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중국의 인터넷 신문상에 심심치 않게 올라오는 기사가 있다. 바로 차이리(彩禮)에 관한 것이다. 차이리는 중국에서 결혼할 때 신랑집에서 신붓집으로 보내는 현금이다. 특히 최근 농촌의 차이리 가격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어 사회적인 관심사가 되고 있다. 심지어는 작성 주최나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는 지역별 차이리 가격지도가 인터넷상에 떠돌고 있다. 처음 작성된 것은 2013년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래 사진이 바로 최근에 올라온 지역별 차이리 지도이다. 적게는 1만 위안부터(한화 약 174만 원) 많게는 20만 위안까지(한화 약 3,500만 원) 형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역에 따라서는 여기에 결혼예물이나 살림집은 포함되지 않는다. 간단한 비교로는 일정한 규칙성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가격은 지역별로 차이가 있다. 이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 해도, 지역마다 일정한 가격이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차이리의 유행이 전국적인 현상인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그림 1.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차이리 가격 지도
이를 증명하듯 아래 표는 2020년 9월 남녀를 대상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합리적인 차이리” 가격은 얼마인가를 물은 결과를 나타낸 것이다. 남자는 1-5만 위안(한화 약 174~871만 원)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여 43.7%로 나타났고, 여자는 5-10만 위안(한화 약 871~1,740만 원)이 가장 많아 35.2%로 나타났다. 차이리는 신랑집에서 신붓집에 주는 것이니 현실적으로 남녀의 인식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차이리가 필요하지 않다고 답한 경우는 남자가 15.3%, 여자가 5.6%라는 것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중국인의 많은 수가 차이리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만 너무 많은 액수가 오고 가는 것은 미풍양속을 해칠 뿐 아니라 당사자 집안에 큰 부담이 되기 때문에 적절한 선에서 조정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림 2. 2020년 차이리 적정 가격 설문조사표
그러나 차이리는 결혼에서 ‘현금’이 오고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그리 낭만적이지는 않다. 그 협의의 과정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돈 때문에 자신의 사랑의 가치가 희석된다는 실망감을 느끼기도 하고, 상대방에 대한 서운함 혹은 두터운 차이리를 통해 자신의 부를 과시하거나 체면을 차리고자 하는 심리 등등, 그 과정에서 이미 불화의 씨앗이 싹트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반드시 돈의 다과가 아니라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가 되고 심지어는 파혼이나 이혼에 이르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런 경우 십중팔구 차이리 반환 소송도 함께 진행된다. 무거운 차이리 부담 때문에 살던 집을 팔고 빚을 내면서 하층민으로 전락해가는 부모들도 생겨나고 있다고 하니, 차이리는 이제 개별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최근 중국 농촌사회에 불고 있는 차이리 바람을 전 중국 사회가 우려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이유이다.
이를 반영하듯 최근 2021년 3월 6일 전국정협위원 장가이핑(張改平)은 농촌에서 차이리가 유행하는 이유를 진단하고 이에 대한 해법을 내놓았다. 그는 현재 신농촌 보험 기초 양로금이 너무 낮게 책정되어 농촌인구의 기본생활비를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랑집에 차이리를 많이 요구하여 부족한 양로금을 충당하고자 하는 심리가 있다는 것이다. 또 현재 중국은 남녀 성비의 불균형이 심각한데, 특히 신붓감을 찾기 어려운 농촌에서 차이리를 많이 주고서라도 신부를 구해오고자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농촌 사람들의 사고가 고루하여 남과 비교하는 경향이 강해 너도나도 차이리 가격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진단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농촌의 기초 연금을 높이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야 하며, 농촌의 정신문명 건설을 강화해야 한다는 그의 해법은1), 그의 ‘비장함’에 비해 다소 김빠지는 대책이 아닐 수 없다. 농촌 기초 연금을 높이자는 것을 제외하면 그것이 모두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차이리의 문제점은 알고 있지만 개선이 잘 안 되는 이유는 그것이 ‘전통’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차이리는 전통시기 혼인의 ‘빙례(聘禮)’에서 유래되었다. 현재 중국의 혼인법에서는 차이리를 금지하고 있지만 오래된 ‘전통’이라는 이유로 판례에서는 이를 인정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차이리 즉 혼인에서 현금을 주고받는 행위가 법으로 금지된 것은 1930년 중화민국시기 국민당 정부에 의해 제정된 민법에서부터 였다. 민법이 반포되어 시행되기 전까지는 ‘혼서(婚書)와 빙례’는 혼인 성립에서 가장 중요한 두 요건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민간에서 빙례가 단절되었던 적은 없었고, 기껏해야 정부에서 요구하는 새로운 혼서의 양식에 맞추려는 ‘시늉’을 했을 뿐이다. 이마저 따르지 않아도 법에 따라 위반자를 색출할 방법도 없었고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 이상 민간에서는 여전히 빙례가 오히려 강력한 사회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고 사회주의 국가건설이 시작되면서 인민은 집단에 소속되었고 강력한 혼인법이 시행되고서야 차이리는 비로소 단절되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개방과 함께 차이리는 ‘전통’이라는 이름의 날개를 달고 화려하게 부활했다. 개혁개방의 성공으로 얼마간의 현금을 손에 쥐게 된 계층을 시작으로 차이리 관습이 부활한 것이다. 그렇다면 빙례는 도대체 어떤 것이었길래 ‘차이리’의 부활에 이런 정당성을 불어넣고 있는 것일까.
전통시기 중국의 혼인은 ‘예(禮)’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나라 때 제정되었다는 『주례(周禮)』와 『의례(儀禮)』에는 이미 혼례가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다. 그때부터 혼인은 ‘예’라는 이름을 달고 사회적 행위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당대(唐代)에 율령체제가 갖추어지면서 혼인법은 예(禮)와 율(律)의 양면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즉 국가의 기강이나 신분질서를 교란시키는 행위 등은 율(律)이나 령(令)으로 규정하고, 그 위반에 대해서는 엄격한 형벌을 가했다. 양민과 천민의 혼인이라든지 주로 신분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 등이 여기에 해당되었다. 그렇지 않은 것, 예를 들어 혼인의 성립 절차라든가 과정 등은 국가의 사소한 일이라 여겨 개입하지 않았고, 민간의 관습을 따르게 했다. 더욱이 원래 상류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예’는 송대에 와서 주자(朱子)에 의해 간소화되었다. 여섯 차례의 복잡한 예로 구성되어 있던 혼인 절차도 간소화되어 3례(納采, 빙례, 親迎)가 행해졌고, 이것이 민간에 널리 확대되었던 것이다.
빙례는 사실 중국의 정혼(訂婚)제도로 인해 생겨났다. 중국의 전통적인 혼인은 정식 혼인예식이 행해지기 전에 미리 혼처를 정해두는 방법을 취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다양하지만, 정혼에서 정식 혼인까지 길게는 몇 년이 걸리기도 했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상대방을 일정정도 구속하기 위한 목적으로 행했던 것이다. 정혼은 남자측과 여자측이 경(庚), 첩(帖)을 교환하면서 시작되었다. 경, 첩은 혼인 당사자의 사주팔자가 적힌 간단한 붉은 종이쪽지를 말한다. 이를 신랑, 신붓집에서 서로 교환하여 가지고 있다가 혼례가 행해지면 정식 혼서로 바꾸는데, 이로써 혼인이 성립되었다. 그런데 중매인을 통해 경첩이 오고가는 과정에서 달랑 경첩만 보내지 않았다. 상대방 가정에 약간의 예물도 함께 들려 보냈는데 이것이 바로 빙례이다. 빙례는 장신구가 될 수도 있고, 술과 음식, 포필 등이 되기도 하고, 빙금(聘金)이라 하여 현금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빙금이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해당 결혼이 매매혼처럼 비춰지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빙례는 지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이기도 했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았다. 민국시기 『민사습관조사보고록(民事習慣調査報告錄)』에 의하면, 글을 모르거나 신랑집이 가난하여 빙례를 할 수 없는 경우에는 경첩을 생략하고 빙례로 술 한 병을 보내기도 했다. 심지어는 이웃과 나누어 먹으라고 따끈한 찐빵을 한 소쿠리 보내기도 했다. 이를 두고 다른 사람들이 왈가왈부할 수는 없었다. 이때 신랑집에서 보낸 음식을 신부측에서 받는다는 것은 혼인 과정에서 중요한 표식이 되었다. 술 한 잔을 받아 마시거나 가져온 음식을 먹는 등의 행위는 모두 혼인을 허락한다는 승낙의 표시였기 때문이다. 만일 해당 혼인에 관심이 없다거나 이를 수락하지 않는다면 함께 가져간 빙례도 받지 않았다. 그것으로 해당 혼인은 성사되지 않았다.
사실 빙례는 경첩에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경첩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식자층이 많지 않은 지역이나 민간에서는 경첩보다 빙례를 더 중시했다. 분실하기도 쉽고 누군가에게 대필을 시켜야 하는 경첩보다는 빙례가 확실한 증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이웃과 술 한잔, 찐빵 하나라도 나누어 먹었다면 이것은 해당 혼인의 증인을 확보하는 행위였다. 이러한 사회적인 요구는 원래의 혼서의 양식마저 바꾸게 했다. 더욱이 명청시기 인구의 잦은 이동과 사회경제적 발달은 혼인에서 주고받는 빙례의 규모를 확장시키는 데 기여했고, 부유한 사람들은 많은 빙례를 통해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고 싶어했다. 한편 가난한 집안에서는 딸을 시집보내면서 평생 만져볼 수 없는 큰돈의 빙금을 요구함으로써 한밑천 잡고자 하는 심리를 갖기도 했다. 신랑집에서 신붓집에 주기로 약속한 빙례 혹은 빙금을 혼례 전까지 주지 않아 혼례를 거부하거나 '신부 데려가는 것(迎娶)'을 막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었다. 따라서 빙례나 빙금을 행하지 않아 소송이 발생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지금 부활하고 있는 차이리는 빙례라기보다는 빙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차이리의 유래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관습이라는 이유로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실 전통시기에는 지역이나 가정에 따라 다른 양상이 나타났고, '빙례'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것도 최소한 명분상으로는 ‘예’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의 차이리 가격의 증가는 최근의 집값 상승이라는 복잡한 요인을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과 같은 천편일률적인 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또 지금 현재의 혼인은 특별하게 정혼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따지고 보면 정혼과 정식 혼인 사이의 빙례도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리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정당성을 얻고 있는 것은 전통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만 보고자 하는 심리가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손승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1) 「全国政协委员张改平:建议遏制农村天价彩礼陋习」, 『新京報』 2021.3.6.
* 이 글에서 사용한 그림은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다
그림 1. www.sohu.com
그림 2. 9d82d158ccbf6c81f06fd78d403cc13233fa4001