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이 지난 8월 말 수도 카불의 공항을 뒤로 하고 모두 철수했다. 2001년 9.11 테러의 배후로 지목되던 이슬람 세력을 응징하기 위해 미국이 군사개입을 한 지 20년 만에 별다른 성과 없이 탈레반에 정권을 넘겨준 채 물러난 것이다. 미군 철수 후 구 정권에 몸을 담았거나 미군을 도와 준 아프가니스탄인의 해외 탈출이 이어졌고, 한국에도 390명의 아프가니스탄 난민이 도착하여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진천 본원임시생활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들 난민을 보면서 어릴 때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해상에 표류하던 베트남 난민인 ‘보트피플’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고, 어떠한 경위로 베트남을 떠나야 했는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오랫동안 모르고 지내오다 우연히 보트피플 출신이 쓴 책 한 권을 발견했다. 1992년 일본에서 출판된 『베트남 난민 소녀의 10년』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토란 고쿠 란’으로 베트남 화교 출신으로 일본에 정착한 난민이었다.
사진 1. 쩌런의 빈떠이시장
인도차이나반도의 3개국인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는 1975년 모두 사회주의체제로 전환했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을 통일했으며, 캄보디아와 라오스도 공산정권으로 바뀌었다. 세 나라의 이러한 체제 전환으로 경제활동의 제한, 정치적 박해 등을 이유로 해외로 탈출하는 난민이 속출했는데, 이들을 ‘인도차이나 난민’이라 부른다. 베트남 난민은 인도차이나 난민의 일부였지만, 홍콩과 마카오의 난민촌에 수용된 난민을 기준으로 할 때는 전체 인도차이나 난민의 7할을 차지할 정도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리고 인도차이나 난민 가운데 상당수가 화교‧화인이었다.
1975년 이전 남베트남과 북베트남 거주 화교 인구는 145만 명이며, 이 가운데 26만 명은 조국인 중국으로 귀국했다. 111만1,000명은 홍콩과 마카오의 난민 캠프를 거쳐 미국, 캐나다, 프랑스, 호주, 독일, 영국 등지로 이주했다. 일본에 정착한 베트남 난민은 1만1,319명인데 이 가운데 상당수가 화교‧화인 출신이었다. 토란 고쿠 란은 그중의 한 명이었다.
토란 고쿠 란은 1963년 당시 남베트남의 화교 도시인 쩌런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베트남 이름은 쩐 응옥 란(Trần Ngọc Lan)이며, 한자로 옮기면 ‘陳玉蘭’이다. 중국식 발음으로는 ‘천위란’이다. 토란 고쿠 란은 그녀의 베트남 성명을 일본식으로 바꾼 것으로 그녀에게는 이렇게 세 개의 이름이 존재했다. 응옥 란은 1978년 12월 10일 베트남 중부의 다낭항 근처에서 밀선을 타고 홍콩에 도착한 후, 그곳의 난민캠프에서 생활했다. 그런 후 1979년 10월 29일 2명의 오빠가 생활하고 있던 일본으로 이동하여 정착했다. 응옥 란은 일본의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으며, 일본에서 의사가 된 최초의 난민이었다.
그녀의 부친은 중국 하이난도(海南島) 출신이었다. 중일전쟁 발발 후 하이난도가 1939년 2월 10일 일본군에 점령당하자, 1940년대 초 부친은 배를 타고 쩌런으로 피신했다. 당시 응옥 란의 부친처럼 일본군에 점령당한 광둥성, 푸젠성 지역에서 신변 안전과 경제적 이유로 베트남으로 이주한 중국인이 많았다. 응옥 란의 부친은 쩌런에서 열심히 일해 재산을 모았고, 고향에 있던 부인도 쩌런으로 데리고 왔다. 부친과 모친은 쩌런에서 5남 2녀의 자녀를 두었고, 응옥 란은 막내였다.
부친은 쩌런에서 큰 상점을 경영할 정도의 상당한 부자였다. 장남과 차남을 1971년부터 일본에 유학시켰다. 응옥 란의 집은 쩌런의 중심가인 동경대도(同慶大道)에 있었고, 집 바로 앞에는 호텔이, 옆에는 약국, 비스듬하게 앞쪽은 극장이 자리한 번화가였다. 집은 4층의 건물이었다. 1층의 3분의 1은 상점, 3분의 2는 가족의 부엌과 식당이었다. 2층은 공부방과 오빠들의 침실, 3층은 부모와 응옥 란의 방, 4층은 오빠들의 공부방이었다. 응옥 란 가족의 안정된 삶은 1975년 남베트남의 공산화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진 2. 응옥 란의 가족사진. 사진 오른쪽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응옥 란의 부모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에 의해 적화통일된 1975년 응옥 란은 13살의 나이였다. 당시 쩌런의 화교학교인 원좡소학(文莊小學)의 6학년 졸업반이었다. 그해 4월 28일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학교 졸업식과 사은회 행사를 마치고 30일을 맞이했다. 이날은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북베트남에 항복을 선언, 베트남이 사회주의 국가로 통일된 바로 그 날이었다.
응옥 란은 그날 북베트남군이 쩌런을 접수하기 위해 행군하는 모습을 자신의 집 2층에서 목격했다. “녹색 전투복을 입고 고무화를 신고 있었습니다. 총을 가지고. 전차와 장갑차를 타고 들어왔습니다. 계속해서. 전차도 몇 대 정도였는지 모르지만 가득 찬 느낌이었습니다. 마치 행진 같았습니다. 병정들은 와- 하고 시끄럽게 하면서 온 것 같았습니다. 아! 이겼다, 이겼다고 말하는 병정들을 우리는 거저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쩌런의 사람들 가운데 환영하는 사람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대부분은 불안에 떨면서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사진 3. 1979년 홍콩에서의 응옥 란(중앙이 응옥 란)
베트남이 통일된 그해, 응옥 란은 화교 중학교에 진학했다. 남베트남의 공산화에 따라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에도 변화가 생겼다. 교사의 절반이 바뀌었고, 새로 임용된 교사는 대부분 중국에서 유학했거나, 북베트남에서 온 화교들이었다. “함락 후의 베트남에서 국어의 학습 내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동남아시아의 화교 교육 공통의 교과서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두보와 이백의 고전과 현대문을 배웠지만, 사회 상황이 바뀌고 나서는 상대편인 공산주의의 루쉰의 작품이나 다른 사람의 작품으로 바뀌었습니다.……함락 후 가장 바뀐 과목은 국어와 역사였습니다. 호찌민이 어떤 식으로 전쟁을 했는지라는 역사와 정치 과목도 늘어나, 공산당은 어떤 정치를 하는지, 그런 것만 배우고 있었습니다.”
화교 중학교 학생 가운데 공산당의 청년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는 학생도 있었다. “1,100명 정도의 전교생 가운데 20명 정도가 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집회에서 학생들을 똑바로 줄을 세우거나 질서를 유지하는 일을 했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호찌민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전달해 주고, 공산당을 찬양하는 노래와 중요한 말을 암송할 때의 리더 역할도 했습니다. 문예부와 합창부와 같은 부가 여럿 있었지만, 그러한 클럽의 리더로도 활동했습니다. 예를 들면, 댄스도 저쪽의 혁명 댄스, 노래도 혁명의 노래를 보급하여 선전하는 것. 소위 공산주의의 선전부원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응옥 란의 부친에게도 신변의 위험이 닥쳐왔다. 베트남공산당은 구 남베트남 정부 및 군 관계자 등의 사상교육을 위해 재교육센터로 보냈다. 그 인원은 10만 명에 달했다. 응옥 란의 부친은 부자 계층이라는 이유에서인지 베트남공산당으로부터 재교육센터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응옥 란은 위의 책에서는 재교육센터를 ‘신경제구’(新經濟區)로 불렀다. 그곳에 가면 익숙하지 않은 중노동 농작업을 부과하고 정신개조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응옥 란의 부친은 실제로 재교육센터로 보내지지는 않았고, 베트남을 탈출하게 된다.
다음 호에서는 응옥 란 가족의 베트남 탈출 과정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한반도화교와 베트남화교 마주보기 16】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참고문헌
トラン・ゴク・ラン(1992), 『ベトナム難民少女の十年』, 中央公論社
후루타 모토오 지음‧이정희 옮김(2021), 『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 학고방
위키피디아(https://ja.wikipedia.org/wiki/インドシナ難民)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은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https://ko.wikipedia.org/wiki/쩌런
사진 2, 사진 3. 『ベトナム難民少女の十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