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춘과 중화루는 인천 최초의 ‘중국집’이 아니다
인천중화회관이 1906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천에는 동흥루(東興樓, 종업원 16명), 연남루(燕南樓, 10명), 동해루(東海樓, 7명), 사합관(四合館, 5명), 합흥관(合興館, 4명), 흥륭관(興隆館, 3명)과 같은 ‘중국집’이 있었다. 종업원 수를 기준으로 그 규모를 추정해 보면 16명인 동흥루는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는 요리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으로 큰 것은 연남루로 10명이었다. 동흥루와 연남루는 규모가 있는 요리점급, 사합관‧합흥관‧흥륭관은 소규모의 음식점 혹은 호떡집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자료에 의해 근대 인천을 대표하는 중화요리점인 공화춘, 동흥루(同興樓), 중화루는 어느 곳도 인천 최초의 ‘중국집’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사진 1. 인천을 대표하는 중화요리점 중화루와 송죽루(구 동흥루)
동흥루 중화요리점은 1911년 설립되었다. 지나정(구 청국조계) 2번지의 동흥루 자리에는 원래 이태잔, 즉 스튜워드호텔이 있었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스튜워드호텔을 해체하여 벽돌조 3층 건물을 짓고 이곳을 동흥루 중화요리점으로 개업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 2>를 보면 사진 오른쪽 첫번째 건물이 동흥루 중화요리점이었다. 1920년대 일본인이 중화루 3층에서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이 사진에는 동흥루의 크고 작은 간판이 4개가 있는 것이 확인된다. 정문에 걸린 간판은 ‘包辦酒席 同興樓 サッポロ★ビール 電話六二六’이라 적혀 있다. 일본어 ‘サッポロ★ビール’는 일본의 맥주회사인 삿포로맥주를 말한다. 삿포로맥주 회사가 동흥루와 계약을 맺어 삿포로맥주만을 요리점 내에서 판매한 것이 아닐까 한다. 동흥루는 전화를 한대 보유하고 있었고, 그 번호가 626번이었다. 경성중앙전화국이 1930년 6월에 펴낸 전화번호부책에도 동흥루의 전화번호는 626번으로 기재되어 있어 두 전화번호는 일치했다. 그리고 ‘包辦酒席’(포판주석)은 ‘연회도 책임지고 합니다’라는 뜻이다. 즉, 각종 연회도 도맡아 한다는 것인데, 각종 회식이나 결혼식 등도 동흥루에서 했다고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런데 ‘包辦酒席’의 간판은 공화춘의 정문에도 이와 유사한 ‘包辦會席’(포판회석)의 간판이 있었다. 뜻은 동일하기 때문에 공화춘도 각종 연회의 장소로 이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중화루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상기의 간판 위쪽에도 간판이 있다. 중앙에 ‘同興樓’ 그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두 글자씩 해서 ‘特等料理’로 기재되어 있다. 공화춘 정문에 걸려있던 간판에도 ‘特等料理’ 간판이 있었다. 그리고 정문 좌측에 작은 간판이 두 개 걸려 있다. 하나는 ‘同興樓 글자 위에 ‘優等 支那料理’라 적혀 있다. 이 간판의 위쪽에는 작은 목판의 ‘同興樓’ 간판이 걸려있다. 그리고 정문으로 보이는 문 좌우측에 글자가 적힌 대련(對聯)이 있다. 동흥루는 중일전쟁 시기를 전후하여 송죽루(松竹樓) 중화요리점으로 상호명이 바뀌었다.
사진 2. 동흥루 중화요리점 (사진의 오른쪽 첫 번째 건물)
조선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1923년경 인천의 꽤 규모가 큰 중화요리점은 8개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영업세 과세표준액을 기준으로 보면, 중화루가 3만 원으로 가장 많았다. 이것은 매상액이 가장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다음이 동흥루로 2만 원이었고, 공동춘(共同春)은 9천 원, 광둥요리 전문의 의생성(義生盛)은 5천 원, 그 이외의 4개 요리점은 2,000-3,000원이었다. 중화루가 압도적으로 매상액이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공화춘은 아마도 4개의 요리점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중화루에 비하면 당시는 규모가 크지 않는 요리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1923년이라는 시기는 1922년 화교 뇌문조 등이 대불호텔 대지와 건물을 매입해 신장개업을 한 이듬해였다. 조선총독부 자료는 “각 요리점은 고객을 상당히 많이 불러 모으고 있다. 특히, 중화루는 근년 내지인(필자: 일본인)의 고객이 많다.”라고 보고한 것을 보면, 상대적으로 소득수준이 높은 일본인이 중화루를 많이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인천화상상회가 1935년 3월 조사한 <표1>을 보면 1930년대의 중화루, 동흥루, 공화춘의 규모나 실태를 엿볼 수 있다. 중화루의 자본금은 1.6만원으로 동흥루의 6천 원, 공화춘의 5천 원보다 약 3배나 많았다. 당시의 경영자는 공화춘은 우희광(于希光), 동흥루는 서문당(徐文堂), 중화루는 뇌문조였다.
다음은 인천을 대표하는 3개의 중화요리점의 대지 및 건물 평수를 서로 비교해 보도록 하자. 중국가(인천화교는 지나정 명칭을 싫어해 중국가라 불렀음) 2번지는 바로 동흥루가 자리한 곳이다. 이 부동산의 소유주는 이태호(怡泰號)로 경영자는 광둥성 출신의 양동애(梁東涯)라는 화교였다. 대지는 150평으로 다른 두 요리점에 비해 넓었으며, 벽돌조 3층에 방은 65칸이었다. 중화루는 앞에서 살펴본 대로 경영자인 뇌문조가 소유자로 되어 있고, 벽돌조 3층에 방은 54칸이었다. 그런데 대지 평수가 66평으로 나와 있지만, 토지대장에는 처음부터 117평으로 나와 있기 때문에 잘못 기재된 것이 아닐까 한다. 건물 규모로 보면 동흥루가 더 컸지만, 부동산 사정가격은 중화루가 3.3만 원으로 동흥루의 2배 이상이었다. 당시 인천화교 소유 부동산 가운데 5위에 해당하는 고가의 부동산이었다. 중국가(지나정) 38번지는 공화춘이 영업하는 곳이었는데, 이 부동산의 소유주는 원화잔의 장진삼(張晉三)으로 산둥성 출신이었다. 토지는 72.5평, 벽돌조 2층에 방은 48칸 규모로 부동산 가격은 1.2만 원이었다.
주소
소유주
원적
토지평수
건물종류
층수‧방칸수
부동산가격 (만)
중국가2
怡泰號‧梁東涯
광둥성
150평
벽돌조
3층,65칸
1.5
중국가38
元和棧‧張晉三
산둥성
72.5평
벽돌조
2층,48칸
1.2
본정1-18
中華樓‧賴文藻
산둥성
66평
벽돌조
3층,54칸
3.3
표 1. 중화루‧동흥루‧공화춘 중화요리점의 건물 내역
중화루, 일제 시대 최첨단의 전기제품인 전화기 2대 설치하여 영업
앞에서 동흥루 중화요리점이 전화를 개설하여 영업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당시 전화기를 설치하는 데는 상당한 비용이 들었다. 화교농민의 조합인 인천농업공의회가 1932년 소유하고 있던 전화기와 전화번호를 조선인에게 매각한 대금은 200원이었다. 당시 일반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1원이었기 때문에 200일을 쉬지 않고 일해서 벌어야 하는 큰 금액이었다. 전화를 개설해 전화번호를 보유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상당한 규모의 업체라는 것을 의미했다.
경성중앙전화국이 편집하여 펴낸 『京城·仁川電話番號簿』에 화교 경영의 중화요리점과 음식점을 따로 뽑아낸 것이 <표2>이다. 화교 경영의 요리점과 음식점이 1930년 당시 상당히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전화를 개설한 요리점 및 음식점은 5곳에 불과했다. 중화루는 전화번호를 415번과 957번 2개를 개설했는데, 화교 요리점 가운데서는 유일했다. 그만큼 중화루의 영업 규모가 컸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공화춘은 443번, 동흥루는 626번이었다. 전화번호의 개설은 숫자가 빠를수록 개설이 빠른 것을 의미한다. 중화루가 가장 빨랐고, 공화춘, 동흥루의 순으로 개설됐다. 중화루가 2번째의 전화번호를 개설한 것은 957번이기 때문에 첫 번째 전화 개설 후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인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 이 전화번호부에서 흥미로운 점은 중화루와 공화춘의 업종을 ‘北京料理’(베이징요리)로 표기한 점이다. 동흥루는 그냥 ‘중화요리’로 표기했으며, 동화루와 동해춘도 ‘중화요리’로 표기했다. 의생성호는 광둥요리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에 중화요리점도 베이징요리 전문, 광둥요리 전문으로 분류되어 있었던 것 같다.
전화번호
중화요리점 및 음식점
주소
업종
1133
東華樓
宮町23
중화요리
563
東海春
敷島町33
중화요리
626
同興樓
支那町2
중화요리
415‧957
中華樓
本町1-18
북경요리
1018
復永樓
金谷里14
음식점
443
共和春
支那町38
북경요리
818
義生盛號
支那町11
광동요리
표 2. 경성‧인천 전화번호부 상의 인천의 중화요리점 및 음식점(1930년)
신문 광고에 적극적이었던 중화루
중화루는 여러 신문에 신문 광고를 내기도 했다. 1926년 12월의 광고는 ‘지나요리’로 표기하고 전화번호 415번과 957번 두 개를 적어두었다. 1928년 1월의 광고에는 ‘中華料理仕出し’로 나와 있는데 여기서 ‘仕出し’는 주문요리 배달이라는 뜻이다. 1928년에 중화루가 요리를 배달하고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1929년 1월의 근하신년 광고에는 다시 ‘지나요리’로 표기하고 전화는 415번 하나만 있었다. 1932년 1월의 근하신년 광고에는 ‘북경요리’로 표기하고 전화번호 2개를 모두 기록했다.
1926.12.29. 1928.1.1. 1929.1.3. 1932.1.8.
사진 3.
【한반도화교와 베트남화교 마주보기 21】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참고문헌
이정희(2021.12), 「근‧현대 인천 중화요리점 역사 속의 중화루」, 『2021년도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소장 유물 자료집: 중화루의 얼굴-간판』, 인천광역시립박물관, pp.100-126.
이정희‧송승석(2015), 『근대 인천화교의 사회와 경제: 인천화교협회소장자료를 중심으로』, 학고방, pp.181-184.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국사편찬위원회 아카이빙자료
사진 2. 인천화도진도서관 소장
사진 3. 필자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