구범위를 확장하여 홍콩-동남아 사회운동 연대, 싱가포르 이주노동자의 건강보장, 플랫폼 노동자 문제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칼럼명을 【지금 여기, 홍콩】으로 정한 것은 2019년 홍콩의 사회운동과 그 이후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향후 홍콩을 연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 끈을 놓지 않으려 홍콩의 현재 모습을 관찰하고자 하는 필자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
2019년 9월 시작된 황점(黃店) 지지 운동은 홍콩에서 같은 해 6월 본격화된 범죄인 인도법 개정 반대시위 전략의 일환이었다. 2014년 우산운동 이후 민주화 운동의 상징색이 된 노란색(黃)을 2019년에 시위를 지지하는 가게(店)와 합쳐 명명하면서 황점이 등장했다. 황점은 최대한 중국 자본이 결부되지 않은 지역민의 가게를 우선한다. 황점 지지 운동은 시위대에게 무료로 음식과 음료를 나누어주었던 가게 사장들에 대한 감사함으로 시작되었고, 자연스럽게 시위에 반대하는 가게 대상의 불매운동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황점을 돈쭐(黃懲罰) 내겠다는 시위대의 계획은 경제를 활용한 정치적 저항이 주요 운동방식으로 나타난 2019년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림 1. 황색경제권을 지지하자는 홍보물
황점에서 소비하자는 운동은 한 발 더 확장된 상상으로 이어졌다. 황색경제권(黃色經濟圈)이 그것이다. 경제권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홍콩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가게들 사이의 경제적 네트워크를 구축하자는 취지이다. 황점에서의 소비와 시위에 비판적인 가게에 대한 불매운동을 넘어서서 생산-유통-소비가 이어지는 하나의 경제권을 만듦으로써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자는 것이다. 대안적인 경제 네트워크에 대한 상상은 예상치 못한 시점에 불현듯 불이 붙었다. 그렇지만 황점에 대한 지지를 지속하는 것도 어려운 상황에 경제권을 새롭게 만들겠다는 상상은 얼마나 실현 가능한 것인가.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데에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황색경제권을 보면서 2017년 7월, 홍콩의 틴수이와이(天水圍)에서 새로운 경제를 꿈꾸는 사람들을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늘과 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도시 틴수이와이는 예전에 어촌이었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면 여전히 물고기를 키우고 잡는 물웅덩이가 남아있고, 경작되지 않은 채 버려진 듯한 토지를 듬성듬성 볼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은 신도시 개발로 아파트가 빼곡하게 들어선 틴수이와이에서 특정 기업의 쇼핑몰 독점과 그로 인한 소비자 물가 상승은 심각한 문제였다. 저소득층이 밀집해 거주하는 지역이라 그 문제는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그림 2.
그들은 소수기업의 독점에 반대하면서 양질의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하는 자생적인 경제생태계를 꾸리고자 했다. 인근의 빈 토지를 저렴한 가격으로 빌려 유기농 채소를 경작하고, 농작물을 가공해 식품으로 만들며, 작은 가게를 열어 농산물과 가공품을 판매했다. 틴수이와이의 문제를 다른 지역 주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동네를 투어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기도 했다. 내부적으로 순환경제를 구축하려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의 이면에는 과잉생산되어 썩어가는 농산물, 판매되지 않아 유통기한을 넘긴 가공식품, 부족한 수량으로 마음껏 구매할 수 없는 생활용품 등의 문제가 동시에 산재해 있었다.
생산에서 소비에 이르기까지 같은 정치적 지향을 가진 동료들과 함께하는 경제적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황색경제권의 상상은 틴수이와이 사람들의 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오래전부터 간직해왔던 틴수이와이 사람들의 꿈이 천천히 실현되는 동시에 좌초되는 모습은 황색경제권의 상상이 나아갈 미래를 보여주는 듯했다. 2018년 4월 틴수이와이에서 현지연구를 마치고 돌아온 이래로 가끔 그곳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나와 친하게 지냈던 주민은 시스템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종종 했다. 시스템 관리자의 잦은 교체와 그에 따른 소홀함, 중단된 식품 가공업, 무엇보다도 코로나19가 미친 영향이 컸다.
홍콩에서는 코로나19 초기에 이를 우한폐렴으로 명명하면서 인근 중국으로부터 유입되는 바이러스를 크게 염려했다. 홍콩에 큰 타격을 입혔던 사스의 기억 때문이었다. 그동안 중국산 먹거리의 안정성을 부단히 의심하고 있던 홍콩인들은 홍콩의 땅에서 생산되는 건강한 유기농 채소에 관심을 가졌다. 산지에서 직접 농산물을 판매하는 장터에는 예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현지의 소식을 들으면서 나는 틴수이와이 사람들의 꿈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경제체제가 더욱 확장되는 상상을, 그들에게는 머나먼 타국인 이곳 한국에서 했다. 하지만 얼마 전, 중국에서 채소를 운반하는 트럭기사의 코로나19 확진으로 채소 공급이 막혀 문제라는 현지의 소식을 접하면서 그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홍콩의 전체 인구에게 공급할만한 채소가 홍콩에서만 생산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림 3. 인터넷으로 물건을 판매하는 황점 플랫폼의 모습
황색경제권도 코로나19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더 생각해볼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황색경제권을 구성하는 황점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것, 가공이나 유통 과정에서 중국 본토의 재료와 물건을 홍콩의 것과 구분하는 일 등에는 이견이 존재한다. 황점의 여부를 판단하는 검증의 단계는 정확하지 않고, 가게 사장의 주장과 몇몇 증거들을 근거로 활용할 뿐이다. 여전히 황점에서의 소비를 지지하는 내 친구는 한 웹사이트를 소개하며, 황점인 이곳에서 가능하면 물건을 사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황점의 여부를 그들이 어떻게 입증했냐고 묻는 내 질문에는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황점에 대한 소비운동이면서 시위를 지지하지 않는 상점을 불매했던 이 흐름은 틴수이와이의 것보다 더 큰 파급력이 있었다. 시위에 반대하는 가게들에 대한 불매운동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대형 체인 몇몇은 일부 지점을 폐업하기도 했다. 경제에 정치를 결부시켜 가게들을 색깔로 낙인찍는다는 비판도 있었고, 황점을 지지하는 것 자체가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논평도 있었지만 단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어내긴 한 것이다. 누군가는 일자리를 잃었지만, 누군가는 영업시간 단축과 좌석 간 거리 두기가 강화된 코로나19 시기에도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이는 어떤 정치진영에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황점이 황색경제권으로 긴밀하게 묶이는 날이 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황색경제권이 가진 성과와 논쟁은 이들의 궁극적인 상상이 현실이 될 수 있는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듯하다. 앞선 길을 걸었던 틴수이와이를 보면 아직은 현실화가 험난해 보이지만, 선례가 있기 때문에 어려운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중요한 것은 상상을 현실화하는 그 과정에 있다. 틴수이와이 사람들이 새로운 경제를 만들면서 얻게 된 것들이 있다. 지역이 당면한 독점경제의 문제 인식, 그것을 비판하는 태도의 형성, 문제해결을 위한 실천으로써 얻은 소기의 성취는 틴수이와이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을 둘러싼 현안에 정치적일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황색경제권도 그렇지 않을까. 이런 상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람들 사이에는 어떠한 정치적인 지향이 더욱 강하게 공유될 수 있다. 더구나, 기존에 이미 이러한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비현실적인 상상이라고 비판만 하기엔 홍콩의 현실이 너무나도 암울하다. 온전한 현실이 되지 못한다 해도 때론 상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힘을 가진다. 특히 지금 같은 시기에는 더욱더 그렇지 않을까.
【지금 여기, 홍콩 1】
김주영 _ 전북대 동남아연구소 전임연구원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그림 1. https://www.inmediahk.net/node/1071336
그림 2. https://www.wikiwand.com/en/Tin_Shui_Wai
그림 3. https://www.stationeryl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