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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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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국체제 하, 중국사회의 이해 _ 김태승

1936년 상해에서 발행된 한 잡지는 해골로 뒤덮인 세계지도와 해골로 장식된 십자가를 등에 이고 방황하고 있는 악마의 모습으로 미래를 예측했다. 만주사변, 공황, 국공내전을 겪고 있던 중국사회에서 현실은 막막한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중국에서 가장 번영하던 상해의 경우, 한편에서는 매우 향락적인 문화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었던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인신매매, 납치, 아편, 빈곤, 전쟁, 테러 등 일상적 삶의 안전을 위협당하는, 위험이 일상화된 사회가 존재했다. 그래서 한 잡지에서 조사에 응한 지식인들은 세계의 미래상을 해골로 뒤덮인 잔인한 세계로 묘사했던 것이고, 희망은 아득히 먼 상상 속에서조차 존재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미래에 대해 희망찬 확신을 가지고 있던 정치집단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중국 공산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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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1936년 상해에서 발행된 <신세계>라는 잡지에 수록된 그림


사실 이 이후 중국에서 진행된 역사는, 당시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낙관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문혁이 끝나고 개방정책이 공식적으로 채택되기까지, 1930년대 중반의 지식인들이 생각했던 참혹한 세상이 펼쳐졌었다. 중일전쟁과 참승으로 표현되었던 고통스런 승리, 국공내전, 대약진과 문혁 등 1949년 건국 직후 짧은 시기를 제외하면 신해혁명 이후 거의 반세기 이상 중국은 격심한 혼란과 거기에서 파생된 고통을 겪어왔다고 말할 수 있다. 무고한 많은 생명들이 전쟁, 기근, 국가폭력 등에 의해 세상을 떠나야 했으니, 1930년대 중국인들이 상상했던 암울한 미래는 현실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었으니, 1976년 마오쩌뚱이 세상을 떠나고, 1978년 등소평이 정권을 장악한 뒤 추진했던 개혁개방정책의 성공은 당연히 중국인들에게는 신세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1930년대 상해 지식인들이 생각했던 암울한 미래는 사라지고 번영하는 강대국 중국이라는, 아편전쟁 이후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중국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번영의 지속은 중국 공산당의 영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해석되었다. 공산당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동방홍>으로 상징되던 공산당의 절대화/신화화는 개혁개방이후 장쩌민 시대에 이르러 새롭게 정의되었다. <세 가지 대표론(三個代表論)>이 바로 그것이었다. 중국공산당이 운영하는 <당사학습>홈페이지에서는 중국공산당의 성질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중국 공산당은 중국노동계급의 선봉대이며 동시에 중국 인민과 중화민족의 선봉대이며,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업의 영도핵심이다. 중국 공산당은 중국 선진생산력의 발전요구를 대표하며, 중국 선진문화의 전진방향을 대표하며, 중국 광대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세 가지 대표론>은 공산당이라는 하나의 권력집단을 중국이라는 역사적 실제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었다. 게다가 이러한 정의는 아래로부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권력에 의해 규정되었다는 점에서 과거와 차이가 있었다. 이제 공산당은 현실에서 벗어난 포괄적 존재로 절대화됨으로써 현실과 분리되는 길에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중국공산당은 역사에서 탈출하여 신화가 되었다. 거기에 시진핑 시대에 들어오면서 지배체제는 기관()의 독재가 아니라 사람의 독재로 변모해 갔다.


사실 중국현대사를 살펴볼 때, 1950년대 이후 1970년대 말까지 3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중국 공산당은 미로에서 헤매는 것처럼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래서 1981116중전회의에서 <건국이래 당의 약간 역사문제에 대한 결의>라는 형식의 문건을 채택하여 혼란을 정리하고자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쨌든 중국 공산당의 자기성찰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1차 역사결의가 연안정풍 운동의 총결이라면, 2차 역사결의는 건국 이후 당 정책의 문제와 개인숭배 유산의 극복이라는 문제에 대한 정리의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00년의 중국 공산당의 역사를 정리했어야 할 3차 역사결의에서는 그러한 자기성찰의 모습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건 예측 가능한 제도적 정권교체 체제를 후진타오 1대에 한정함으로써 시진핑의 중국 공산당은 상당한 정치적/사회적 부담을 각오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대신 중국 공산당은 공산당의 양적 팽창과 신세대의 당원유입에 상당한 공을 들임으로써, 그들의 정치 전략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20216월에 공개된 중국 공산당 <당내 통계공보>에 따르면 당원은 9,514.8만 명으로 2019년 말 대비 3.5% 증가했다. 당원 수 증가에 따라 기층 조직도 486.4만 개로 3.9% 증가했다. 시진핑 집권 후인 18대 이후 당원의 증가가 더 많아졌는데, 특히 35세 이하 젊은 층의 증가가 두드러졌다. 당원의 연령별 구성에서 35세 이하는 2367.9만 명(그 가운데 30세 이하는 1255.3)으로 전체의 24.9% 정도를 점하고 있다. 특히 당원 증가를 선도했던 것은 학생, 여성, 소수민족, 고학력자 집단이었다. 그 정황은 아래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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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2020.1~2021.6월까지의 당원 증가 양상

(끝자리수의 차이는 소수점 이하 처리 때문)


공개되어있는 2013년 이후 최근 7년간의 자료에 근거해 보면 매년 1% 내외의 당원이 증가해 왔는데, 최근 그 추세가 빨라지고 있다. 특히 창당 100주년이 되는 2021년 전반기 만해도 그 전 해 전체의 증가 수와 비슷한 수치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당원 수 증가의 경향은 2020년의 중국 인구증가율이 0.3%(세계은행 자료)임을 고려한다면 얼마나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2020년 중국 인구를 세계은행은 14억으로 추산하는데, 이를 근거로 하면 중국인 15명 정도가 모이면 그 가운데 한 사람은 당원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고, 기층조직의 숫자를 기준으로 하면 중국 공산당에 의해 중국 사회가 촘촘하게 장악되어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80년대 이후 세대의 대량유입과 같은 당의 질적 변화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 <중국공산당당내 통계공보>에 따르면 20216월까지의 대상기간 중 입당 신청자가 2,000만 명을 넘고 있었다. 113중전회 시기까지의 당원수가 1,455만 명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전 국민의 당원화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웃으로서의 중국과 어떤 미래를 공유할 수 있을까? ‘신화이 되는 나라와 공존할 수 있는 지혜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젊은 세대의 분노가 애국주의 광풍으로 나아가는 것을 묵인하고, 홍콩 실험을 통해서 중국 공산당의 관용정책 한계가 뚜렷하게 노출되고, 현실적 어려움에 직면해서도 중국사회 자체의 내적 역량의 성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계몽적 독재 권력 즉 당의 지도에 의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중국 특색의 민주주의라고 강변하는 중국공산당의 모습이 한국의 정치상황과 맞물려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김태승의 六十五非 26


김태승 _ 아주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해당 글은 중국학술원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이 글에서 사용한 수치들은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http://dangshi.people.cn (공개된 자료에 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