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마오는 1942년 2월 1일 주관주의, 종파주의 그리고 형식주의의 시정을 강조하는 정풍(整风)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의 선전 요점』은 정풍운동의 전개 직전에 발표되어 당내에서 주관주의와 종파주의를 바로잡자는 선전 업무의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
마오는 이미 1920년대부터 주관주의를 그릇된 사상이라고 주장해왔다. 1929년 12월에 발표한 『당내의 그릇된 사상을 시정하는 문제에 대하여』에서 기회주의와 맹동주의를 주관주의로 포괄하여 비판했다. 당시 부르주아에 유화적이었던 천두슈(陈独秀)를 우경 기회주의자(右倾机会主义)로, 도시에서의 봉기를 실패로 이끈 리리싼(李立三)을 좌경 맹동주의자(左倾盲动主义)로 간주했다(문영찬, 2021).1)
마오의 주관주의에 대한 비판은 문학과 예술계에도 영향을 미쳐 향후 오랜 기간 “주관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정치적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 예를 들어 문학평론가 후펑(胡風)은 “주관적 투쟁 정신”을 현실주의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이며, 정치와 사회 현실을 이해하고 인민의 잠재력을 실현하는 요소라고 주장했다. 후펑은 또한 전쟁 선전을 위한 포퓰리즘과 민족주의 문학을 선전하는 “대중화(大众化)”보다, 전통적인 유교 사상을 비판하고 “대중을 계몽해야(化大众)”하며, 이를 위해 “5·4 현실주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도 주장했다. 사상가 리쩌허우(李泽厚)는 후펑의 이론인 “주관적 투쟁 정신”과 마오의 주관주의에 대한 비판을 비교하면서 마오가 "문학과 예술의 법칙 그 자체보다 높은 사회정치적 관점에서 문학과 예술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이 결과 1930년대 후반부터 중국은 "계몽"보다는 "민족의 구원"을 선택하면서 근대화 과정에서 “위대한 희생”을 겪었다고 주장했다(Kong, 1993).2)
중앙선전부의 선전 요점[1]
(1942년 1월 26일)
(1)
본부 선전의 요점. 이전에는 당외 선전에 편중되었다면, 이번 호부터는 당내 선전을 추가하기로 결정하였으니 각지 동지들의 주의를 바란다.
(2) 쭌이 회의 이전에 주관주의와 종파주의가 당과 혁명에 큰 피해를 주었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쭌이 회의 이후의 당의 노선이 정확하다. 그러나 당 내부 전체에서, 특히 일부 특수 지역과 특수 부문에서는 주관주의와 종파주의의 잔재가 숙청되지 않았거나, 여전히 심각하게 존재한다. 따라서 작년에 중앙정치국은 이 문제를 여러 차례 비중 있게 논의하여 당성 강화 결정, 조사연구
수행 결정, 간부학교 결정, 고위급 학습조의 결정 등에 관해
발표했다. 또한 마오쩌둥 동지는 중앙의 결정에 따라 산시-간쑤-닝샤 변계지구 참의회에서 종파주의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이러한 결정과 연설은 이미 당 전체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많은 동지들의 관심을 끌었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주관주의와 종파주의의 잔재를 구체적으로 바로잡고 있는 좋은 하나의 현상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의 결정과 중앙동지의 연설은 다른 많은 동지들 사이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일부 동지들이 과거 주관주의와 종파주의에서 상당히 심각한 과오를 범했고 아직 자신의 과오를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심각한 자아비판을 원치 않으며, 신속하게 자신의 과오를 시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일부 동지들은 과거에 주관주의와 종파주의의 노선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그들 자신의 과거와 현재 사상과 행동에 주관주의와 종파주의의 요소가 있었고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충동적이고, 정책을 대신하여 감정을 사용하고, 적과 친구, 본인 자신의 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오히려 태연자약하며, 객관적인
것에 대한 과학적이고 면밀한 조사와 연구 정신이 결여되어 있고, 독선적인 정신이 있는, 이런 것들은 모두 주관주의의 잘못된 요소들이다. 더 나아가 예를 들어 당내에서 독립성을 내세우며, 자주적으로 업무능력을 발휘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창조성을 발양하는 이러한 올바른 것들과 동시에 상급자에 복종하지 않고, 다수에 복종하지 않고, 중앙에 복종하지 않으며, 개인과 당을 대립시키고, (개인의 돌출로) 개인이 당을 능가하고, (민족영웅주의, 군중영웅주의와 구별되는) 개인영웅주의 등 이러한 잘못된 것들이 뒤섞인다. 외래간부와 현지간부의 관계에서, 군간부와 지방간부의 관계에서, 본군간부와 우군간부의 관계에서, 노간부와 신규간부의 관계에서, 서로 돕고 단합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멸시하거나 심지어 괴롭히기까지 한다. 여기에서 외래간부, 군간부, 본군간부 및 노간부들에 대한 책임을 가중시키지 않고, 현지간부, 지방간부, 우군간부 및 신규간부들에 대해 그들을 단결시키고 발탁하여 투쟁과정에서 각종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어떠한 원조나 양해도 없다.
아직도 여러 지방에서 각종 비정상적인 내부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당내에서 종파주의 잔재가 발현하는 것이다. 당원과 비당원, 당의 간부와 평당원과의 관계는 더욱 큰 간극이 존재하고, 이해가 부족하고, 무관심하며 경시하는데, 그 책임은 주로 당원과 당의 간부가 져야 한다. “삼삼제(三三制)"[2]는 각 근거지에서 철저하게 구현되지 않았으며, 이는 이러한 종파주의 존재의 표현이다. 동지들 전부 또는 대부분이 당 안팎의 관계에서 매우 심각한 종파주의 오류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확실한 사실이다. 주관주의와 종파주의의 사상과 행동에 대해 철저하게 진지하고 심각한 투쟁을 하지 않으면 혁명의 승리를 쟁취할 수 없다. 당 전체의 총동원 없이는 투쟁과 극복이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할 것이므로, 전당과 전군의 각급 지도기관과 각급 지도동지들은 이 문제에 주의를 기울여 선전을 진행하고 업무를 진행하기 바란다. 본부는 이 문제에 대하여 상술한 자료들을 계속해서 제공하여 동지들이 업무에 참고하도록 한다.
("마오쩌둥 선집" 제2권에서 선정)
주석
[1] 이것은 정풍운동을 앞두고 마오쩌둥이 기안한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의 선전 요점이다. 이어 마오쩌둥은 1942년 2월 1일 《당의 작풍을 정돈하자》, 2월 8일 《당팔고(당의 형식주의)에 반대한다》 강연을 하였다.
[2] 삼삼제(三三制)는 항일전쟁 당시 중국 공산당의 통일전선 정권 정책이다. 이 정책은 항일민주정권의 인원 배분을 공산당원 약 3분의 1, 좌파 진보 약 3분의 1, 중도와 기타 약 3분의 1로 규정하고 있다.
【중국공산당 조직과 권력구조 관련 문건 해제 17】
이유정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1) 문영찬. (2021).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격(12). http://lodong.org/wp/archives/15063
2) Kong, L. (1993).
Subjectivity, Marxism, and cultural theory in China. In Politics, Ideology,
and Literary Discourse in Modern China (pp. 23-55). Duke University
Press.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 다음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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