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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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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하멜들: 14세기~19세기 아시아 표해록(漂海錄) 연구 _ 안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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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2020 아시아의 표해록전전시장 전경


지금으로부터 약 530여 년 전 한 중년의 나주(羅州) 선비가 왕명을 받아 중국에 표류했던 경험을 붓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친부상을 치르기 위해 급히 제주도에서 귀향하던 중 절강(浙江)에 표착했다가 막 돌아온 참이었다. 그는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제주도에 부임한 사연부터 여섯 달만에 한양에 당도하기까지의 여정을 빼곡하게 세 권에 나누어 적었다. 최부(崔溥)금남표해록(錦南漂海錄)(1488)은 그렇게 탄생했다.

 

최부는 강남의 대표적 도시였던 항주, 소주를 거쳐 양자강을 건너고 북경과 한양에 도달하기까지 목도한 명나라의 풍속, 산천, 제도, 운하와 문물 등을 손에 잡힐 듯 기록했다. 산더미처럼 몰아치던 폭풍우, 처음 보는 고래와 신기한 바다 생물들, 배고픔과 기갈보다 더한 두려움으로 점철된 생환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하여 해양문학의 한 흐름을 일구었다. 꼼꼼하게 기록한 수차의 이용과 제작법은 이후 충청도 해갈에 도움이 되어 아시아 과학사의 산 증거가 되었다. 금남표해록이 엔닌(圓仁)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838~847),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1298)과 더불어 중국 3대 여행기로 손꼽히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성종의 명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표해록이 낯선 땅에서의 견문을 동시대인과 나누고자 했던 그의 열정의 소산이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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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 금남표해록

 

돌이켜보면 동아시아에서 표해록을 남긴 이가 최부만도 아니었고, 모두 임금의 명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뜻밖에 접한 아시아의 풍경과 간난신고의 경험을 기록하려 한 아시아인의 자발적 의지에서 비롯되었다. 전근대 아시아 표해록에 주목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아시아 표해록을 통해 서양과의 접촉이 본격화되기 전 실재했던 아시아 문화 교류의 한 양상을 복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아시아를 위한, 아시아에 의한 기록은 정복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서구 중심의 시각에서 탈피할 수 있는 진귀한 참조 사례를 제공해 준다.

 

다른 한편, 표해록이 가진 문화적·인류학적 가치에도 주목할만하다. 표해록은 뜻하지 않게 정처 없이 표류하다가 돌아와 남긴 기록으로 박진감 넘치는 해양 체험과 이국의 풍속·제도 등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연행록이나 조선통신사 등의 사행기록이 공문서라면, 표해록은 벼슬아치, 무사, 어민, 무역상, 승려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남긴 현장감 넘치는 민간 사료이다. 그래서 표해록은 표착한 국가의 산천, 사람, 사회, 제도와 문물 등을 담은 일종의 민속 백과사전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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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2019 아시아의 표해록전전시장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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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2019 아시아의 표해록전전시장 내부

 

근대 이전에 아시아 각국의 하멜들은 적지 않았다. 대만에서 베트남으로, 일본에서 충청도로, 혹은 조선에서 류큐, 필리핀, 혹은 베트남까지 표류했던 기록들은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한자문화권에서 두루 발견되고 있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광주의 아시아문화원이 개최한 두 차례의 전시(2019, 2020)는 표해가 전근대 아시아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이며, 아시아 해양문명 네트워크의 한 축을 구성하는 데 일조했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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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5. 청국표류도3, 청 유곽


우리나라 표해록 중 대표적인 것을 뽑아보자면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표해록인 금남표해록이외에 단연 문순득(文淳得)이 돋보인다. 전남 신안 출신의 홍어장수 문순득이 오키나와, 필리핀, 마카오, 중국을 거쳐 표류했던 경험을 기록한 것이 표해시말(漂海始末)(1805~1806 추정)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가장 멀리 표류한 기록으로, 이준익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자산어보(2019)에도 나온다. 지리적 특성상 우리나라 표해록의 절대다수가 제주도에서 중국으로 떠내려간 기록이지만, 이지항의 표주록(漂舟錄)(저작년도 미상)은 부산 동래에서 출발하였다가 일본 훗카이도로 표류한 드문 여정을 보이고 있고, 김대황표해일록(金大璜漂海日錄)(1687)은 가장 멀리 베트남까지 표류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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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 조선표류일기5, 조선 전통배, 고베대학교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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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7. 조선 전통배 복원 모형

 

일본 표해록의 특징은 저자가 아름다운 그림을 같이 남겼다는 점이다. 가령, 청국표류도(淸國漂流圖)(1810)는 류큐에서 중국 강소성까지 갔다 나가사키로 돌아온 기록을 3권의 채색지본 두루마리에 남겼다. 강남의 관청, 저잣거리, 대중탕부터 운하까지 화려하고 세밀한 필치로 강남의 풍경을 묘사했다. 조선표류일기(朝鮮漂流日記)(1824)는 충청도 서천까지 떠내려 왔다 부산과 왜관을 거쳐 귀국한 일본 무사 야스다 요시카타(安田義方)의 경험을 적은 표해록이다. 19세기 조선의 풍광과 태수 행차, 전통 가옥과 배 등을 같이 그려 조선 민속사 연구에도 큰 보탬이 된다.


한편 중국의 민간 표해록은 드문데, 전통적인 대륙 중심 사상과 오랜 해금(海禁) 정책의 영향인 듯하다. 남아 있는 것으로는 해남잡저(海南雜著)(1837)가 있다. 여기에는 베트남 유학자와의 교유는 물론, 지리와 특산물, 군사와 행정까지 놓치지 않은 대만 선비의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호치민에서 일본 야쿠시마 섬까지 떠내려갔다 생환한 베트남 병사들의 기록인 일본견문록(日本見聞錄)(1828)도 있는데, 당시의 선박제조술과 긴 여정을 감안하면 놀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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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8. 해남잡저22쇄본 표지

 

네덜란드 출신의 헨드릭 얌센 하멜이 1653년 제주도에 표류했다 14년만에 탈출하여 쓴 하멜표류기(1668)는 전 유럽에 조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천신만고 끝에 살아 돌아와 남긴 그의 표해록은 동시대 아시아인들에게 큰 반향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제는 인천공항에서 서아시아까지 비행기로 하루면 충분하고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 온갖 이국의 풍경과 여행기가 넘쳐나는 오늘날, 케케묵은 표류기가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절강성 작포(作浦) 운하를 화려하게 수놓던 놀잇배(畫舫), 하노이의 화려한 왕궁도, 초라하기 그지없는 행색의 표류민을 무상으로 보듬고 제 나라로 보내 주던 구휼(救恤) 제도도 사라진지 이미 오래다.

 

그러나 표해록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표해록에 대한 연구는 동아시아 해양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에 동아시아 여러 국가의 협조 없이는 수행하기 힘들다. 500년에 걸친 전근대 아시아 표해록에 대한 아시아문화원의 연구와 전시는 지렁이같은 일본 초서를 해독하는 일부터 전통 조선 배 모형을 제작하는 일까지 전문가들의 연구와 헌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서울, 목포, 부산, 혹은 제주는 물론 베트남 한놈연구원, 대만중앙연구원, 절강성 박물관, 일본국회도서관 등이 보관하고 있는 각종 사료나 유물을 선뜻 제공해주었다. 대학교와 연구기관, 문화재연구소들을 직접 방문하거나 이메일, 전화, SNS를 통해 정보를 나누고, 파일을 다운로드 했다. 그것은 곰팡내 나는 고서를 넘어 바다교류를 공통분모로 하여 아시아의 기억과 앎()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낯선 이웃을 환대하던 공동체와 연대 정신을 21세기판 아시아 해양 문명 네트워크로 다시 구축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표해록 연구가 역사를 한갓 박제화된 과거로 만들지 않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되는 까닭이다.                 


안재연 _ 아시아문화원 교육콘텐츠개발팀장

 

                                          

해당 글은 중국학술원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2021 ACC·부경대학교 HK+ 사업단

사진 2. 국립해양박물관소장

사진 3, 4. 아시아문화원

사진 5. 와세다대학교

사진 6. 고베대학교

사진 7. 2021 ACC·부경대학교 HK+ 사업

사진 8. 난카이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