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미래를 분석하거나 진단하는 책에서 자주 만나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유가가 갖는 역할과 의미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들은 중국에서 유가 사상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혁명을 거친 중국에서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중국은 국체 혹은 정체를 바꾸는 신해혁명, 국민혁명, 공산혁명이란 세 차례의 큰 혁명이 있었다. 혁명은 이전의 구세력이나 사상을 파괴하고 혁명 정권이 구상했던 근대화를 진행했다. 혁명은 반혁명세력, 더 폭을 넓히자면 전통을 파괴하고 새로운 시대로 진입했다. 그런데 세 차례의 혁명을 거치고도 과거 전통 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공자는 반복적으로 부활하고 있다. 공자는, 유가사상은, 전통은 왜 혁명정권에서 계속 부활했는가? 유가 사상의 역사적, 사회적 뿌리가 깊은 것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혁명으로 집권한 정권은 구시대의 부활을 왜 방치하는가? 혹시 혁명 정권이 유가 사상을 가르치고 전통을 부활시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사진 1. 상하이 문묘의 공자상
신해혁명은 군주제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성립시켰다. 이제 황제에 충성하는 ‘노예’가 아니라 공화국의 정신에 맞는 인재의 양성이 민국 초 교육계의 과제가 되었다. 남경임시정부의 교육총장이었던 차이위안페이는 유가 윤리는 공화제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1912년 전국임시교육회의를 열어 공화국에 맞는 교육이념의 제정을 요청했다. 공화국 국체를 뒷받침하고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인간상을 정립하는 것이 목표였다. 교육종지는 군주에 대한 충성과 공자 존숭을 폐기하고 공화국 공민으로서의 도덕 교육으로 대체했다.
그런데 혁명세력은 구세력의 반격으로 권력을 상실하거나 유가 윤리의 청산을 실행할 수 없었다. 차이위안페이 총장은 교육종지에서 공자 존숭을 없앴지만 권력을 유지하지 못했다. 사회에서는 공교회나 공도회 등이 유가를 국교로 만들 것을 주장했고, 공화 정신과 유가 정신이 일맥상통한다고 주장했다. 정권을 장악한 위안스카이는 공자 존숭을 주장했고, 학교에 경전 교육을 도입하였다. 1915년 위안스카이는 ‘교육강요’와 ‘교육요지’를 발표하여 유가 윤리를 공화국의 도덕으로 강조했다. 혁명이 전통을 청산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로 전환하기도 전에 구사회 세력과 전통 문화는 부활했고 학교 교육의 중심을 차지했다. 유가 사상의 폐기를 모색했던 세력은 공화 국체에 맞는 교육 이념을 모색하고 실현하기 위해 투쟁하고 다시 혁명을 만들어야 했다. 1919년 교육조사회는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공화정신의 양성을 주장했으며, 1922년 학제는 국가의 특정 목적에 종속된 인간의 양성이 아니라 개성의 발달에 중점을 둔 교육표준을 제정했다. 민국 초반의 교육계는 ‘유가 윤리’와 ‘개성을 중시하는 공화정신’이 국민 의식과 도덕을 둘러싸고 경쟁했다. 혁명은 과거와 단절을 경험하지 못했다.
국민당은 국공분열과 내부 분열 등 곡절을 겪긴 했지만, 구세력을 파괴하는 혁명 과정을 거쳐 정권을 장악했다. 국민당은 1925년 ‘교육방침초안’에서 혁명과 교육의 병진을 주장하며 평민화와 혁명화의 교육으로 국민혁명을 완수할 것을 주장했다. 국민당은 낡고 낙후한 봉건제도, 종법제도를 없애는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주의’로 무장한 국민을 양성하려고 했다. 국민당은 당화교육으로 낡은 세력을 없애는 ‘파괴의 혁명’을 교육했다. 그리고 1927년 차이위안페이가 교육행정을 책임지는 대학원 원장이 되었다. 공자가 부활하기는 힘들었다.
국민당은 1927년 4·12 이후 파괴의 혁명당에서 건설의 혁명당으로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총상회를 상민협회로 대체하려던 계획은 변경되고, 교육계에선 교육협회로 교육회를 대체하려던 시도가 무산되었다. 국민당은 기존 사회세력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고 건설에 유용한 집단을 동반자 혹은 동원의 대상으로 선택했다. 국민당의 지도자들은 학생은 운동을 중단하고 학업에 매진할 것을 요구했다.
국민당은 3전대회에서 삼민주의 교육방침을 결정했다. 교육종지는 삼민주의를 근거로 인민생활을 충실하게 하여 사회생존을 돕고, 국민생계를 발전시켜 민족생명을 지속시키는 것이었다. 혁명 정권의 정체를 뒷받침하고 지지할 수 있는 인간의 양성과 더불어 국가적 과제를 실천할 인재의 양성이 목표였다. 구사회 세력에 대한 공격을 일단락 지은 상태에서 혁명의 목표는 국민당적 근대의 실행이었다. 장제스를 비롯한 당정의 주요 요인들은 훈정시기에 교육의 중심기조는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소학에서 대학까지 직업화시켜 국민생산을 증가시키고, 소학에서 대학까지 국가가 요구하는 능력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국민당과 정부의 교육방침이었다.
개인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곧 혁명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국가는 반혁명세력과의 투쟁이 약화된 상태에서 개인을 독려하고, 정신을 무장시키기 위한 혁명교육과 도덕 교육, 애국 교육을 강조했다. 삼민주의는 공맹의 도로서 설명되고, 삼민주의 실천을 위한 구체적 덕목은 유가 윤리로서 설명되었다. 국민당은 학생에게 중국인으로서 애국심과 사명감을 불어넣기 위해 유가 이념을 소환했다. 그리고 일본의 침략이란 대외 위기는 국민당과 정부가 중국의 고유문화를 이용하여 민족의 자존감을 고양하도록 더욱 부추겼다. 전통 문화와 유가 이념은 혁명당과 국가에 의해 다시 정당성을 부여받고 부활했다.
1949년 공산당은 국민당을 쫒아내고 정치협상회의를 통해 중간파 등과 연합하여 정권을 잡았다. 공동강령의 문화교육정책은 봉건적 매판적 사상의 제거와 함께 국가건설인재의 배양에 집중했다. 그런데 중국공산당이 생각한 혁명의 최종 종착지는 신민주주의가 아닌 사회주의였다. 신민주주의는 사회주의로 바뀌고 사회주의 현대화로 전환해야 했다. 1956년 중국공산당 8차대회는 당과 국가의 주요 임무는 생산력 발전이고, 중국 국정에 부합하는 사회주의 건설을 진행하는 것이라고 발표했다. 중국 공산당은 계급투쟁보다는 생산력 발전을 위주로 한 사회주의 현대화 이행을 결정했다.
그런데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과 동구권 문제, 그리고 중국 국내의 농업합작사에서 탈퇴의 증가 등은 계급투쟁의 문제를 부각시켰다. 1957년 마오쩌둥은 인민 내부의 모순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문제를 설명하면서 정확한 정치 관점을 지니고, 사회주의적 각오를 지닐 것을 요구했다. 생산력 발전을 통한 사회주의 현대화보다 계급투쟁이 더 중시되기 시작했다. 1958년 중공 중앙과 국무원은 교육공작에 관한 지시를 내려 대약진운동에 호응하여 교육계의 대약진운동, 교육대혁명을 추진했다. 즉 학제운영, 교육관리, 수업 방식 등에서 계급적 관점, 군중 노선에 따라 자본주의적 요소를 제거하고 배제하는 계급 투쟁적 교육혁명의 추진이었다.
문화대혁명은 계급투쟁을 더욱 격화시켰다. 1971년 사인방이 작성하고 중공 중앙의 비준을 받은 ‘전국교육공작회기요’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의 교육성과를 모두 자산계급이 주도한 것으로 부정하며 교육영역에서 노동자 계급의 지도권을 공고히 하고 학생이 사상 각오를 높이는 것을 교육혁명의 최우선 순위에 두었다. 낡고 낙후한 봉건 잔재, 자본주의 잔재와 혹시라도 연관되어 계급투쟁에 엮일 수 있는 요인은 살아남기 힘들었다. 파괴적 혁명이 지속되는 한 전문성을 중시하는 교육이나 전통 문화와 공자는 부활하기 힘들었다.
1978년 개혁개방 이후 교육방침에 변화가 생겼다. 덩샤오핑은 1978년 전국교육공작회의에서 마오의 교육방침을 설명하면서 정확한 정치 방향을 견지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이것은 과학문화학습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각오가 높을수록 혁명을 위해 과학문화를 학습해야 하는 자각이 더욱 높아지고 노력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덩샤오핑은 혁명적 각오와 각성을 계급투쟁에 종사하는 것에서 과학학습에 대한 자각과 노력으로 전환시켰다. 혁명은 계급투쟁에서 사회주의 현대화, 그리고 그것을 담당할 인재의 양성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1983년 덩샤오핑은 “나아가야 할 세 개의 방향”(三個面向)을 제시하여 교육이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후 1985년과 1993년의 당의 교육개혁 방안 모두 이 방침을 계승했다. 교육은 사회주의 현대화에 기여해야 하며, 사회주의 건설자와 계승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계급투쟁이 약화되는 상황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충성, 조국에 대한 충성이 강조되고, 중국의 전통 문화는 조국에 대한 사랑과 결합하며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자와 계승자를 독려하는데 사용되었다.
혁명이 공자를 폐기하고 다시 부활시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중국의 세 차례 혁명에는 2개의 대립 구도가 작동했다. 하나는 낙후한 내부의 적을 부수는 전통의 파괴 이후 근대 국가의 건설로 이행하는 전통과 근대의 대립이었다. 그런데 혁명으로 전통의 파괴를 마무리한 후 근대 이행 과정에서 상황은 변했다. 혁명당은 국가 건설에 매진할 개인의 열정과 사명감을 북돋기 위해 혁명이념과 더불어 중국인임을 느낄 수 있는 문화를 강조했다. 유가와 전통의 부활은 중국인으로서 자각을 통해 ‘근대화’라는 혁명의 과제를 달성하는 매개였다. 이것이 두 번째 대립 구도로서 혁명당의 근대화 과정은 바로 중국과 서양의 대결로 변화했다. 그리고 중국의 급격히 부상한 오늘, 중국인임을 자각하게 하고 혁명의 완수를 뒷받침했던 전통 문화는 더욱 강조될 것이며 더 나아가 중국이 문화적 자부심을 외부로 확장하는 문화 애국주의, 문화 팽창주의로 확장하지 않을 것이라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병인 _ 한국교원대 교수
해당 글은 중국학술원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중국학술원에서 제공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