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화교협회가 올해로 설립 100주년을 맞이했다. 그런데 올해가 100주년이라는 사실조차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냥 100주년이 지나가는 것이 아쉬워 이렇게 글이라도 써서 기념하고자 한다.
사진 1. 2005년 대구화교소학 운동장에서 개최된 대구화교정착100주년 개막식 장면
대구화교협회는 처음부터 ‘화교협회’의 이름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대구화교협회가 소장하고 있는 ‘본회성립건축급연관일람표’(本會成立建築及捐款一覽表) 편액이란 것이 있다. 이 편액은 대구화상공회의 회관 건축 시 그 경위와 기부자의 명단을 기록한 것으로 1930년 1월에 제작되었다. 이 편액의 서문은 공회의 설립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어, 그 전문을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민국 10년 대구화상동향회가 설립됐다. 그때 기부금은 있었지만 실제 확실한 장정은 없었다. 우리 교상(僑商)의 장사가 날로 번성하여 일체의 사무가 이전에 비해 번잡해졌다. 때문에 민국 16년 공점홍(孔漸鴻), 장련방(張蓮舫), 강의관(姜義寬), 양심재(楊心齋) 등 군의 발기로 동향회를 대구화상공회로 개조하려 했다. 원래의 예금이 있었고, 당시 강의관 군이 매입한 남산 밑의 600원 하는 200평의 부지가 있었다. 동시에 또한 조선인의 부지 1천여 평을 매입하여 공회의 공동의지로 사용했다. 지가는 480원이었다. 더욱이 일일이 열거하는 잔금이 있어 공회에 넘겨주어 접수정리, 원래의 부족분을 메우려 했다. 집회와 업무의 장소는 적당한 부지 1필지에 공회회관을 건축하고, 낙성하려니 필요 금액이 막대하였다. 처음에는 건축비로 사용할 예비금이 없었다. 그래서 기부와 모금의 두 가지 방법으로 발기한 결과 성적이 매우 좋았다. 각 가정도 발기하여 어려운 일을 열심을 다해 맡는 책임을 불사하지 않았다. 오늘날 찾아보기 힘든 훌륭한 모습이다. 당시 조직의 대강 및 정립된 회장과 정리해 놓은 장부가 있어 영구히 보존하려 한다. 지금 본회 성립의 선후 기부금 및 외지 모금액의 근거 장부의 회계를 실시하여 일체의 경비, 잔액을 확인했다. 모든 내용은 왼쪽에 적어 둔다.”
즉, 민국 10년(1921년)에 대구화상동향회가 설립된 것이 기록되어 있다. 대구지역 거주 화상의 동향 단체로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대구에 화교가 정착한 것은 조선총독부의 자료에 의하면 1905년 경이었다. 경부철도가 부설되면서 내륙의 상업도시 대구가 서울, 부산과 연결되면서 화상이 하나, 둘 대구지역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대구화상동향회가 조직된 1921년의 대구지역 화교인구는 318호, 780명이었다. 대구화교가 정착한 지 16년이 지나서야 대구화상동향회가 설립된 것이다. 당시 대구지역 화교의 출신지는 대부분이 산둥성(山東省)이기 때문에 대구화상산둥동향회나 마찬가지였다. 1920년대 들어 조선화교의 인구는 전체적으로 급증하는 추세를 보이는데, 대구화교의 인구 증가는 타 지역 화교인구를 능가했다. 1924년이 되면 조선 남부의 주요 화교 거주지인 부산, 목포, 군산의 화교인구를 넘어서 1927년에는 477호, 1,911명으로 증가했다.
대구화상동향회는 1921년에 설립되었지만 회칙이라 할 수 있는 장정(章程)도 없었고 조직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1920년대 대구화교의 경제는 주단포목상점, 잡화상점, 주물공장, 그리고 요리점과 음식점 분야에서 발전했다. 인구 증가와 경제 발전으로 대구지역 화교의 중심이 되는 반듯한 사회단체가 필요해졌다. 중국 대륙에서도 장제스(蔣介石)에 의한 북벌 성공으로 남경국민정부가 설립되고, 국가 발전과 경제 발전을 위해 해외 화교를 활용하려는 교민 정책이 추진되었다. 그 일환으로 각 영사관을 통해 화교의 상업이 발달한 해외 도시에 중화상회 설립을 주도해 나갔다.
사진 2. 대구화교협회 소장의 각종 편액
대구에 중화상회가 아니라 화상공회가 1928년 먼저 설립된 것은 중화민국 정부의 상회법 때문이었다. 1915년의 상회법에는 회원 자격에 합당한 자 50명 이상이 되어야 발기가 가능했는데, 대구의 경우 발기인은 26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28년 5월 27일 대구부 니시치요타마치(西千代田町, 현재의 장관동) 22번지(MT라이프모텔의 주차장 부근)에 회관을 건축하고 대구화상공회를 공식적으로 설립했다. 대구화상공회의 회관은 본채를 기준으로 동서로 곁채가 자리하고 그 중앙에 작은 정원이 있었으며, 회관 둘레는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본채는 2층 벽돌조 건축물로 방은 3개였다. 그런데 남경국민정부가 1929년 8월 새로 공포한 상회법에서 50명 이상의 발기인 규정을 철폐함으로써 대구화상공회가 대구중화상회로 승격될 수 있게 되었다. 중화상회는 중화민국 정부 공상부의 정식 설립인가를 획득한 정부 공인단체로 중화상회의 대표에게는 상당한 권한이 부여되었다.
이에 따라 대구화상공회는 1930년 4월 대구중화상회로 개조하기 위해, 주경성총영사관을 통해 남경국민정부 공상부에 ‘대구중화상회장정’(大邱中華商會章程), ‘대구중화상회개조후제1차선거직원표’(大邱中華商會改造後第一次選擧職員表)를 송부하여 설립 인가를 획득했다. 대구중화상회의 초대 주석은 산둥성 무핑(牟平) 출신의 왕민립(王民立, 33세)으로 주단포목상점 덕취화(德聚和)의 경영자였다. 1936년 8월부터 새로 주석에 선출된 인물은 모문금(慕文錦)이었다. 그는 산둥성 황현(黃縣) 출신으로 쌍흥호(雙興號) 건축회사와 군방각(群芳閣) 중화요리점의 경영자로 지역 화교 사회의 지도자였다. 1917년 대구로 이주한 후 1960년대 말 타이완으로 재이주하기까지 50년 동안 대구에 거주하면서 한국인으로부터 ‘모서방’이라 불리었다.
모문금은 대구중화상회 주석으로서 대구화교소학을 설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소학의 교실은 대구중화상회의 회관의 방을 빌려 1943년 2월 정식 개교했다. 교사는 산둥성에서 초빙한 손전순(孫殿舜)이었다. 대구화교소학은 부산영사관을 통해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매월 100원의 지원금과 학생들의 수업료 그리고 대구중화상회의 지원금으로 운영되었다.
해방 후 화교소학의 학생수가 증가해 기존의 회관 건물로는 모두 수용할 수 없게 되자, 대구중화상회는 회관 맞은 편에 있던 서병국의 주택을 매입했다. 1950년 4월 4일 제작의 ‘대구화교소학교신구교사발기급성립’(大邱華僑小學校新購校舍發起及成立) 편액은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대구화교소학교의 신 교사 매입 자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상회 회장 겸 교장 모문금 및 학교 부형 연보주(連寶珠), 교동회 동사장 장청귀(張淸貴), 부동사장 서증지(徐增智), 이수경(李壽卿) 등이 기부금 모금을 발기했다. 1948년 10월부터 본년 4월까지의 기부 모금총액은 한화 568만3,400원이었다. 여기에 상회 구 부지 판매대금 150만원, 학교기금 48만5,880원을 더해 총 766만9,280원이었다. 새로운 교사 부지 매입비 및 공비, 잡비, 수리비 지출을 제한 잔여액 29만1,593원은 학교 공비로 귀속시켰다. 지금 교육 열심의 마음으로 이해하여 모든 선생의 방명을 왼쪽에 기록하여 잊지 않으려 한다.”
편액의 내용 가운데 ‘구 부지 판매대금 150만원’은 구 회관을 매각하여 획득한 대금을 말한다. 대구중화상회가 약 700여만원으로 매입한 새로운 부지 및 건물은 현재의 대구화교협회 건물과 대구화교소학의 부지이다. 원래 이 건물과 부지는 대구 최고의 갑부 서병국의 개인 주택이었다. 이 주택의 부지는 501평에 달했다. 이 부지는 원래 친일파의 거두인 송병준 소유의 땅이었다가 1927년 조선농업주식회사(朝鮮農業株式會社)에 매각됐다. 서병국이 이 땅을 매입한 것은 1928년 12월 13일이었다. 1943년 1월 11일에 서병국은 창씨개명을 하여 쯔치하라 이나구니(土原稻國)명의로 바뀌었다. 1946년 8월 20일에는 서치균(徐致均)으로 명의가 이전되었다. 서치균으로부터 화교 연수해(連壽海) 외 3인의 명의로 소유권이 이전된 것은 1971년이었다. 1950년 당시 이 건물과 부지가 대구중화상회나 대구화교소학으로 곧바로 이전된 것은 아니었으며, ‘대구화교소학교’로 명의가 이전된 것은 1985년 1월 8일이었다. 새로운 화교소학 건물이 된 3층 벽돌 건물은 1929년 모문금이 경영하고 있던 쌍흥호에 의해 건축된 것이었다.
사진 3. 대구중화상회가 1930년 4월 9일 주경성중화민국총영사관에 보낸 공문
대구중화상회의 명칭은 본국 정부의 교민 정책 변화에 따라 바뀌었다. 주한중화민국총영사관은 1947년 한국화교를 조직화하기 위해 자치구 조직을 설립했다. 자치구 조직은 48개 지구에 설립되었는데, 대구에도 화교자치구가 설립되면서 각종 행정사무를 맡아보게 되었다. 기존의 대구중화상회는 단순한 상업단체로 전락하면서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1958년 대구화교자치구의 구장은 서증지(徐增智), 부구장은 이경문(李慶文), 이봉서(李鳳瑞)였다. 그리고 주한중화민국대사관은 1960년 기존의 ‘자치구’ 조직의 명칭이 한국인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이유에서 명칭을 화교협회로 바꾸도록 지시했다. 대구화교자치구도 이때 대구화교협회로 명칭이 바뀌게 되고, 지금까지 이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대구화교협회와 대구의 시민사회는 협력하여 2005년 10월 8일부터 11일까지 대구에서 대구화교정착100주년 행사를 성대히 개최했다. ‘100년 이웃 100년 친구’를 주제로 개최된 이 행사는 대구화교 100년 발자취 투어, 100주년 기념 퍼레이드,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 등을 열어 많은 화교와 시민이 참가했다. 특히, 서울에서 개최된 세계화상대회에 참가한 해외 화상 120명이 100주년 기념행사의 폐막식에 참석했다. 100주년 행사는 그후 ‘대구화교중화문화축제’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대구화상동향회에서 시작된 역사는 대구화상공회, 대구중화상회, 대구화교자치구를 거쳐 대구화교협회로 이어졌다. 대구화교협회 100년의 역사는 대구화교 100년의 역사이자 대구 지역사 100년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올해는 대구화교협회 100주년인 만큼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2021년은 이제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한반도화교와 베트남화교 마주보기 18】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참고문헌
이정희, 「근대 중국의 상회 연구-대구중화상회를 중심으로」, 『중국지식네트워크』제17호, 국민대학교 중국인문사회과학연구소, pp.93-141, 2021.5.
이정희, 「대구화교소학의 설립 경위와 운영-대구화교협회소장 편액을 근거로」, 『대구경북연구』제19권 제3호, pp.1-24, 2020.11.
이정희, 「대구중화기독교회의 운영과 화교사회: 양춘상장로소장자료를 근거로」, 『동서인문』제12호, 경북대인문학술원, pp.263-300, 2019.10.
대구화교정착100주년기념사업회, 『대구화교정착100주년기념자료집』, 대구화교정착100주년기념사업회, 2006.5.
이정희, 「20세기 전반기 대구지역 화교의 경제활동(1905-1955년)」, 『대구사학』80, 대구사학회, pp.71-102, 2005.8.
**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은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대구화교정착100주년기념사업회 제공
사진 2. 필자가 직접 촬영한 사진
사진 3. 타이완 중앙연구원근대사연구소 당안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