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베이징항공항천대학(北京航空航天大学) 공상관리계(工商管理系)의 한더챵(韩德强) 교수는 30여 명의 학생과 함께 일종의 농촌공동체를 설립했다. 베이징에서 약 30분 거리에 있는 허베이성(河北省) 바오딩시(保定市) 띵싱현(定兴县)에 설립된 이 공동체의 이름은 ‘정도농장(正道农场)’이었다. 이들은 농장 내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함께 농장에서 노동하고, 함께 학습하며 공동생활을 영위하였다. 학습은 공자에서 마오쩌둥에 이르는 다양한 텍스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주로 전통적 유교 이념과 마오쩌둥 사상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학습이 진행되었다. 대표적인 좌파 웹사이트 ‘유토피아(乌有之乡)’의 설립자 가운데 하나였던 한더챵의 행보는 세간의 주목을 받았으며, 농장의 설립 자금도 주로 마오주의자들의 후원으로 조달되었다.
사진 1.羽戈, 「韩德强以及他的“人间天堂”」
약 3년간 유지된 이 공동체의 결말은 그리 밝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단체의 미신적 성격이 집중적으로 조명되었고, 한더챵에 대한 일종의 개인숭배 현상까지 표면화하였다. 한더챵이 본인을 공자와 석가모니, 마오쩌둥을 초월하는 사람으로 자평하면서, 자신이 옥황대제(玉皇大帝)처럼 세상을 굽어보는 존재라고 주장했다는 관계자의 폭로도 등장했다. “‘농전’을 경작하고(种农田), ‘단전’을 함양하며(养丹田), ‘심전’을 기른다(育心田).”라는 ‘정도농장’의 슬로건은 단순한 심신 수양의 차원을 넘어 일종의 미신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결국, 중국 정부는 2016년 12월에 ‘교육허가증’이 없다는 이유로 이 단체를 강제 해산하였다. 한때 SNS의 오피니언 리더 가운데 하나였던 한더챵도 이와 함께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정도농장’의 실체에 대해서는 보다 심층적인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그 실체와 무관하게 ‘정도농장’에 대한 관심이 확산했던 이유는 그것이 표방했던 가치가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노동의 가치’와 ‘노동을 통한 교육’을 강조하고, 도시의 물질주의적 삶을 거부하는 실천은 대안적 공동체를 고민하는 이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도농장’은 한때 마오주의적 코뮌의 재현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노동’과 ‘학습’, 그리고 ‘공동생활’에 기반한 대안적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실험은 중국에서 약 100년 전에도 열렬한 관심 속에서 시도된 바 있다. 1917년 7월에 소년중국학회(少年中國學會) 회원 줘쑨썽(左舜生)은 <시사신보(時事新報)>에 「소조직 제창(小組織的提倡)」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학습과 사업, 생활이 통합된 소규모 공동체를 설립함으로써 청년들의 삶을 개혁하자는 주장을 제기한 바 있다. 여기에 더하여, 저우쭤런(周作人)이 <신청년(新靑年)> 1919년 3월호에 무샤코지 사네아쓰(武者小路實篤)가 주도한 일본의 신촌운동(新村運動)을 중국에 소개하면서, 노동과 학습이 결합된 공동생활의 이상이 중국의 청년과 지식인 사이에서 폭넓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소년중국학회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된 관련 토론은 다양한 간행물을 통해 전국의 청년과 지식인들에게 전파되었고, 이들이 다시 지면을 통해 다양한 견해를 발표함으로써, 소규모 공동체 건설을 통한 이상 사회 구현은 신문화운동 시기의 개혁적 열망에 사로잡힌 지식인들의 중심 화두로 떠올랐다.
톨스토이의 범노동주의,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 ‘경독(耕讀)’을 추구하는 전통적인 ‘은일(隱逸)’ 관념 등, 다양한 사상적 요인이 이들의 개혁적 열망에 불을 지폈다. 무엇보다도, 유교적 가부장제에 기초한 전통적 가족제도를 ‘구악(舊惡)’의 근원으로 규정했던 신문화운동 시기의 지적 분위기는 개인에 대한 속박이 제거된 수평적 관계에 기초한 새로운 형식의 공동체에 대한 희구를 강화하였다. 평등한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함께 노동하고 함께 공부하며 생활하는 공동체를 설립하는 것은 단순히 현세에서 벗어나는 것을 넘어,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위한 적극적인 실험이자 실천이었다.
사진 2. 왕광치(王光祈) 사진 3
‘신촌운동’이 농촌을 무대로 한 것과 달리, 이들의 생활 기반은 도시에 있었기 때문에 이 실험은 도시를 배경으로 진행되었다. 소년중국학회 창립을 주도했던 왕광치(王光祈)는 1919년 12월 4일에 <신보(晨報)>에 「도시 속의 신생활(城市中的新生活)」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도시 속의 ‘신촌’으로서 ‘공독호조단(工讀互助團)’을 설립할 것을 제안하였다. 리다자오(李大釗), 천두슈(陳獨秀), 후스(胡適), 차이위안페이(蔡元培) 등 당시의 내로라 하는 지식인들이 그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후원하였으며, 각종 매체를 통해 전파된 이 주장에 수많은 독자가 호응하였다. 열정적인 지지 속에서 왕광치가 주도하는 공독호조단이 베이징에 설립되었고, 이와 유사한 단체들이 베이징 시내에서 추가로 조직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하이, 톈진, 우한, 광저우, 양저우 등지에서도 잇달아 설립되었다. 1919년 말부터 1920년 중반까지 주요 대도시 곳곳에서 새로운 공동체 실험이 전개되었고, 이 실험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도 각종 매체의 지면을 통해서 그 소식을 접하고, 또 그에 대하여 활발하게 토론하면서 이 운동에 간접적으로 동참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의 실험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왕광치가 설립한 첫 번째 공독호조단은 1920년 3월에 해체되었다. 단원들은 공동체의 경제적 독립을 위하여 다양한 노동과 사업에 투신했지만, ‘교육받은 엘리트’로서의 정체성에 의존하지 않는 한, 단체를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수입을 창출하지 못했다. 단원들은 세탁소 경영, 영화 상영, 식당 운영 등 다양한 경제 활동을 시도했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유일하게 어느 정도의 수입을 창출할 수 있었던 것은 단원들이 개인적으로 진행한 영어나 수학 교습 활동이었다. 물론, 이러한 교습 활동도 당연히 ‘노동’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이지만, 당시 이 운동에 참여한 청년들에게 이는 운동의 취지에 반하는 것이었다.
공동체 내부의 갈등도 운동을 좌초시킨 한 요인이었다.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지닌 채 운동에 동참한 단원들은 공동체 내부의 다양한 문제와 주제에 대하여 열띤 토론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로의 시각 차이가 첨예하게 표출되었고, 여기에서 비롯된 갈등은 단원들의 이탈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특히, 항저우 출신으로 베이징까지 와서 이 공독호조단에 참여한 스춘퉁(施存統)과 유시우쑹(兪秀松)은 가장 급진적인 단원들이었다. 이들은 단원들에게 이상과 행동의 엄격한 일치를 주문하면서, 다양한 문제에 대하여 원론적인 비판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한 갈등은 공동체 내부의 긴장을 심화하는 원인이 되었다.
사진 4. 스춘퉁(施存統) 사진 5. 유수송(兪秀松)
1920년에 들어와 대부분의 공독운동(工讀運動)과 신촌운동이 실패하면서, 운동에 참여했던 청년과 지식인들은 다양한 경력을 이어갔다. 중국공산당의 혁명운동을 역사 서술의 중심에 두는 서사에서는 이 운동의 실패가 곧 ‘공상적 사회주의’의 실패를 의미하며, 이 실패를 통해 비로소 ‘과학적 사회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로의 도약,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창당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서술한다. 실제로, 스춘퉁과 유시우쑹, 덩중샤(鄧中夏), 장궈타오(張國燾), 뤄장룽(羅章龍) 등, 중국공산당의 초기 당원들 가운데 다수가 이 운동에 직접 참여하였고, 리다자오, 천두슈, 마오쩌둥처럼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이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인사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들과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간 사람들도 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줘쑨썽처럼 국가주의의 노선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었고, 왕광치처럼 아예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사람들도 있었다. 왕광치는 이후 독일에서 유학하며 음악 연구에 매진하여 중국의 대표적인 음악사 연구자가 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공독운동이나 신촌운동에 관한 사회적 관심이 시든 뒤에도 지역사회에서 공동체 건설의 꿈을 이어간 사람들도 있었다. 사회적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평등한 개인들의 ‘공독(工讀)’과 ‘호조(互助)’에 기초한 공동체 건설에 대한 희구는 비록 역사의 주선율에서는 밀려났지만, ‘일장춘몽’에 그치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왔으며, 아마도 인류의 문명이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 참고자료
Robert Foyle Hunwick, “The Communists that China Forgot,” Foreign Policy, April 30, 2015.
(https://foreignpolicy.com/2015/04/30/communists-that-china-forgot-righteous-path-farm-academy/)
「媒体:韩德强,你的“正道农场”不要迷信得太夸张」(2016.12.06.), 凤凰网 웹사이트.
(https://news.ifeng.com/a/20161206/50372748_0.shtml)
「韩德强疯了? 大V境遇巨变左右皆边缘化」(2016.12.09.), 多维新闻 웹사이트.
(https://blog.dwnews.com/post-926369.html)
Shakhar Rahav, “Scale of Change: The Small Group in Chinese Politics, 1919-1921,” Asian Studies Review, vol.43, no.4, 2019.
梁心, 「“另辟新境”的社會改造: 新村運動與民國早期讀書人的鄕村想象」, 『社會科學硏究』 2016年 第2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