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찌민이 1945년 9월 2일 하노이의 바딘광장에서 낭독한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선언문 가운데에는 1945년 베트남북부(당시는 통킹이라 불렀음)에서 기근으로 인해 200만 명이 아사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당시 꾸앙찌성 이북의 베트남북부 거주 총인구가 약 1,316만명에 달한 것을 고려하면 거주자의 약 15%가 아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베트남정부가 1995년 발표한 베트남전쟁(1964.8-1975.4) 중 전쟁으로 인해 사망한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의 민간인은 200만명이었다. 즉, 1945년 대기근 아사자와 약 10년간의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사망자가 같았다는 것인 만큼 대기근의 참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진 1. 기아에 허덕이는 베트남인들
그런데 1945년 대기근은 일본과 프랑스의 공동통치에서 일본 단독통치로 이행하는 전환기에 발생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한 틈을 이용하여 일본군이 1940년에 베트남북부, 1941년에 베트남남부(당시는 코친차이나라 불렀음)에 각각 진주, 프랑스 식민지정부와 함께 인도차이나를 공동으로 통치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수립할 목적으로 1945년 3월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스 식민지정부를 전복시켰다. 1945년 대기근은 1945년 1월부터 쌀의 봄 수확 전인 4월 사이에 절정에 달했기 때문에 일본 통치 시기 및 공동통치 시기에 발생한 것이다.
베트남 독립 후, 일본과 남베트남 사이에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대한 배상 회담이 개최됐다. 일본정부는 배상 회담에서 1945년 대기근 발생에 대한 책임은 인정하면서도 아사자 수는 30만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일본과 남베트남 간의 배상 협상이 타결되자 일본은 1960년부터 5년간 무상 140억엔, 유상 25억엔의 차관을 제공했다. 하지만 북베트남의 호찌민 정권은 협상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30만명설’과 ‘100만명설’ 모두를 부정했다. 1975년 지금의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 수립된 후에는 그전의 북베트남(베트남민주공화국)이 주장해 온 ‘200만명설’이 정착됐다. 하지만 1945년 대기근에 대한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1986년 베트남판 개혁개방정책인 도이머이 정책이 도입된 이후, 1945년 대기근 문제에 대해서도 정치의 구속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조사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일본과 베트남의 일월우호협회 간에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양국 관계에 대한 조사를 실시할 것을 합의했다. 이를 바탕으로 양국의 학자들에 의해 1992년부터 1995년까지 4년간에 걸쳐 대기근이 발생한 베트남북부 전지역 가운데 23개 촌락을 조사했다. 조사 결과는 1995년 베트남의 역사연구소에서 《베트남의 1945년 기근-역사적 증거》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공동조사의 일본측 책임자인 후루타 모토오(古田元夫) 도쿄대 교수의 논문에 근거하여 조사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45년 대기근이 꾸앙찌성 이북의 베트남북부의 거의 전역에서 발생했을 정도로 지역이 광범위했다. 기존에 북부의 홍하델타지대와 중부의 해안평야지대에서 대기근이 발생한 것은 알려져 왔지만, 공동조사에서 소수민족의 거주지역인 까오방성 등지에서도 기근 피해가 발생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둘째, 23개 촌락의 피해가 최저인 경우도 당시 촌락 인구의 8%를 넘었을 만큼 피해가 심각했다. 23개 촌락의 1945년 대기근 사망자는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과 베트남전쟁으로 사망한 이들 촌락의 인원보다도 많았다. 이런 점에서 베트남북부 농촌의 주민에게 1945년 대기근은 20세기 최악의 비극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공동조사의 베트남측 책임자인 쩐타오 교수는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아사자가 베트남북부의 당시 인구의 15%인 197만명을 하회하지 않는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즉, 기존의 ‘200만명설’에 신빙성을 부여한 것이다. 하지만 정확한 아사자 수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림 1. 1945년 대기근 관련 베트남 주요 성과 도시
셋째, 기아의 피해가 지역별로 차이가 존재했다. 아사자 규모가 전체 인구의 8%에서 73%까지 매우 폭넓게 분포했다. 홍하델타가 범람하는 지역에서 해안에 이르는 지역은 30%를 넘는 아사자가 발생했다. 하노이 주변 지역은 전통적으로 풍요로운 지역이어서 그다지 아사자 비중이 높지 않았다. 베트남중부의 피해는 홍하델타와 비교하여 적었지만, 이곳에서도 10-30%대의 아사자가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1945년 대기근 발생의 원인은 무엇일까? 후루타 모토오 교수는 4가지 원인을 들었다. ① 1944년 가을 이후의 기후 불순으로 인한 흉작. ② 일본과 프랑스 식민지정권에 의한 미곡강제매입의 시행. ③ 쌀 이외의 잡곡으로 전작하여 생산량이 감소한 점. ④ 미군의 폭격으로 베트남남부에서 북부로 수송하는 루트의 차단이다. 특히 1945년 대기근 때 생존한 주민은 4가지 원인 가운데 ①과 ②를 주요한 원인으로 들었다. 필자는 이 가운데 원인 ②에 주목한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수행하는데 인도차이나를 식량 공급기지로 삼았다. 1938년 인도차이나 미곡 총수출량의 63.7%가 프랑스 및 본국 식민지로 수출되었고, 중국 및 홍콩에 14.6%, 일본에는 0.02% 수출되는데 불과했다. 그러나 1941년이 되면 미곡 총수출량의 59%, 1942년에는 98.3%가 일본으로 수출이었다. 일본은 전쟁 수행의 필요에서 프랑스 식민지정부에 대일 미곡 수출량을 제시하면서 압박을 가했다. 일본이 요구한 미곡 수출량에 대한 실제 미곡 수출량의 비중을 보면 1941년 84%, 1942년 91%, 1943년 91%, 1944년 55%에 달했다. 실제 대일 수출 미곡량은 1940년 4억 6,800만톤, 1941년 5억 8,500만톤, 1942년 9억 7,400만톤, 1943년 10억 2,347만톤이었다. 대일 수출 증가로 베트남북부에 공급할 미곡량이 점차 감소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프랑스 식민지정부는 일본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미곡유통기구와 미곡수출기구를 통제했다. 식민지정부가 매입하는 미곡 가격은 시장가격보다 저렴했기 때문에 미곡 상인과 주민은 식민지 정부에게 미곡을 내어놓지 않으려 했다. 일본군이 쿠데타를 일으킨 후에는 거의 강제로 미곡을 매입했다. 그런데 인도차이나의 미곡유통기구는 화교가 장악하고 있었다. 화교의 협조 없이는 계획된 미곡량을 일본으로 수출할 수도 국내 유통도 원활하게 이뤄질 수 없었다. 화교 미곡 상인의 입장에서는 이익이 되지 않는데 농민으로부터 매입한 미곡을 자유롭게 유통시킬 유인이 없었다. 화교 미곡 상인은 미곡을 유통시키지 않고 감춰두거나 암시장으로 유통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면, 1945년 대기근은 대일 미곡 수출의 증가, 흉작과 미곡의 잉여지인 남부에서 북부로 수송이 어려워지면서 북부로의 절대적 미곡 공급량이 감소한 상태에서 화교 미곡 상인의 미곡유통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은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한반도화교와 베트남화교 마주보기 13】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참고문헌
최병욱, 「쌀 전쟁-일본군과 베트남 농민의 싸움」, 『베트남 근현대사』, 산인, 2019, 126-132쪽.
油井大三郞·古田元夫, 「ベトナムの45年大飢饉」, 『第二次世界大戰から米ソ對立へ』, 中央文庫, 2010, 181-187쪽.
古田元夫, 「ベトナム現代史における日本占領」, 『東南アジア史のなかの日本占領』, 早稻田大學出版部, 1997, 504-524쪽.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https://vi.wikipedia.org/wiki/Vo An Ninh
그림 1. 중국학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