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면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이다. 중국은 이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원래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는 상하이 조계지에서 1921년 7월 23일에 개최되었다. 그리고 마지막날 회의는 저장성 자싱(嘉興)에 있는 난후(南湖)의 유람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이 회의에는 상하이 대표 리다(李達), 리한쥔(李漢俊), 베이징 대표 장궈타오(張國燾), 류런징(劉仁靜), 창사(長沙) 대표 마오쩌둥(毛澤東), 허슈헝(何叔衡), 우한(武漢) 대표 둥비우(董必武), 천탄추(陳潭秋), 지난(濟南) 대표 왕진메이(王盡美), 덩언밍(鄧恩銘), 광저우(廣州) 대표 천공보(陳公博), 일본유학생 대표 저우포하이(周佛海), 그리고 천두슈(陳獨秀)가 파견한 바오후이썽(包惠僧) 총 13명이 참가하였다. 이들은 전국 50여 명의 당원을 대표했고, 회의 결과 천두슈가 중공 중앙국 서기로 선출되었다. 당시 공산주의 전파에 앞장섰던 천두슈와 리다자오(李大釗)는 정작 다른 일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 7월 1일을 기념일로 정했을까? 7월 1일은 1938년 5월 펴낸 마오쩌둥의 저서에 처음 나온다. 마오쩌둥은 <지구전론(論持久戰)>에서 “금년 7월 1일은 중국공산당 건립 17주년 기념일이다”라고 썼다. 이후 1941년 6월 중국공산당 중앙이 옌안에서 발표한 <중국공산당 탄생 20주년, 항전 4주년 기념에 관한 지시(關於中國共產黨誕生二十周年, 抗戰四周年紀念指示)>에서 “금년 7월 1일은 중국공산당 탄생 20주년, 7월 7일은 중국 항일전쟁 4주년이므로 각 항일 근거지는 각각 회의를 소집하여 각종 방법으로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각종 출간물 특별호를 발행하도록 한다.”라고 하여 공식 문건에서 당 창건 기념일을 7월 1일로 명기하였다. 당시 옌안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1차 대표대회에 참석한 사람은 마오쩌둥과 둥비우뿐이었다. 그동안 남아 있던 자료도 없고 기억도 희미하여 편의상 7월 1일을 기념일로 정했다고 추측된다.
이 작은 모임은 점차 세력을 확장했으나 소멸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도시에서의 혁명을 위해 폭동을 일으키다가 결국 농촌의 근거지로 쫓겨났으며, 이 근거지가 공격받아 만 리에 이르는 대장정(大長征)에 나서기도 했다. 위기의 순간 공산당을 구해준 것은 일본의 침략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기보다 공산주의 세력 토벌에 주력했던 장제스(蔣介石)를 구금하여 2차 국공합작을 이뤄낸 것이 시안사변(西安事變)이었다. 이후 일본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하자 공산당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였고, 전쟁이 끝날 무렵 132만 명의 군대를 갖추고 약 1억 명을 통치하는 집단으로 성장하였다.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한 공산당은 1949년 10월 1일 톈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고 선언하였다.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으로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시작된 식민지·반식민지 상태의 굴종의 역사가 막을 내렸다고 평가한다. 시진핑 총서기도 2017년 19차 당대회에서 마오쩌둥 시기 중국이 일어섰다(站起來)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뇌리 속에는 굴종의 역사가 완전히 종식되지 않았고, 중국이 완전히 일어서지도 않은 것 같다.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민족주의 파동 속에서 중국인들은 아직까지도 서구에 대한 피해의식을 표현하고 있고,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강대해지기를(强起來) 원하고 있는 것 같다.
덩샤오핑에 의해 추진된 개혁·개방 시기에는 외국자본과 기술의 힘을 빌려 중국이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그래서인지 서구에 대한 배타성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진핑이 총서기에 취임한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이미 후진타오 시기에 중국은 일본을 추월하여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시진핑은 18차 당대회에서 총서기에 취임하자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中國夢)을 제기하였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아편전쟁이 일어나기 20년 전인 1820년경 중국의 GDP는 세계 GDP의 약 1/3을 차지했다고 한다. 중국이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9년 8.3%에서 2018년 16.3%로 증가했다(이때 미국은 24.4%). 이 추세라면 중국이 미국 경제를 추월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런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은 단지 경제력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세계는 중국이 미국을 대신하는 패권을 추구한다고 의심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은 새롭게 부상한 중국을 견제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오바마 행정부의 재균형 정책, 그리고 트럼프 행정부의 무역전쟁 등이 그것이다. 바이든 행정부도 이런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부터 시작된 미중 갈등은 전방위적으로 확산되는 모양새다. 이에 대한 중국의 대응은 전랑(戰狼)외교로 표현되는 강경 일변도다. 중국 민간에서도 이에 맞춰 애국주의 열풍이 불고 있다. 국제사회가 신장위구르 지역의 인권탄압을 제기하면서 신장에서 생산한 면화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몇몇 기업들이 발표하자 중국인들은 발끈했다. 이들은 “중국 밥을 먹으면서 중국 솥을 깨뜨리려 하지 말라”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나이키, H&M, ZARA 등 기업 제품에 대한 대대적인 불매 운동이 일어났고, 애국 마케팅을 뜻하는 궈차오(國潮) 열풍이 일어났다. 이런 반응은 이미 익숙한 바이다.
그런데 올해 3월 알래스카 회담 이후 또 다시 수난의 역사에 빗댄 비유가 등장했다.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중미 양국의 외교 담당자들이 3월 18일 알래스카에서 처음 만났다. 그러나 회의 시작부터 설전이 이어져 건설적인 결과를 도출하지 못했다. 압권은 이를 보도한 기사였다. 중국공산당 선전매체 인민일보가 웨이보에 1901년 신축조약과 올해 알래스카 회담을 비교한 사진을 게재한 것이다. 이 사진은 인터넷을 타고 전 세계에 알려졌다. 중국외교부 대변인은 “오늘의 중국은 120년 전의 중국이 아니다. 외국 열강이 대포 몇방으로 중국의 대문을 열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신축조약이 무엇인가?
사진1. 인민일보가 웨이보에 게시한 신축조약과 알라스카 회담 비교 사진
1901년 신축조약은 의화단 운동 때문에 야기된 불평등 조약이다. 의화단의 난은 부청멸양(扶淸滅洋)을 기치로 교회, 철도, 학교 등을 파괴하고 외국인과 기독교도를 잔인하게 살해했으며, 각국 공사관을 공격한 운동이다. 열강은 자국민 보호를 위해 청나라에 의화단을 진압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오히려 청 정부는 열강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당연히 열강은 8개국 연합군을 구성해 베이징을 점령하고 의화단을 진압했고, 베이징을 약탈했다. 그리고 1901년 맺은 조약이 신축조약이다. 물론 베이징 점령 과정에서 약탈 등의 악랄한 행위가 있었지만, 8개국 연합군 베이징 진주의 원인 제공자는 당시 중국 정부였다.
여담으로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신축조약으로 받은 배상금을 1908년 반환하였고, 그 자금으로 청 정부는 미국유학을 위한 예비학교를 세웠다. 1912년 이 학교는 이름을 칭화(淸華)학교로 개명하였고, 1928년에는 칭화대학으로 다시 이름을 바꿨다. 시진핑이 졸업했다는 그 대학이다.
6월 13일 영국 콘월에서 개최된 G7 회의를 두고도 중화권 어느 언론은 새로운 ‘8개국 연합군(新八國聯軍)’이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매우 적절하지 못한 비유이기도 하거니와, 중국의 피해자 콤플렉스가 다시 고개를 내민 사례이기도 하다. 중국은 미국 등 강대국을 대할 때는 항상 자신을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것이 아편전쟁 이후의 역사를 소환하는 것이다. 반면 자국보다 힘이 약한 국가를 대할 때는 태도가 돌변한다. 중국은 평화를 옹호하며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는 나라라고 선전한다. 그동안의 전쟁도 항상 자위반격전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따지면 6.25 참전, 중인전쟁, 중월전쟁은 모두 중국이 침략을 받아서 어쩔 수 없이 벌인 전쟁이 된다. 과연 주변 국가들 혹은 국제사회가 이런 모순된 논리를 인정할 수 있을까?
중국은 중국몽을 이루기 위해 내부 단결이 필요할 것이다. 가끔 애국주의가 나타나는 것은 그 과정에서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고 국제사회에 공헌하고자 한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태도를 보여야 한다. 그 출발은 역사적 피해의식이라는 색안경을 벗고 맨눈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다. 그럴 때만이 세계도 안정되고 중국의 꿈도 한층 더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구자선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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