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사 초기의 재미중국인 가족 중에는 입양이 아닌데도 혈연으로 연결되지 않은 가족원들이 있었다. 가족 모임에서 늘 소외되거나 뭔가 어색하고 삐걱거린다고 느끼며 살다가, 나중에 할아버지나 아버지, 할머니나 어머니가 소위 ‘종이 아들’, ‘종이 딸’이었다는 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토로한 중국계 미국인(Chinese American)들이 적지 않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밤비’의 일러스트레이터이자 홀마크, 워너브라더스 등에서 활동한 타이러스 웡(Tyrus Wong)도 ‘Look Tai Yow’란 이름의 종이 아들로 1920년 미국에 입국한 후 1946년 시민권을 획득하고 미국 예술문화계 곳곳에 큰 족적을 남기며 활동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사진 1. US National Archives 소장 종이아들 서류
종이 아들(서류상 아들)과 종이 딸들은 1900년대 초부터 1943년 이전까지 미국 시민권을 가진 중국인과의 (가짜) 혈연관계를 증명하는 서류를 구해서 미국에 입국한 중국인들을 의미한다. 미국 정부에서 발행한 출생증명서는 미국 시민인 중국인이 중국에 돌아가서 낳은 실제 아들, 딸이 시민권을 얻는 증명으로 쓰이기도 했지만, 주로 친척이나 이웃, 심지어 생판 모르는 이들이 종이 아들과 종이 딸로 미국에 입국할 수 있는 티켓으로 팔렸다. 이들은 1882년 중국인 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 이후 양산된 중국인 불법이민자 중 미국 정부가 발행한 법적 근거(출생증명서)를 취득하여 입국한, 즉 미국의 법이 금하고 미국의 법이 허락한 불법이민자인 셈이다. 이들은 이민 심사에서 통과하면 바꾼 성을 지닌 채 미국에서 시민으로 살게 되었으며 추후 가족을 불러올 수도 있었고 다시 혈연이 없는 종이 아들⸱딸을 불러들이기도 했다.
종이 아들 현상을 불러일으킨 주요한 계기는 1882년의 중국인 배척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미국 역사상 특정 국적에 기반해서 한 이민자 집단 전체를 배제하고 미국으로의 입국과 시민권을 부정한 미국 최초이자 유일한 연방 법안이었다. 19세기 중반(1850년대)부터 수가 증가한 중국인에 대한 혐오와 반감이 커지는 것과 함께 캘리포니아에서부터 중국인을 겨냥한 차별적 법안들이 축적되기 시작했다. 연방정부 차원에서도 1862년 쿨리 교역을 금하는 법안(Coolie Trade Act), 1875년 중국인 여성의 입국을 금하는 법안(Page Act)으로 발효되었고, 급기야 1882년 중국인 노동자의 입국을 10년간 막는 배척법이 등장했다. 이 배척법에 따르면, 유학생, 관광객, 상인, 외교관 등 특수목적인은 입국 금지대상에서 면제되었다. 이는 중국인이 여행 오거나 유학이나 비즈니스로 잠깐 오는 것 외 중국인이 미국에 정착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입국 금지는 1892년에 10년 더 연장되었고(Geary Act) 이때부터 미국에 거주하던 중국인들은 모두 거주 등록증을 발부받아 소지하고 다녀야 했다. 1902년 다시 입국 금지가 연장되었고 1904년에 이르러 중국인 입국 금지는 영구화한다고 선포되었다.
보통의 중국인에 대한 이 전무후무한 배척은 어디에 기인하고 있었을까. 중국인 노동자는 처음에는 광산, 철로, 농업 등의 분야에서 일할 값싼 노동력으로 환영받았다. 그러나 19세기 말의 경기 부진으로 백인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면서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으로 일자리를 채웠던 중국인들이 타겟이 되기 시작했다. 낮은 임금에 상응하는 고단하고 험한 생활 수준, 남성 위주의 이주노동과 연루된 매춘, 도박, 아편, 갱 활동 등은 모든 인종주의적 행동 패턴이 그러하듯, 중국인을 향한 적대감과 폭력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담론화되었다. 보수 정치인들 중에는 정치적으로 과도한 행동을 할 수 있고 문화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이 이방인들이 투표권을 얻어 생기는 결과에 대한 암울한 전망을 공공연히 퍼뜨리기도 했다. 이러한 적대감과 위기의식은 미국에 국가적 위협이 된다는 프레임 속에 증대되며 법적 규제로 공식화되었다. 즉, 중국인은 ‘미국인’-백인-의 일자리를 빼앗는 경제적 위협이자, 여성의 경우 매춘으로 ‘도덕적, 인종적 오염’을 가져오고, 남성의 경우 여러 규제로 인해 요리와 세탁업으로 직업 영역이 축소된 가운데, ‘여자의 일’을 하며 성역할 범주를 혼란시킨다는 의미에서도 위협이라 비난받았다. 반중정서가 들끓던 1870년에서 1880년 사이 중국인은 전체 이민자 중 고작 4.3%일 뿐이었지만, 비백인 중에서는 최다 집단을 구성하면서 타겟이 되었다는 점에서 배척법은 단순히 이방인에 대한 배제이기보다 다분히 인종주의적인 성격을 띤다.
이 시기는 미국이 하와이, 필리핀 점령 등 제국으로 확장하던 시기로서, 미국의 배척은 제국 미국의 헤게모니 확장과 더불어 캐나다, 멕시코, 브라질, 필리핀, 하와이 등에서도 같은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혼란의 중국 대륙을 벗어나 새로운 삶의 기회를 찾으려는 열망이 절실했던 만큼, 이민법의 확장으로 미국 입국 길이 막히고 미국 내에 이미 거주하던 이들도 매일 불안에 떨게 한 상황은 그러나 오히려 중국인들을 행동하게 만들었다. 소송 문화가 익숙지 않았던 이들이 법정 소송을 무기로 하여 권리 박탈에 저항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캐나다 국경과 멕시코 국경을 통해 입국하려는 불법이민자가 양산되는 가운데 법의 틈새에서 편법을 찾아낸 수많은 이들이 있었다.
종이 아들 관행은 배척법 이후 삶의 기회를 모색하던 이들에게 1906년에 발생한 샌프란시스코 지진이 기회를 제공한 편법이다. 1906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발생한 지진과 뒤이은 화재로 인해 주 정부가 소장하고 있던 출생기록이 모두 소각되었는데, 이때 미국에 이미 거주하고 있던 중국인들은 미국에서 출생했다고 주장하며 출생증명서를 발급받았다. 미국이 2차대전 시 중국과의 연대를 위해 배척법을 폐지하게 되는 1943년 이전까지 중국인은 법으로 귀화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출생증명서는 중국인이 미국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였다. 또한 미국 시민권자에게서 출생한 아이는 자동적으로 시민권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출생지가 미국이든 중국이든 출생한 아이는 시민권자의 자녀로 입국할 수 있었다. 미국에 거주하던 수많은 중국인들이 출생증명서를 발부받았고 이는 수많은 종이 아들과 딸들에게 전달되고 판매되었다. 또한 중국인 배척법의 대상에서 상인은 면제되었기 때문에 미국에 거주하던 중국인 상인에게 일정액을 지불하고 그의 사업 파트너로 이름을 올려 ‘종이 상인’으로 입국하고자 했던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입국 과정이 아주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종이 아들과 딸, 상인들은 1910년 설립된 샌프란시스코의 엔젤섬(Angel Island) 이민국에서의 치밀하고 굴욕적인 심사과정을 거쳐야 했다. 실제 가족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수만 가지의 질문들, 친척관계부터 시작해서 가족과 함께 살았던 집에 계단은 몇 개였냐 등 보통 2-3주에 걸친 치밀한 심문과 ‘동양의 질병’에 대한 굴욕적인 심사를 거쳐야 했고, 심사과정은 수개월 혹은 일년 이상 이어진 경우도 있었다. 입국 혹은 추방이 결정되기까지 지연되는 심사기간 동안 이들은 엔젤섬의 구류소에 갇혔는데, 구류된 인원의 약 70%가 중국인으로, 구류소의 벽에 좌절과 한탄, 외로움에 대해 적어놓은 200여 편의 중국어 시가 기록되어 있다(Lai, Lim and Yung 2014). 엔젤섬은 대체로 아시아 이민자들이 거쳐야 하는 곳으로서 서부의 앨리스섬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엘리스섬이 (유럽) 이민자를 환영하고 이민자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유·평등·기회의 국가라는 미국의 정체성을 자랑하는 상징이라면 엔젤섬은 중국인 이민자들의 눈물이 배어있는 곳으로, 아시안 이민자에 대한 거부를 상징하고 있다.
1943년 배척법 폐지를 앞두고 엔젤섬의 구류소도 문을 닫았고, 더 이상 새로운 종이 아들은 생기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배척법이 없어진 것만으로 종이 아들 관행의 유산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못했다. 학교, 직장, 결혼 등 서류에 서명이 필요한 모든 영역에서 이들은 가짜라는 것을 가족과 주변에 숨기고 살았어야 해서 종이 아들의 존재는 재미중국인 가족 삶의 여러 부분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배척법 폐지 이후에도 종이 아들이었다는 것이 들통나 추방된 사람들에 대한 소문이 돌면서 많은 종이 아들 출신의 중국계 시민권자들은 비밀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며 지냈다고 한다.
Jim Quock처럼 1957년에 시작된 미 정부의 사면 프로그램(자백 프로그램 confession program이라고도 불렸다)을 통해 원래 성을 되찾고 적법한 시민권을 획득한 이들도 있었다. Quock 씨의 아들로 태어나 Fong씨의 종이 아들로 미국에 입국한 그의 스토리는 ‘이민자의 목소리’ 조직(www.immigrant-voices.aiisf.org)이 보유한 여러 에피소드 중 하나이다. Jim Quock은 15살에 아버지가 구매한 증명서를 지니고 단신으로 미국행 배에 올랐다. 태평양을 건너는 동안 그는 200페이지가 넘는 문서에 적힌 Fong 씨네 가족사와 동네, 집, 집에서 키우던 돼지의 시시콜콜한 사항까지 외워 심사를 받았고, 사진상 Fong씨와 닮았다는 근거(?) 하에 2주 만에 입국 허가를 받아 미국에서 Fong으로 살게 된다. Jim Fong의 경우, 실제로 Fong씨 가족과 함께 살지는 않았다. 친부가 쥐어 준 편지를 들고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지인을 거쳐 새크라맨토의 농장 일꾼으로 일하다가, 다시 샌프란시스코에 돌아와 식당의 밑바닥 일부터 시작해서 식당업을 일궜다. 번 돈으로 아버지가 지불한 출생증명서의 대금을 갚았고, 계속 중국의 가족에게 송금했으며 나중에는 두 동생을 자신의 종이 아들로 미국에 불러오기도 했다. Jim Fong은 1966년 사면 프로그램에서 고백하여 가짜 시민권을 버리고 본래 이름을 되찾아 Jim Quock으로서 영주권을 받았으며 1970년 귀화하여 미국 시민이 되었다.
그런데 모든 종이 아들들이 이처럼 해피엔딩을 맞이하지는 못했다. 메카시 열풍이 휩쓸던 1950년대의 냉전적 분위기 속에서, 사면 프로그램은 종종 당사자뿐 아니라 친구, 이웃, 동료에 대해서도 ‘자백’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누구누구가 공산주의자라고 밀고하면 시민권이 확실시된다는 소문이 돌면서 중국인 커뮤니티 내 가족과 동료 관계가 파탄나기도 했다.
【미국의 중국인 4】
정은주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참고자료
Lai, Him Mark, Genny Lim and Judy Yung, eds. 2014(1999), Island: Poetry and History of Chinese Immigrants on Angel Island, 1910-1940, 2nd ed. Seattle, WA: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My Father Was a Paper Son”
https://www.immigrant-voices.aiisf.org/stories-by-author/737-my-father-was-a-paper-son/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YeeBingQuaiAffidavit.jpg, Byron Yee and paperson.com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